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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이 책은 철학자가 운전하는 타임 머쉰과 같다. 공간적인 관점에서 비엔나, 파리, 피렌체, 암스테르담, 에든버러,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런던, 바젤을 경유하여 아테네까지... 그저 도시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그 도시에 살아 숨쉬는 깊은 철학적 바탕...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만큼 파고 들어갈 수 있는 행복하고 매력적인 독서의 추억이 이 책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책 제목만 놓고 보면 건축이나 토목공사가 개입된 듯 하기도 하고, 거기에 적당한 철학의 이야기가 스며든 것 같기도 하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을 펼쳐서 읽어주면 판단이 빨리 서지 않을까 싶다.
네덜란드인은 17세기를 '황금시대'로 부른다. 그때의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전시장이었고, 종교 박해를 피해 찾아온 자유의 땅이었으며, 또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었다.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무역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뉴욕이 뉴 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데카르트가 피신한 자유의 땅이었으며, 스피노자 가족이 포르투갈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정착한 땅이었다. 화가 렘브란트가 빛의 세계를 만든 곳이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암스테르담 도시 계획의 기본 원칙은 17세기 도시 풍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암스테르담에는 어제와 오늘이 공존한다. 도로와 운하가 나란히 이 도시를 달리고, 자연과 문화가 함께 숨을 쉬듯이. (제1권 176쪽에서)
중세 성벽 도시에서 시곗바늘을 과거가 아닌 오늘로 향하면, 우리는 이 성벽 도시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야기를 만난다. 우리에게 낯익은 용어인 시민은 역사 공간에서는 바로 이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점은 독일어 '부르크(Brug)'를 같은 뜻인 프랑스어 '부르(Bour)'로 바꾸어 보면 더 분명해진다. 우리가 시민 또는 시민 계급이라고 번역하는 '부르주아지'는 성(부르) 안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유럽에서 근대의 역사는 성 안에 있는 부르지아들이 그들의 힘을 확장해 나가는 역사다. 나는 중세가 도대체 무엇인가 묻는다. 중세가 낭만의 이미지로 탈바꿈해 마치 엔티크 가구처럼 명품 마케팅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오랫동안 중세는 낭만과 명품이 아니라 암흑과 거침의 상징이었다. (제2권 445쪽에서)
시공을 넘나들며,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 도시에 살아 숨쉬는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그들의 흔적들을 밟아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도시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어느덧 그 때 그곳의 시민이 된듯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저자는 언제나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라고 말해 준다.
첫번째 여행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비엔나이다. 절대왕정이 사라지고 살아남은 유럽의 왕들은 숨을 죽였으며, 왕정이 사라진 곳에 공화정이 들어섰던 그 시대, 그곳에는 과학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낸 비엔나 서클이 있었다. 논리 분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들고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재무장 하면서 오로지 과학적 세계관만 옳다고 주장해 버린 그들은 철학의 맏형격인 형이상학을 제거해 버리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은 모두 떠났으며 마지막까지 그곳을 지켰던 모리츠 슐리크는 1936년 반유대주의자인 제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가 쓰러진 비엔나대학의 계단이 '철학자의 계단'이란 이름으로 남아 전해질 뿐 그들은 상식과 멀어진 철학자들로 평가받으며 씻겨져 버렸다. 저자는 계몽의 참정신을 생각하며 1968년의 파리로 독자들을 데려 간다.
파리 서쪽에 자리잡은 파리10대학(구 낭테르대학)은 68혁명의 진원지로 과학적 세계관을 비웃으며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곳이다. 68혁명은 단순 좌파운동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회 격변이었다. 프라하의 봄, 크로아티아의 봄, 멕시코의 틀라텔레코의 밤 등 이념을 떠나 권위주의 또는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요구였다. 사이비 민주주의에 대한 가면 벗기기라고도 할 수 있다. 드골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진압에도 성공했지만 이듬해 물러난다. 역사의 눈으로 되돌아 보면 이 혁명의 승자와 패자가 차지한 명암은 극명하게 바뀌어 있다. 2008년 대한민국의 2MB 정부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나 철학적 고민을 조금이라도 했었더라면 오늘 날 이 부끄러운 한반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리오타르와 비트겐슈타인을 만난다. 저자는 68혁명에서 포착해야 할 포스트모더니티를 이야기 하며, 다양성을 위한 축배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임을 들려주는 멋진 여행 가이드가 된다.
20세기 초 비엔나와 1968년의 파리를 여행하다가 잠시 현실로 돌아와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본다. 세계 지도를 여러 관점으로 뒤집어 보다가 '신의 관점으로 세상 보기'를 통해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 단 하나의 진실된 이야기는 없다는 절대 진리의 거부자 힐러리 퍼트남을 만난다. 실재는 표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이야기 하다가 로티의 주장을 끌어 드려 토론을 확대시킨다. 퍼트남은 로티에게 왜 그렇게 냉소적이냐고 질문하고, 로티는 퍼트남에게 자신은 다른 곳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철학적 입장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비엔나 써클의 과학적 세계관 혹은 토대주의와 다문화 주의를 극찬한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 독자는 결론 없는 생각의 늪에 빠져드는 것과 동시에 책읽는 재미에 쑥 빠져들고 말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는 근대적 세계관의 출발점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인본주의가 작품의 원근법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은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설명을 명확하게 해준다. 피렌체 시민들에게 큰 선물이 된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와 콰트로센토(=1400년대=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분위기)는 머리가 덜 아픈 편안한 여행으로 평범한 독자들을 한 숨 돌리게 할 것만 같다.
