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손자병법 - 전4권 세트
정비석 지음 / 은행나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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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의 소설로 만난 손자병법은 참 편안하고 이해하기 쉬운 책이었다. 딱딱할 수 밖에 없는 소재에 이렇게 스토리를 불어 넣은 것은 참으로 좋은 재주인 것 같고 그 재주를 올바로 쓰신 고 정비석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 형식으로 대륙을 지배했던 요순-하-은-주-동주의 이야기로 흥망의 기본을 풀이하고 시작된다.

기원전 2390년 요(堯) 임금이 제위에 오른 후 동양의 이상적인 태평성대가 시작된다.
요순시대로 불리는 그 시기의 요임금과 순임금은 제위에 연연하지 않고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직계 후손에게 자리를 물려 주지 않는 등 위대한 성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왕위세습은 천하가 한 사람의 차지가 된다는 폐단적 선례를 남길 수 있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슬기로운 방책이었다.

우 임금은 순 임금 시대에 치수공사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요·순 두 성군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뒤 국호를 하(夏)로 정한다. 성군 우 임금은 말년에 '백익'이라는 현자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긴다. 하지만 백익은 어떤 부담을 느꼈는지 그 유언을 따르지 않고 우왕의 맏아들 '계'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것이 세습왕위의 효시가 된 사건이다.
물론 우 임금의 맏아들인 계 임금도 성군이었으나 자신의 아들 '태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세습은 관례화 되었고 태평성대에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 우 임금의 족보로 채워진 하왕조는 왕들의 방탕한 생활이 찌들대로 찌들다가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450년 역사를 마감한다.

멸망한 하왕조의 뒤를 이어 탕왕을 시조로 한 은왕조가 출범한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일이다. 하지만 은왕조도 27대 600년을 계승해 오다가 28대 주왕에 이르러 '달기'라는 미녀에 빠져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고 만다. 달기를 기쁘게 해주려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한 은왕조의 주 왕은 당연히 멸망의 수순을 밟고 만다.

서백 희창에게는 물고기 대신 세월을 낚던 '강태공'이라는 건국 도우미(?)가 있어 은왕조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나라 '주'를 세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지만 서백은 안타깝게도 주나라를 창건하기 직전에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발'이 초대 임금이 되니 그가 바로 주의 무왕이다. 무왕은 전국을 71개 권역으로 세분화 시켜서 탄탄한 제후국으로 만들어 300년의 태평성세의 기틀을 마련했다. 잘 나가던 주나라도 13대 유왕에 이르러 '포사'라는 미녀의 치마폭에 허우적 거리며 국사를 개판치게 되는데, 결국 제후의 한 사람인 신후의 손에 유왕이 죽는다. 제후국으로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주나라는 멀리 낙양으로 도읍을 옮겨 동주라 불리게 된다.

그때부터 살아남은 제후국들은 구심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합종연횡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 혼전을 거듭하는 시대가 500년이나 지속되는데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춘추전국시대의 영웅호걸의 병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손무(孫武)를 주인공으로 그의 병법이 만들어진 시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제(齊)나라 출신의 젊은이 손무(孫武)는 표랑객을 자처하며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역사에 남은 전쟁터를 찾아 다닌다. 이 시기에 초(楚)나라의 오자서(伍子胥)와 의기투합 하는 등 많은 경험을 쌓고, 전쟁의 역사가 남긴 교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세월이 흘러 간신 비무기에 의해 초나라의 평왕으로 부터 역적의 누명을 쓰고 쫓기는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입성하여 왕가의 종손이나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희광 공자를 찾아간다. 오나라의 23대 요왕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희광공자는 결국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요왕을 제거하고 오나라의 24대 임금이 된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합려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고, 오자서의 조언에 따라 병법 전문가 손무를 군사로 모셔온다. 탄탄하게 다라의 힘을 다진 오왕 협려는 초나라를 침공하여 오자서의 원수도 갚고, 손무의 병법이론도 실전에 적용해 본다.

초나라와의 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가는 길에 손무는 지금까지 병법 연구에만 몰두했던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된다.

'세상이란 오로지 무력만으로 운영되어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었구나.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모여 하나의 숲을 이루고, 수많은 동물들이 강약을 다투며 피차간에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듯 국가와 국가도 끊임없는 각축을 반복하지만 어느 한 나라의 존립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신의 섭리인가 보구나!' (2권25쪽)

초국도 전후 1년만에 오패국의 하나로서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보면서 마치 새끼를 꼬는 것과 같이 항상 엇갈려 돌아가는 흥망성쇠의 철리(哲理)를 발견한 것이다.
이때, 20년전 원수를 갚으려고 정나라를 치고자했던 오자서는 뱃사공인 여구양, 여구성 부자의 사연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철군하게 된다. 전쟁무상의 깨우침... 모두가 전쟁에 미쳐있던 춘추전국시대에 일찍부터 전쟁의 모순에 착안하여 전쟁 반대론을 주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노나라의 공자(孔子)였다. 공자는 처음에 병법연구가인 손자를 비판하지만 후에 '손자병법'을 읽고 크게 감복하였다고 한다. 소설은 오나라로 손무를 찾아 나서려던 공자가 계속되는 사건들로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병석에 드러 눕는 아쉬움을 담아내고 있다. 칠순을 넘긴 공자와 지천명의 손자가 만나 의기 투합하였다면 칼부림의 시대이던 춘추전국시대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상상력과 함께...


