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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김승옥이라는 국내 작가의 단편집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당당히 이름을 내 걸었을 때, 무수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누굴까? 내가 70년대생이라서 잘 몰랐던 걸까? 한참 글을 쓰던 1967년에는 무진기행이 '안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고, 김승옥 스스로도 김동인의 감자를 각색, 감독하여 스위스 르카르노 영화제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고 하니 그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것이고,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은 과연 김승옥에 열광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작가 프로파일을 보니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먼지의 방' 일부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검열로 삭제된 것을 계기로 그는 절필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문학은 단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몰랐던 것이라고 자위 하기로 했다.
이 책은 열 가지 무게 있는 단편 소설의 모음으로 내가 김승옥에 빠져들게 한 멋진 책이다. 그 멋진 단편들을 단지 내 망각을 극복하기 위하여 메모한다.
1. 무진기행 이를 원작으로 안개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곳, 안개 외에는 별다른 특징도 없는 무진읍을 향해 시골버스가 달려가고 있다. 그 버스 안에 번잡한 서울을 떠나 일주일간의 휴가를 온 제약회사의 중역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고향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후배 박군, 동창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무진의 세무서장을 하고 있는 조, 그리고 친구 조의 집에서 알게된 박군이 짝사랑하는 음악선생 인숙. 지루한 시골의 생활 속에 나름대로의 권태와 속물 근성이 개개인에게 물들어 있다. 조의 집을 나와 귀가 길에 동행해주고 금세 친해지는 두 사람은 다음날 오후에 함께 바닷가에 가기로 약속한다. 이튿날 어머니 산소를 다녀오는 길에 방죽에서 만난 자살한 창부의 모습, 오래 전 바닷가 하숙집에 동행한 인숙과의 섹스, 감정에 혼돈을 느끼고 또한 서울로 데려다 달라는 인숙에게 함께 가자는 약속을 해 둔 상태에서 급히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 약간의 갈등 후 결국 예정된 일주일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버스를 탄 주인공. 길가의 팻말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인숙과의 약속을 외면하고, 아내의 요청에 따라 상경함으로써 자기 찾기를 포기하고 세속적인 현실에 적응하게되는 나약한 주인공 윤희중의 이야기는 40여년이 흐른 지금에 읽어도 실감이 나는 듯 하다.
2. 서울 1964년 겨울 방황하는 스물 다섯의 청년이 술집에서 만난 동갑내기 대학원생 안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소재로한 대화가 지리하지만 매력적이다. 자기만의 이야기... 그러는 동안 정체 모를 30대 중후반의 허름한 사나이가 동석하고 돈을 쓰겠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가난해 보이는 그 사나이가 돈을 대며 함께 하자고 한다. 낮에 급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뜬 아내의 시체를 세브란스 병원에 팔고 그 돈을 오늘 써버려야 되지 않겠느냐며 우울해하던 그 사나이, 다음날 아침 결국 아내를 따라가고 말았다.
3. 생명연습 주인공이 한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우울했던 여수에서의 추억을 생각한다. 스스로 성기를 절단했다는 전도사의 대부흥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0년이 흘러 집에 다양한 남자들 들이기 시작한 어머니, 그 어머니를 향한 병약한 형의 적개심과 폭력, 다정했던 누나와의 추억, 형의 죽음 등을 회상한다. 말 수 없는 한 교수도 자신의 옛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결코 멀지 않은 곳에서 남으로 살았던 30년간의 그녀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4. 건(乾) 빨치산 공비들의 도시습격이 있던 다음날, 늘 내게 잘해주던 윤희 누나로부터 빨갱이의 죽음을 전해 듣는 국민학교 6학년인 나. 무전여행을 떠나려다 빨치산 사건으로 계획을 망친 형과 친구들, 죽은 빨갱이를 묻던 아버지를 따라가는 형의 친구들과 형제, 형과 친구들의 윤희누나 겁탈 계획, 형의 편지 심부름을 받고 그들의 겁탈 계획을 조롱하는 나의 계획...
