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빗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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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습관이 좋은 생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가 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고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아침 운동하기나 일기쓰기 혹은 일주일에 몇 권 이상 독서하기.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돛, 작더라도 의미 있는 결실을 남기는 자양분을 얻고 싶은 열망이 ‘습관 만들기’를 시도하도록 불을 지핀다.

 그런데 이 불에 되려 나 자신이 까맣게 타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분명 뭔가를 해보자고 시작할 때의 나는 ‘하면 된다!’는 기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아뿔싸 불이 너무 센건지 장작이 너무 약한건지, 이 불같은 기세는 며칠을 못 가 내 모든 노력을 탈탈 태우고는 사그라진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이걸 하고 있나’ 식의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오고 ‘이번 생은 망했다’는 자기 성찰이 뒤따르면 이미 나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살던 대로 살자 aka 되는대로 살자’라며 오래된 습관의 품에 다시금 나를 맡기고야 만다. 전남친에 비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오래된 나쁜 습관. 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이야? 이 정도로 내가 의지박약이란 말야? [해빗]의 저자는 우리의 이런 고민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지난 1세기에 걸쳐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시청하고 더 많이 소비하도록 설계된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가 세상에 등장했다.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서비스는 유저가 밤새도록 영화와 드라마를 시청하도록 유도하고, 수많으 온라인 쇼핑몰은 원클릭 결제 시스템과 결합해 소비자의 과다 지출을 촉진하고, 대형 마트의 계산대는 달콤하기만 하고 영양가는 없는 정크푸드를 구입하도록 유혹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자동으로 반복하도록 조작된 함정들이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개인의 의지력에만 의존해 저항하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다. 마치 압력밥솥처럼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 욕망과 충동을 억누르고 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8쪽 한국 독자들에게,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그동안 우리는 습관을 형성하지 못하는 건 노력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약해서라고 생각해왔다. 노력하기 싫어하고 심지가 연약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밤낮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금연도 실패하고, 아침 운동 가는 일에도 실패하게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혹은 타자를) 생각해왔다. 그러나 [해빗]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환경과 상황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걸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러니 이전과 다른 환경과 상황이 새로운 습관의 시작이다. 


 습관은 무의식에서 나오고 노력은 의식에서 나온다. 새로운 행동 양상이 몇 번 거듭되는 동안은 의식이 관장하지만, 이것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어느새 무의식이 이것을 수행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상태를 ‘습관’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행동 양상이 습관으로 자리잡기까지는 그 행동 양상을 지속해줄 든든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 책 [해빗]은 무엇을 어떻게 지원군으로 삼을지를 안내한다.

 

 [해빗]은 저자가 연구하고 관찰하고 취재한 여러 사례와 실험 기록들을 근거로 ‘습관이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분석 정리한 책이다. 책속에서도 운전을 예로 든 부분이 있는데, 내 운전 경험을 돌이켜 보면서 이 책을 읽으니 이해가 쉬웠다. 면허를 딴 후 처음으로 혼자 운전을 했을 때는 주행 중에 일체 다른 것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눈은 오직 전방에 고정되어서 사이드미러 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내게 운전이 얼마나 힘들었냐면, 쌩초보 딱지를 달고 인천을 다녀온 후 열흘 동안 몸살을 앓았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운전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아니, 아무런 힘이 들지 않는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운전을 해야만 하는 환경’과 ‘이 환경 후에 내가 얻게 되는 보상’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습관은 쉽고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습관은 무의식(이 책 [해빗]에서는 비의식이라고 썼다.)의 영역에서 나의 생활을 경영하는 일종의 운전대다. 만약 우리가 정말 하기 어려운 일들을 이 습관으로 삼아 쉽고 자연스럽게 수행하게 된다면 얼마나 편해질까? 힘을 덜 들이고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게 된다면!
 저자 역시 이런 ‘습관’의 힘으로 독자들의 인생이 힘은 덜 들이고 더 많은, 의미 있는 것들을 성취하게 되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해빗]을 썼다고 한다. 
 