콰트로센토를 지나면 앞에서 언급했던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합리주의가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2차원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뛰어넘은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있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Gogito ergo Sum)로만 설명하기엔 너무 우스워서 '방법서설'의 일독을 권하는 저자의 친절한 독서 권장을 만난다. 그 권유에 따라 저렴한 범우사판 전자북으로 한 권 구입하여 데카르트가 그 결론을 내리기까지 생각의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 보며, 후원자가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쓸 수 있었던 데카르트의 유복함에 감사드린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 그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였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고민하게 된 부분이다. 암스테르담 여행은 여기까지...
우리는 18세기의 에든버러로 떠나 경험주의를 추적한다. 그곳에서 저자는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Adam Smith),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을 소개시켜 준다. 책의 오류 하나! 이름은 같은 Adam인데 그렇게 나란히 표기되면서 하나는 아담이고, 하나는 애덤인지 편집자가 신경써야 할 부분인 듯 싶다. ^^;
에든버러 여행 중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 등장하는 맥베스와 덩컨왕이 바로 그 지역 출신임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그들의 야만성은 잉글랜드 사람인 셰익스피어의 과장이 지나친감이 없지 않지만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임을 설명한다. 에든버러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수도라기 보다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쇼윈도라는 저자의 관점도 비약은 아닌지 살짝 걱정된다.
철저한 계몽의 철학을 찾아 칸트가 머물렀던 쾨니히베르크로 향하며 "사파레 아우데(Sapere Aude)!"를 외친다. 그것은 칸트의 근대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로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라틴어이다. 저자는 훌륭한 철학자는 답을 아는 사람이라기 보다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만능 철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칸트는 그것을 도그마라 불렀음을 알려준다. 칸트가 살았던 동프로이센의 쾨니히베르크는 이제 러시아 땅으로 도시 이름도 칼리니그라드로 바뀌었다. 그 이름을 제공한 칼리닌은 레닌의 동료 정치가로 단 한 번도 그 땅에 와본적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며 수많은 독일인들은 폴란드를 경유해서 이 땅을 찾으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칸트의 이성에 조목조목 이의 제기하는 헤겔을 만나 탈근대 조짐을 읽고, 이른바 변증법을 만난다. 독일 관념론의 두 거인을 통해 머리 아픈 철학의 선험적 환원과 변증법이 주고 받는 요약된 이야기가 아무리 여행이라는 부드러운 형식을 빌렸다 해도 머리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전문가들은 철학의 즐거움을 논하겠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어서 독일을 탈출하고 싶어 지는 대목이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만난다. 그는 헤겔의 제자로 스승이 주장한 변증법적 관념론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로 바꿔 쓴 거인이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여 침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읽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그 얼마나 오해받았던 학문이던가.
애당초 근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바젤을 경유하면서 니체를 만난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선언을 통해 기독교적인 세계관 뿐만 아니라 근대 르네상스의 허구를 지적한다. 니체가 부정하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찾아 고대 아테네를 들러 로마로 향한 독서가 기다리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말을 찾아 아테네를 둘러보고, 로마로 가는 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자체가 철학적인데, 중세 시대에도 여전히 유럽의 중심지였던 그곳의 철학을 되짚어 본다. 중세의 공간이 기독교 신학과 플라톤 철학의 만남으로 아름답게 피어 오른 듯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피 튀기는 전쟁터였음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 독자는 저자의 사고로부터 벗어나서 자신만의 철학을 정비하고, 여행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시간과 공간의 정리해 볼 시점에 이른 것이다. 정답을 찾지 말고 이것저것 잡생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도 즐거움이며, 책이 안내한 여행지를 찾아 상상 또는 현실의 여행을 기획해 보는 것도 제법 쓸만한 보람이 아닐까 한다.
책을 덮는 순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원 제목이 '숨마 테올라지카'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숨마쿰라우데'를 지겹도록 광고하던 청량리 인근의 풍경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이곳저곳 부수고 새롭고 거대한 빌딩으로 거듭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철학이 무엇인가 고민해 본다. 이 도시도 불타버린 남대문을 몇 백억원이면 더 멋지게 지을 수 있다는 황당한 생각을 하는 지도자들의 시대를 벗어나 토목의 철학을 넘어선 깊이 있고 아름다운 그 무엇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한 권으로 만들어도 됐음직한 책이 굳이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실망할 뻔 했는데, 제2권이 262쪽부터 시작되어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을 휴대하기 편하도록 분권해준 느낌이랄까. 출판사의 배려가 고마운 책이다.
유럽지도에서 여행지를 도려내서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간단한 지도를 그려주는 것도 이 책 편집이 칭찬받을만한 요소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