10년 전 공자의 평화론을 늙은이의 잠꼬대로만 생각하고 비웃었던 손무는 자신의 모국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했다가 공자의 정신력에 굴복한 사건을 전해듣고 크게 깨닫는다.

오만에 빠진 오왕 합려는 제나라 공주를 협박하다 시피 끌고와 태자비로 삼고, 주색에 빠져 궁궐을 새로짓는 토목공사에 빠진다. 하나라의 걸왕이나 은나라의 주왕이 걸었던 망국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무는 22년 동안 충성을 다해 섬기던 오나라를 떠나 이제 고국으로 떠나지만 오만에 빠진 오왕 합려는 그의 떠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모든 영예를 버리고 떠나는 손무는 다음과 같은 옛 시를 생각하며 백해무익일 뿐인 전쟁에 젊음을 바친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

澤國江山入戰圖 기름진 강산에 싸움이 시작되어
生民何計樂樵蘇 백성들은 무엇으로 살림을 꾸려가랴.
憑君莫話封侯事 천자와 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一將功成萬骨枯 장수 하나 공을 세우는 데 만 명이 죽어간다. (3권32쪽)

손무가 떠난 뒤 오왕은 무리하게 월나라를 쳐들어 가고, 전장에서 태자를 잃고 대패하여 숨을 거둔다. 오왕 협려의 차남인 부차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언제나 장작더비에서 잠을 자고(臥薪와신), 전쟁에서 승리했던 월왕 구천은 3년 뒤 이러한 부차를 급습했다가 오자서 장군에게 대패한 뒤 회계산으로 달아났다가 거듭된 투항의사를 비춤에도 불구하고 목숨 부지가 어려워진다. 결국 백비에 뇌물을 바쳐 투항하게 되지만 그 또한 거짓 투항이고 구천은 십여년을 매일같이 쓸개를 씹으며 복수를 다짐한다.(嘗膽상담)

오자서는 월왕 구천의 치밀한 음모에 따라 여색에 빠진 오왕 부차가 명검 촉루를 보내 자결을 종용하자 아들 오명에게 두 가지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내가 죽거든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도록 두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 두고,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楸木;추자)를 심어 부차가 월병의 손에 죽은 뒤 관을 짜서 쓰도록 하라." (3권 175쪽 요약)


한편 손무는 고향 제나라에 돌아와 병법과 병서에서 손을 떼고 공자에 빠져 세월을 보낸다. 하지만 손자 손빈이 대를 이어 병법 연구에 몰두하고 할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한다. 특히 간첩에 대해 내용이 빈약했던 용간편(用間篇) 등은 손빈이 채워 넣는다. 손무는 손자 손빈을 바라보며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을 생각한다.

오왕 부차가 자신의 나라를 비우고 제나라로 쳐들어가 휩쓸먀 천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는 동안, 17년간 쓸개로 입맛을 다시며 철저히 준비한 월왕 구천은 드디어 오나라를 쳐들어 온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인데 17년 와신상담의 세월은 완벽한 준비의 기간이었다. 제나라 전투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오강을 건너오지만, 월장 범려가 '손자병법'의 가르침대로 이미 이겨놓은 승리를 확인하려고 하는 전투에 오군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수장되어 패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오왕 부차는 소주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고 모든 걸 포기하고 향락의 세월을 보낸다. 굳게 잠긴 소주성 아래서 복수에 눈이 먼 월왕 구천은 화공법으로 무고한 백성들까지 잔인하게 태워버리며 전쟁을 승리로 끝낸다. 그것이 오나라의 마지막이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이 전쟁에 승리한 월왕 구천이 오나라로 자신이 파견했던 경국지색의 일급스파이 '서시'를 못찾아 안달이 나는데 있다. 17년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사람이 단 사흘만에 여색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충신 범려는 왕명에 따라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서시를 찾아 나섰으나 서시는 오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서시에 목말라 있는 왕명을 완수하지 못한 범려는 평생지기 문종에게 자신은 돌아갈 수 없음을 알리고 문종 또한 임무를 다했으니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편지를 보낸다. 문종은 오랜 벗의 권유에 따라 사의를 표하지만 간신 고여에 의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다. 월왕 구천이 뒤늦게 진실을 깨닫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은 일...

전승국 월나라가 내부 단속을 못하는 동안 오나라는 무주공산 무정부 상태로 7~8년을 보내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손무는 오나라를 찾아와 이런 시를 읊조린다.

國破山河存 城春草木深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소설 손자병법의 이야기 뼈대는 이렇게 손무가 옛일을 회고로 마무리 되지만, 에필로그 형식으로 손빈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손빈은 어린시절의 친구에서 숙적이 된 방연에게 배신을 당해 앉은뱅이가 되지만 와신상담하여 훗날 방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기가 막힌 전술을 구사하여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사기에 따르면 손무와 손빈이 각각 활동한 시기에는 150년이라는 세월 차이가 있다. 하므로 손빈이 손무의 후예일 수는 있으나 소설과 같이 같은 시대를 살다간 친할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엄염한 허구이다. 손무가 춘추시대에 틀을 잡아놓은 손자병법이 있고. 전국시대의 새로운 연구를 첨가하여 보다 업그레이드 된 손자병법을 세상에 남긴 이가 손빈인 것이다.

이 작품은 딱딱하기만 한 손자병법을 적당한 픽션과 결합시켜 흥미롭게 서술한 걸작이다.
소설로서의 이 책은 세 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성 싶다. 제4권에 '병법해설'을 붙여 4권을 시리즈로 출시했는데 구성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지만 소설로서의 '손자병법'은 1~3권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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