5. 역사(力士) 공원 벤치에서 어느 하숙생에게 들은 이야기. 남루했지만 인간적이었던 창신동 산동네에서의 하숙생활과 풍요롭지만 권태롭기만한 양옥집에서의 생활 비교. 특히 창신동 하숙집의 창녀 영자와 중국계 아버지를 둔 기운센 노가다꾼 서씨에의 추억... 매일밤, 동대문 추춧돌을 빼서 엇갈리게 바꾸는 재미를 보여주던 역사의 추억. 권태로운 양옥집 생활을 벗어나고자 흥분제를 주전자에 타서 온가족에게 마시게 한 사건 등 다소 황당한 그 하숙생의 이야기 기록...
6. 차나 한 잔 주인공의 설사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아마도 현대의학에서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분류되는 증상인 것 같다. 신문사에 만화를 연재하는 주인공이 짤릴 위기에서 앞날을 걱정하다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다. 불안불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준비 못해 찾아가자. 신문사 문화부장은 "차나 한 잔 합시다."라며 인근 다방으로 주인공을 데려가 해고 통보를 한다. 새로운 직업을 찾아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신문사를 찾아간 주인공이 그곳 문화부장에게 조용히 말한다. "차나 한 잔 하시죠." 사랑스런 아내를 품에 안고 앞날을 고민하는 주인공을 보면 과연 이 나라에 경기불황이 없던 시절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7. 다산성 이 소설은 네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돼지는 뛴다'로 행주산성으로 야유회를 떠나는 친구들간의 이야기 중 통째로 요리해 먹으려던 돼지가 도망가는 소재이다. 두번째는 '토끼도 뛴다'로 취재차 만난 연극 연출자가 '토끼의 생명력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다'는 주제의 황당한 연극을 이야기 한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노인은 없다'로 주인공이 부업으로 흥신소 일을 하면서 사라져 버린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이야기는 주인공과 하숙집 딸 숙이의 연애담이 네번째 에피소드다. 순진했던 숙이가 점점 세속적인 현실에 눈을 뜬다. 풍요로운 생산(多産)의 의미를 담은 제목은 단지 이상일 뿐 역설적으로 헛된 욕망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소설이다.
8.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반복적인 문장으로 운율이 느껴지는 이 소설은 12살 소년이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함께 생활하는 우울한 풍경을 애틋하게 그려낸다. 죽어서도 정력식단으로 힘이 셈을 과시하는 염소와 버스 회사에 취직하는 것으로 강간 당하는 것마저 참고 견디는 누나와 그런 누나의 취직을 사연을 알든 모르든 기뻐하는 가족들의 이야기~
9. 야행 지난 해 8월,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가 강간을 당한 이 여인... 이제 그 시절을 그리워 하고 있다. 거급된 야행에 매너있는 남자를 만나면서도 뿌리치는 그녀는 8월의 그 남자가 여관 안에 들어갈 때까지 한 번도 자기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속임수로부터의 해방~
10. 서울의 달빛 0장
잘 나가는 집 둘째 아들이자 대학 강사인 주인공이 유명 탤렌트와 짧은 결혼 생활을 정리한다. 순진하게 그녀의 처녀성을 원했던 그가 그녀의 난잡한 남자 관계를 혐오하기에 이혼한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한참 과거(1977)인 만큼 그들이 이혼도 파격적이며 그는 살던 아파트를 팔아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또한 파격적이다. 자동차를 사고 남은 현금을 그녀에게 위자료로 주지만 그녀는 그 돈을 찢어 버린다. 누가 더 멋질까?

이후에도 김승옥은 '내가 만난 하느님'이란 종교적인 산문집으로 대중에 나타났고, 월간 샘터 편집위원(1988),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위원(1991), 세종대 국문과 교수(1999) 등으로 활동하였고, 성결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일본에서 나고, 순천에서 성장한 그를 기리기 위해 올해 순천 대대포구 '무진기행 문학관'이 준비중이라 하니 개관하는대로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