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매혹시킨 화가들 - 14인의 화가들과 만나는 그림여행 에세이 매혹의 예술여행 1
박서림 지음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어린 날, 분홍색을 좋아하던 나는 표현력의 한계로 그 색이 보라색이라 믿었었다.
흙탕물에 뒹굴며 뛰어 놀던 나에게 누나가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며 물었고, 마음은 분홍인데 보라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색으로 보는 성격인가 뭔가하는 글을 읽던 누나는 '보라는 예술가의 색이다.'라고 알려 주었었다.
해몽(?)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나는 예술가가 되겠노라는 신념으로 살았다.
의무적으로 그림을 가까이했으며 학교에서 주최하는 각종 미술대회에 도전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겼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못 전달된 성격 파악인데다 옳은 파악이었을지라도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늘 예술의 언저리에서 두리번 거리며 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예술의 꿈은 접었지만, 그래도 난 보라색만 보면 예술의 세계가 내 눈 앞에 펼쳐졌음을 믿는다.

보라색 바탕에 '겨울 버찌와 자화상'이라는 에곤 쉴레의 그림만으로 나는 이 책의 예술성을 믿었다.
화가인 저자가 14명의 유명 화가가 활동했던 16곳을 찾아 떠난 수년간의 여행으로 만들어진 기행문같은 책이라 당연히 예술을 느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파블로 피카소와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서는 두 곳씩 여행을 하였으니 책의 목차를 접하고서는 유명세에 입각한 교과서적인 계획이었거나 작가의 취향 혹은 어떤 지역을 이동하는 중에 들르기 쉬웠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봤다.

박서림은 한지에 수묵 담채나 한지에 펜을 잘 응용한 그림에 능한 작가이다.
그녀는 각 여행지의 사진과 그 곳에서 활동했던 화가의 작품들을 수록함과 동시에 그녀 스스로가 느낀 그곳의 풍치를 그녀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신혼여행 때에도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을 돌아 다녔을 정도로 미술관 탐방에 흥미가 많은 것 같지만 이 글에 수록된 그녀의 내공은 필력의 한계인지 누구나 여행하면서 메모할만한 수준을 뛰어 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림을 보는 수준이 일반인보다 높을지는 몰라도 일반 교양은 매우 얕다는 것을 책을 통해 스스로 까발려 주고 있었다.
모네의 정원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쓰면 멋있는 글발이 나올거라고 착각하는 건 차라리 순진해 보였다.
내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알게 된 에곤 쉴레의 세계를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녀의 설명은 친절하지 못하다. 비전문가가 인터넷 블로그에 가볍게 올린 글인 것처럼 그림이나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 다수의 본문들을 읽으면서 그녀가 선천적으로 깊은 철학적인 사고능력이 결여된 것이거나 후천적으로 성의 없는 성격이거나 둘 중에 하나는 확실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으니 인제대 겸임교수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학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이 책을 만들었고, 강의 전에 학생들이 모든 내용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없는 일반 독자로서는 보다 친절한 설명이 아쉽다. 글과 맞지 않는 그림, 혹은 본문과 도저히 일치되지 않는 그림의 배치는 편집자의 잘못일 수도 있으나 어차피 작가 자신이 감수했을 터 함량이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의혹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교수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에 대한 괜한 걱정도 들었다.

그녀가 혹여 글로 설명을 못했을지라도 그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가정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쉬움은 남는다. 그녀의 전문지식은 인정하고 넘어가더라도 일반 교양은 더 쌓아야 할 것이다. 요목조목 반박하기에는 이미 책을 다 읽었고, 다시 확인하고 싶은 열정은 생기지 않는다. 내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녀 스스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독자들을 만만하게 생각했는지 말이다. 생가(生家)의 의미도 모르면서 '생가'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했던 것이나 머릿말에서 나름대로 멋있다고 응용한 움베르토 에코의 언어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제대로 이해는 하면서 인용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다시 읽으며 조목조목 정리해 줄만큼 한가하지 않기에 기억나는 이 정도만 지적한다.

누구나 결행할 수 없는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선택받은 저자가 아무나 다가갈 수 없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허술한 책으로 남긴다는 것은 죄악이 아닐까 싶다. 개정판에서는 좀더 꼼꼼한 내용 수정과 질서있는 편집으로 판매되기를 원한다. 그 노력이 아깝다면 책값을 조금 더 받더라도 용서해 줄 것이다.

서울대학교 졸업했다고 아무나 책 쓰게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출판사가 나서서 글맵시를 살려 줬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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