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역사 - 일상생활과 예술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나체 이해 방식
장 클로드 볼로뉴 지음, 전혜정 옮김 / 에디터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동양인에게 수치심이란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사상을 지배해 왔던 유교를 빼놓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는 유교사상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그 순간 우리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아마도 동양인에게 있어서 수치심의 역사는 유교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여 꽤나 단순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내 짧은 생각이다. 물론 일본의 사무라이들의 활복과 같은 또 다른 수치심을 파고들면 동양인에게 수치심은 점점 복잡해지겠지만 어쨌거나 서양만큼 복잡하지는 않아 보이고 이 책 또한 동양인은 철저히 배제한 서양인에 의한 서양인의 수치심과 그 뿌리를 찾아가는 주제를 다룬다.

과연 서양인들에게 수치심이란 무엇이며 그 뿌리는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벨기에 출신으로 동양의 유교 사상에 의하면 이제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중세 역사연구가 '장 클로드 볼로뉴' 선생님이 그 해답을 찾아 500여쪽의 두꺼운 책으로 내놨고, 묵직하게 두 손에 들렸다.

우리와는 다르게 누드비치와 나체족들의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들려오고, 수천 년 전부터 전해오는 그리스의 조각상이나 회화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인체의 묘사는 예술과 수치심의 경계를 오가며, 성을 소재로 하는 문학작품이 거침없이 발전해 온 서양인들에게 수치심이 무엇인가 그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서양의 역사라는 규정은 역사가 짧은 아메리카 대륙 쪽보다는 유럽만의 역사일 확률이 높고,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체계적인 정리보다는 다소 산만하게 추적되는 역사의 정리라고 볼 수 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특별히 학문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이 방대한 분량의 독서가 흥미진진할 까닭은 없을 것도 같다. 특히 나와 같은 동양인에게는 따분한 독서의 추억이라고나 할까? ^^;;

신성한 수치심, 종교적인 수치심, 개인적 수치심, 사회적 수치심, 관습적인 수치심, 정신적인 수치심...
이러한 규정들을 보면 수치심을 또 왜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느냐고 따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뚜렷하게 신성한 수치심이 존재했고, 17세기에는 서양기독교 역사를 기반으로 종교적인 수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19세기에는 개인적인 수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개인적인 수치심이 있으니 사회적인 수치심도 따라서 존재했을 것이며, 생각이 발달하다 보니 정신적인 수치심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당연한 학문적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나체는 인간의 원초적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편견에 대한 승리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원죄 의식과 결부된 기독교적 수치심과는 판이하게 달랐다고 정의하는 저자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고대 그리스의 육상선수 오르시페 군이 경기중에 팬티가 벗겨진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 순간 나는 참으로 어려웠다. 오르시페가 누구야? 역사 연구가답게 사생활에 대한 자료가 풍부했기에 그러한 예를 들었겠지만 그 때 오르시페가 벗겨진 팬티 때문에 수치심을 느껴 우승을 놓친 사건 때문에 선수들은 이후로 알몸 출전을 원칙으로 하고, 여성들은 경기장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어렵지만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그 시대에는 성관계를 가진 남성이 사원에 입장하기 전에는 반드시 씻고 들어가야만 했다는 기록을 찾아낸 점, 아테나신전에서 포세이돈에게 능욕 당한 메두사의 이야기는 윤리적 기준에 의한 수치심이 아니라 종교적 금기였노라고 정의하는 점을 보면 새로운 역사를 정의해 가는 필자의 노력이 돗보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극도의 부끄러움 때문에 궁정의 관례와 달리 주위 사람을 물리치고 혼자서 변기에 앉았다. 수치심 탓에 의사에게 궤양을 보이지 않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은 치료를 제대로 못 받은 채 목숨을 잃었다. 루이 13세 부부는 ‘정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궁정 벽화와 그림들을 훼손했으며, 당시 재상 마자랭도 같은 이유에서 많은 조각상을 부쉈다. 그러나 비슷한 시대에 몽트뢰유 벨레 남작부인은 용변 뒤처리 때에도 남의 도움을 받았는가 하면, 어떤 왕은 변기에 앉아 신하들을 만나고 연극배우들을 거의 벌거벗겨서 무대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최초의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누드로 묘사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신의 나체는 결코 무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5~6세기에 도입된 예수 그리스도는 슬슬 옷을 입기 시작했고, 이후 2세기 동안 잘 다듬어진 패션은 서양 예술사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콜로비움은 발꿈치까지 내려오고 소매가 달렸으며 가죽끈으로 허리를 졸라맨 모습이다.