 

 습관의 특징, 습관의 형성과 사람의 행동 원리, 충동과 의식 그리고 인생 안에서 수없이 마주하게 되는 혼란과 단절과 변수와 관계되는 습관의 변화에 대해 이 책이 설명해주지만, 이 책이 오늘부터 당장 내 습관을 대신하게 되는 건 아니다. 습관이 만능열쇠도 아닐뿐더러, 습관만 맹신하지 말라는 경고도 이 책에는 담겨 있다. 결국 자기에게 유익한 습관 설계와 운영 , 자신만의 시스템을 창조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구슬이 서말이 아니라 백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이 책에서 내가 좋은 습관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내 의지가 박약한 탓만은 아니라는 뜻밖의 격려와 ‘그래, 머리 굴리며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해’라는 새로운 불씨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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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 - 살기 싫어 몽테뉴를 읽었습니다
이승연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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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저 빛들에게는 ‘별’이라는 이름이 있다. 우리가 별이라고 부르는 빛은 실은 별 그 자체가 아니라 별의 흔적이다. 별은 수백 혹은 수십 광년쯤 멀리, 도저히 갈 수 없는 거리에 있고 그중에 어떤 것들은 이미 소멸된 지 오래다.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진 별이 보낸 자기 목소리는 지구의 밤하늘에 걸린다. 산봉우리 어딘가에서 시작된 ‘야호-!’라는 외침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닿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와 산맥 마디마디에 내려와 앉듯이, 별빛은 별이 사라진 시공간에 남아 우리들의 눈동자에 물들어 수많은 상상력과 영감과 위로 그리고 추억의 모티프가 된다.

 가까이는 백년, 어떤 책은 수백 년, 더 멀리는 수천 년. 별이 아스라이 멀 듯 고전의 저자들은 2020년의 내가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남긴 별빛은 여전히 생생하다. 과학자들이 별빛을 따라 저 멀리로, 우주로, 시공간의 기원으로 거슬러 가듯이 독자 역시 고전을 읽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따라 ‘정신의 기원’으로 거슬러 간다.

 

 

 몽테뉴의 <에세>는 철저한 자기 해체의 산물이다. 공직 생활에서 발견한 권력과 욕망의 위선, 잔혹한 종교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체험한 야만성은 몽테뉴로 하여금 끝없이 무엇이 인간인지, 자기 자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잃고 자기 자신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던 경험 역시 몽테뉴에게 사는 동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생각게 했다. 살아있다는 건, 언제나 바로 다음 순간에 죽음이 예고되어 있으므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충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몽테뉴가 <에세>를 기록한 20년 동안 한번도 느슨하지 않고 팽팽히 당겨진 ‘솔직함’은 5세기를 지난 현재도 여전히 하이텐션을 유지 중이다.

 

 이 하이텐션의 선율에 공명한 21세기의 독자는 한 둘이 아니나, 그 공명의 결실로 한 편의 오케스트라를 빚어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영화 비평을 주로 하던 이승연 저자는 반 년 동안 몽테뉴의 <에세>를 세 번 읽었다고 했다. 고통과 절망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붙잡았던 지푸라기인 몽테뉴의 <에세>는 그녀가 발견한 신대륙과 같았다. 신대륙의 이곳 저곳을 탐색한 이승연 저자는 신중하게 그 발견의 결과를 기록했다. 몽테뉴가 <에세>를 기록한 것과 같은 태도인 ‘솔직함’으로, 그녀는 몽테뉴와의 조우에서 얻은 생각들을 이 책<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로 썼다.

