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과 사귀다 랜덤 시선 25
이영광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신선한 시작에서 무료한 중간, 파격적인 마무리가 멋스러운 매력적인 詩, '동쪽 바다' 때문에 이영광에 사로 잡혔다.
이영광은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그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를 주문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차례로 잃어버린 아픔을 노래한 시인이다.
이 시집 전반에 그 아픔과 아픔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멋을 보여준다.
내가 처음 접한 그의 멋진 시 '동쪽 바다'를 음미해 보자. 이 시집 120쪽부터 123쪽까지 펼쳐지는 시이다.



1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 해변이 있다
왕숙천변 수양버드나무 긴 푸른 생머리를 휘감는
태풍의 예감
유리잔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모든 길이 기로여서,
헤매다 들어온 찻집에서 보면
십 분 전의 갤로퍼가 아직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이 지구는 영원히 공사 중이야


2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저 담벼락에 페인트칠된 고구려 여인들,
치마가 무슨 판때기 같아요
사슴과 범을 쫓는 사팔뜨기 사내들은
총 맞은 듯 말이 없군요
벽은 간판이고 간판은 벽이며,
요컨대 인간은 전쟁중이죠
그날, 당신은 눈물이 날 만큼 선정적이었어요
내가 갑자기 돌아버리지 않은 이상
언젠가 고분이 된 이 찻집에 총성과 난동은 없을 것이며
너무 희귀해서 모두를 놀랠 공포가 벽 속에서
비참하게 발굴되겠지요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


3
휴식은 어지럽고 갤로퍼는 사라졌는데,
돈 내고 받아 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 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만나고 터덜터널 걸어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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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2011-07-2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잘못 살았어요.... (잘못)살았으니까 살아있지만... 이라는 싯귀절이 가슴에 와닿네요... 살려고만 하는게 사는게 아닌데... 너무 눈치만 보고, 비위만 맞추는 겁쟁이로 살지는 않았는지... 이제 50대는 내 목소리를 내야할 것 같습니다. 아들들에게 당당한 아버지로 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