일상생활과 예술분야로 크게 나눈 후, 12가지 장르로 세분화 되어 펼쳐지는 수치심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욕조와 수치심
16세기 이후 공공장소에서 벌거벗고 물놀이 하는 자유는 사라졌지만, 사생활에서의 목욕은 중세시대 손님 접대라는 맥락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된다. 욕조에서 손님을 맞는 일이 무례로 여겨지지 않았다. 16세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테마 즉, 목욕 중 들이닥친 손님을 맞이하는 귀부인이라는 주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인을 그리기 위한 구실이기도 했지만, 18세기까지 상류층 여성이 목욕 중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2. 수치심과 옷
"옷은 우리를 나체의 부끄러움에서 엄호해 주고, 추위나 더위 등 악천후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 1601년, 벨기에의 신부 장 드 글렌은 수 세기 동안 논쟁거리가 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옷이 먼저냐 아니면 수치심이 먼저냐는 문제다. 종교계의 모럴리스트들은 원죄를 저지른 후 아담이 느낀 수치감을 원용하면서 수치심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나체주의 지지자들은 의복이 수치 감정을 만들었다고 반박하며, 선교사들이 강요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들은 이전의 나체 상태에 대한 수치심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3. 의학적 수치심
"자연에 관한 일에 부끄러운 것은 없다." 수치심의 역사에서 의학적 수치심이라는 항목을 삭제하는 데에는 의학계의 오래된 이 격언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의사 앞에서 사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이런 원칙이 때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 수 있다.

4. 침대에서의 수치심
중세를 산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공간은 대개 한 칸으로 만들어진데다, 그나마 대형 공동침대가 그 절반을 차지했으므로 사생활이나 수치심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17세기에 수치심의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향했으니,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같은 계급의 사람끼리는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에서 방금 빠져 나온 듯 알몸의 아름다운 여인을 불시에 목격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라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런 상태로 남자가 목격되는 경우에는? 예상밖의 수줍음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면 친구들의 조롱을 받았다.

5. 알몸 행진
나체는 그것이 우연히 보였는지, 의도적으로 보였는지, 얼핏 보였는지, 전시되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자들 앞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당당하게 몸을 노출했던 17세기의 남자들이 속옷차림으로 태형을 당할 때 그들의 얼굴을 붉히게 했던 그 이상한 수치심은 어떤 것이었을까? 의식되지 않을 경우 나체는 신화적 무구함 -황금시대, 에덴동산, 나체주의의 천국- 을 획득하며 그런 상태를‘수치심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경우, 나체는‘파렴치함’을 표현하며 그것은 민법, 도덕 그리고 종교당국의 제재를 받는다. 강제로 나체로 만드는 것은 최악의 능욕이었으며, 그것은 과거의 당국자들이 자주 사용한 불명예스러운 징계였다.

6. 변기 의자에서의 대화
변소에서의 수치심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은 16세기부터다. 그때부터 변소들이 점차 성채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겉모습과 치장에 현혹된 문명, 완벽한 건축적 공간 구성을 위해 육체의 생리적 욕구를 부정하는 문명에서 변소의 철폐는 증후적인 것이었다. 엄격한 대칭 원리 -질서정연한 문명 자체를 석조건물을 통해 상징화하는- 에 따라 설계된 저택 어느 곳에‘사실(私室)’을 둔다는 말인가? 그런 연유로 궁궐에서 연회가 열릴 때면 연회장의 벽난로, 문 뒤, 벽지, 발코니 등 아무데나 대소변을 내갈기곤 했으니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궁정의 포석 하나하나에, 계단 하나하나에 똥덩어리가 묻어 있는 셈이다.

7. 벌거숭이 임금님
수치심이 예법서에 등장하자 자기 행동을 뒤돌아보는 습관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졌다. 14세기에서 17세기의 예법서의 규정들이 상류계층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고위층들은 예절 규칙을 정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면제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왕에게 수치심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관습이 굳어지면 허용 범위에 있던 것들은 의무사항이 된다. 왕에게는 수치심이 금지된 것이다.