 

 

 저자는 스스로를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원시인’이라고 부른다. 페이스북이 나쁘진 않지만 매커니즘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못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여튼 SNS에는 취미가 없다. 천민 자본주의가 몸서리 쳐지게 싫지만 생계를 위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저당 잡힌 가장의 고단함에는 무감하지 않다. 공기처럼 팽배한 성차별을 개선해야 한다는 데에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속에서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아들들이 없도록 균형 잡힌 인식 형성이 필요함을 안다. 민주당 공보팀장 등의 일을 했으나 초심을 잃고 포퓰리즘과 프로파간다에 몰입중인 정치권(한 때 동료이자 선배였던 그들)을 향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직장맘으로서, 노동자로서, 여자로서 저자는 자기가 지닌 수많은 페르소나의 면면을 아주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몽테뉴가 <에세>를 썼던 자세 그대로 저자는 자신이 쓴 에세이가 받을 공격이나 불만을 예감하지만 용기를 낸다. 에세이가 자기 사유의 면면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용기에서 발원하는 글이라면 이승연 저자의 이 책<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는 순도 100% 에세이다.

 

 

 굳이 몽테뉴의 <에세>가 아니어도 좋다. 물론 <에세>이기 때문에, 5세기를 관통하여 만난 사람이 몽테뉴이기 때문에 생각의 물꼬는 더 풍성한 줄기가 되어 맑고 깊은 물길로 뻗어나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저자는 굳이 몽테뉴의 <에세> 읽기를 권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지는 않았다. 몽테뉴와의 인연이, 그로부터 시작된 숨길 수 없는 울림이 멀리 메아리를 그릴만큼 퍼졌기에 이 책을 쓸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거나, 밑도 끝도 없이 힘내라는 족보 없는 격려가 에세이로 둔갑한 요즘, 정말 에세이를 쓰고 싶다면 이 정도의 솔직함은 장착해야 하지 않을까.
 몽테뉴의 <에세>가 궁금하지만 아직 읽기에 도전하지 못한 사람,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좋을지를 매일 고민하는 사람, 뭐가 됐든 본질적인 삶의 의미와 이유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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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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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 나의 고독과 고립은 ‘종신형’이라는 생각에, 평생 나는 곁에 사람을 둘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온 몸을 치어 본 사람.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아닌 다른 데로 숨어본 사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얼굴의 멍자국 때문에 사람을 피해야 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 내 곁에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기 위하여 내 안의 어떤 것들을 버려본 사람.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카야에게 이토록 몰입되었을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는 내내 카야에게 빙의되어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엄마와 언니 오빠들 그리고 아빠까지, 카야만 두고 하나씩 늪지를 떠난 가족들의 빈 자리 속에 느꼈던 사무치는 외로움과 학교와 또래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느낀 수치심, 테이트와 체이스를 거치며 베인 살에 소금을 맞듯 경련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까지, 카야의 감정들이 내 것 인양 선명했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7살 카야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과 함께 습지 판잣집에 산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가고 차례로 언니와 오빠들도 집을 나간다. 몇 년을 함께 살던 아버지마저 카야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자신이 늪지 쓰레기라고 불리며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아는 카야는 학교를 가자거나 위탁가정에 가자고 찾아오는 사회복지사도 따돌리고 홀로 습지 생활을 이어간다. 흑인 아저씨 점핑에게 홍합을 팔고, 그들로부터 가끔 구호품을 얻으면서 카야는 내내 엄마와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도, 말할 사람도 없는 습지 판잣집에서 카야는 새 깃털과 조개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걸로 외로움을 달랜다.
 혼자 사는 카야가 걱정이 된 테이트는 가끔 찾아와 글을 가르쳐주었고, 카야는 테이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대학 진학 때문에 테이트와 카야는 헤어지고, 크게 상처받은 카야는 가족을 이룰 대상을 찾는다. 
 마을 유지의 아들로 오만방자한 체이스는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카야에게 접근한다. 카야는 처음에는 체이스를 경계하다가 곧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가족을 이룰 수 있을거란 소망을 품는다. 그러나 체이스는 카야가 몸을 허락한 이후,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이를 알게 된 카야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혼자 살리라고 다짐한다.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온 테이트는 카야와 체이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카야가 걱정되어 내내 카야 옆을 맴돈다. 카야의 수집품이 가히 박물관 수준임을 알게 된 테이트는 카야의 수집품과 그녀의 스케치를 투고하게 되고 카야는 바닷가 연안의 새와 조개에 대한 책을 쓴 작가가 된다. 이걸 계기로 카야는 다시 테이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결혼한 체이스는 여전히 카야가 자신의 소유라는 걸 과시하려 그녀를 찾아와 강간하려 하지만, 카야는 그로부터 도망친다. 며칠 후 체이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카야는 체이스 살인용의자로 기소되어 긴 법정 싸움에 휘말린다. 유능한 변호사 톰의 호소와 그녀를 아끼는 소수의 지원 덕분으로 무죄를 받고 풀려난 카야는 남은 여생을 테이트와 함께 습지 판잣집에서 행복하게 보낸다. 66살의 나이로 카야가 숨을 거둔 후, 테이트는 우연히 카야가 집 바닥에 숨겨둔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 체이스 살해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 테이트는 아무도 모르게 해변에 그것을 흘려보낸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는 세 개의 존재로 읽힌다.

야생, 사람, 여성. 


 

 *

야생

 

 카야는 습지에서 태어나 생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낸 인물이다. 카야의 부모님과 다른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습지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습지를 떠날 수 있었지만 카야는 아니었다. 클라크 가(家) 사람 중 유일하게 습지에서 태어난 카야에게 그곳은 세계였고, 안식처였고 가정이었다. 인간이지만 카야의 유대와 정서는 학교와 마을이 아닌 습지의 생태계와 긴밀하게 맺어져 있다. 


 습지는 육지와 바다(혹은 강)의 중간에서 둘을 연결하는 요지이다. 해양 생물의 약 60%가 습지에서 번식하는데, 수산 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오염을 정화하는 역할도 한다.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흙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호흡을 이어가는 미생물과 사시사철 번식을 위하여 노래하고 날개짓 하는 곤충과 새, 물고기들이 생명의 거대한 순환을 계승한다. 짝짓기를 하러 온 수컷을 잡아먹고 교미 중에 상대의 머리를 뜯어먹는 야생의 번식은 엽기적이고, 힘이 약한 동물이 천적에게 잡아 먹히거나 무리에서 버려지는 생존 방식은 무자비해 보인다. 그러나 생명의 순환을 잇기 위한 야생의 번식과 생태에는 교미의 즐거움이나 실연의 상처, 인간적인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미세한 부품들이 조밀하게 호흡을 맞춰 빈틈없는 시간의 궤도를 그리듯이, 작은 반딧불이의 번식과 생존은 그들 뿐 아니라 지구라는 별 전체의 균형과 존속을 이루는 섬세한 부속이다. 이 커다란 흐름 속 하나의 톱니바퀴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생명체들은 치열하다. 카야는 이 치열한 생명력을 배워 인간이 모두 떠난 습지에서 살아남았다. 노동은 해가 뜨는 시간과 달이 뜨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의 고됨은 카야의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살아남는 일의 핍절함, 핍절한만큼 엄정함을 자연은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지킨 생명이기에 거룩하고 아름답다. 카야는 자연으로부터 생태계의 한 부분인 자기의 존재를 깨닫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야생으로부터 생명을 존속하는 방법과 가치를 배웠다.


 그러나 인간은 습지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가치도 알아보지 못한다. 습지와 그 야생을 두려워하거나 멸시한다. 습지를 쓰레기들이 모이는 천박한 공간으로 취급하고 야생을 거칠고 미개한 것으로 취급하는 인간의 행태는 생태계의 습성에 반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습성과 야생이 접점을 찾아간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계몽적인 메시지에 페이지를 소비하는 대신 테이트에게서 체이스, 다시 테이트에게로 이어지는 카야의 서사를 통하여 서로에게 반反하는 두 세계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은유한다. 