8. 조형예술과 수치심
17세기는‘수치심이 요구하는 가필’을 발명해낸 시대다. 다니엘라 다 볼테라가 수정했던 〈최후의 심판〉을 모범 삼아 은밀한 옷주름을 만들어내어 16세기 작품들에 덧칠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 오를리의 〈성 가족〉에 그려진 어린 예수의 성기는 푸르스름한 베일로 가려지고, 이렇게 덧칠한 부분은 1980년에 와서야 원상태로 복원된다. 조각 작품에서‘수정’은 단순히 거세 혹은 수집가와 미술관 관리자들을 괴롭히게 될 포도잎사귀 덧붙이기를 의미하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기저귀를 입힌’바오로 4세는 조각상에 석고나 청동을 덧붙이게 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반종교개혁의 취향이지만, 동시에 수치심과 고대 미술품을 동시에 보전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9. 연극과 영화 : 누드 전쟁
우리 할아버지 세대를 격분하게 만들었던 사건들을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어이없어 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12년 검열규제법이 화면에서의 키스 시간을 제한함에 따라 경찰관이 손에 스톱워치를 들고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는 광경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전후 미국 영화에서는 배꼽을 보이는 것이 가장 심한 외설이었기 때문에 여배우들은 배꼽은 보석으로 가리면서도 젖가슴은 거리낌없이 노출시켰다. 1965년까지 할리우드에서 통용되었던 헤이스 규정은 털과의 전쟁으로 시작했으며, 따라서 50년대의 플레이보이들은 셔츠를 벗기 위해서는 가슴팍의 털을 면도해야만 했다.

10. 말에 대한 두려움
모든 학교 도서관 한편에는 금서보관소가 있었는데, 특히 가톨릭당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이곳에 보관했다. 16세기에는 어느 나라나 금서로 정해진 책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금서목록은 교황청의 것으로, 1559년에 작성이 시작되어 1571년에 완성되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가장 외설적인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라퐁텐의 《우화집》이나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나란히 몽테뉴의 《수상록》, 발자크, 뒤마, 플로베르, 상드의 작품들이 있었고, 심지어 위고와 라마르틴의 몇몇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순의 절정은 1745년 3월 22일 바티칸당국이 금서목록에 바로 성경을 포함시킨 일이다.

11. 벌거벗은 신(神)
벗은 그리스도는 복잡한 체계에 속하는데,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벗은 아담/벗은 몸을 가리는 아담은 세례/십자가 처형에 상응한다.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리스도는 원죄 이전의 아담과 같다.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아담을 묘사한 그림에서처럼 성기에 대한 암시는 원초적인 순결을 암시한다. 신의 어린 양이 스스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는 나신의 순결함을 상실한다. 무화과 잎사귀를 따서 자신의 성기를 가리는 아담처럼 구세주는 옷을 몸에 두른다. 그것은 중세적 사고에 의하면 치욕스러운 나신의 의식을 조금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십자가형은 이중적 대립에 포함된다. 즉, 한쪽에는 아담/구세주, 다른 한쪽에는 세례의 순결/죄의 수용이 있다.

12. 광고에서의 수치심
지나치게 대담하다고 생각되는 광고 포스터에 대한 반응을 통해 대중의 수치심이 확인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역의 통로는 호사가에게 끊임없이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과장된 누드가 가차없이 제재를 받는 곳도, 또 광고의 효과를 가장 잘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장소도 그곳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수치심연합은 젖꼭지와 하얀 반바지에 나비를 붙이며, 때로 광고는 찢겨나가거나 냉소적인 혹은 지극히 공격적인 낙서 세례를 받는다.


이 책에는 모르는 인물들이 넘쳐나고, 모르는 사건들이 흥미롭게 읽혀지기도 하지만 두껍고 정리되지 않는 산만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카마르고라는 1710년생 여자 무용수가 팬티도 입지 않고 하체를 들어 올려 스캔들을 우리가 어디서 들을 것인가?
13세기 프랑스 궁정풍 연애 우의시(愚意詩)인 '장미이야기'에 남발한 '불알'의 시적인 시도를 이 책이 아니면 어디서 경험하랴?
플로베르가 1857년, 보바리 부인을 통해 간통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종교 모독과 미풍양속을 훼손시켰다는 죄목으로 소송을 겪은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지만 당연히 이 책에 수록되어 다른 난잡한 역사들과 함께 맥을 이어주는 소재가 되고,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수치심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좋은 징검다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쯤 동참하고 싶었던 유럽의 누드비치도 이제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을 벗어난 듯 하다. 그들의 역사가 조금은 이해되게 한 책이다. 다만 이 책이 '수치심의 역사'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기에는 제한적인 공간 배경을 가졌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고, 예시된 사례와 용어, 인명이나 지명 등이 우리 문화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라 어렵게 읽혀진다는 것이 취약점인데, 그것이 결코 우리의 짧은 지식에 문제가 있는 것만은 아니라 저자의 주관이 깊이 개입된 까닭일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역사적인 관점 보다는 흥미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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