 난생 처음 습지를 떠나 애슈빌로 가는 길에서 카야는 인간의 알량하고 조악한 행위를 본다. 나무를 베고 숲을 파괴하고 건물을 올리고 도로를 낸고 그 인공(人工)을 자랑하는 인간들. 체이스는 카야에게 광대한 벌판과 산에 지은 집과 도로들을 보라며 뿌듯해했지만 카야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체이스 역시 카야의 세계 즉 야생에 섞여들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정복하고 소유하는 인간인 체이스에게 습지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테이트는 카야와 인간 문명의 연결고리였다. 글을 가르쳐주고 책을 가져다주고 카야가 집대성한 결과를 책으로 내도록 이끈, 카야와 인간 세계와의 결정적인 교류에는 언제나 테이트가 다리였다. 그런 테이트가 카야와 여생을 함께 하는 카야의 판잣집은 그 자체로 습지가 된다. 이질적인 두 개의 환경을 연결하는 습지의 특성대로, 인간과 야생,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카야의 판잣집에서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

사람

 

 얼핏 카야가 습지에서 자라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 비춰보일 수 있지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사람인 카야를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습지에 고립된 채로 성장하고 살아가는 시간 동안 카야를 끈질기게 괴롭힌 건 외로움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떠난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왜 엄마 사슴은 돌아오는데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지’를 묻고, 아무도 없는 해안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자기와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는 일은 습지의 모든 야생과 카야를 구분 지어 사람인 카야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습지의 그 어떤 새도 외로움이 싫어서 반려를 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가족을 만드는 조개도 없다. 오직 사람만이 고립되지 않기 위하여,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친구를 만들고 연인을 구하고 가족을 이룬다. 일곱 살 아이였을 때부터 뼛속깊이 물든 외로움은 카야가 내리는 모든 선택에 동기로 작용한다. 외로워서 테이트와 체이스와 가까워졌고, 그들이 떠난 후에 느낀 더 큰 외로움과 절망은 카야가 다시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닫도록 만들었다. 카야는 외로울 때마다 엄마가 해주었던 이야기들, 여자들의 유대와 연대에 대하여 떠올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말해준 엄마조차 카야의 연대자가 되어주지 않은 건 물론 그런 연대와 유대를 어떻게 맺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참 기묘하다. 카야의 야생성에 대하여 시종일관 이야기하지만 그 야생성은 카야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 역시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야생의 카야를 만든 건 어린 날의 고립이었고 그 고립은 카야가 원한 것도 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카야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욱 미어지는 아픔으로 와 닿고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고 사람이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고독과 소외의 감정들이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자기 발로 나를 떠났고, 그 어떤 집단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냉혹한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다면, 언젠가 친구와 가족을 갖게 될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는 것이 고통일까 아니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켜켜이 쌓인 벽 뒤로 모습을 감추는 게 고통일까.

 

 

카야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사이에 함께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깊어지는 하늘 아래 소녀들의 즐거움이 오라처럼 눈에 보일 듯 환했다. 엄마는 여자들은 남자보다 서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정을 가꿀 수 있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카야는 숲속 더 깊이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들이 백사장을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멀어져 모래사장의 작은 얼룩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104쪽

 

 

 

 옮긴이의 글에는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단언했고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고 써 있다. 작가는 홀로 유기된 어린 소녀의 인생사를 통하여 사람은 외로움을 친구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갇힌 주인공이 바람 빠진 배구공으로 친구 왓슨을 만들었던 이유와 그 왓슨을 폭풍우 속에 잃고 통곡했던 그의 심정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랴. 생물들에게 고립은 생존의 위기이지만 사람에게 고립은 존재의 위기가 된다. 그래서 사람을 고립시키는 차별과 혐오, 외면과 무관심은 부당하고 불의하다. 이 부당함과 불의는 생태계의 약육강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약육강식은 종족의 존속을 위한 야생의 방식이나 차별과 혐오 나아가 (체이스가 카야에게 휘둘렀던) 폭력과 정복욕은 야만이다. 차별과 혐오는 생태적 차원에서 약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휘두르는 쪽이 야만적이므로 벌어지는 일이다. 카야를 ‘외로움’으로 학대하고 카야를 돕는 유일한 어른인 점핑 역시 흑인이라고 멸시하는 마을의 모습은 카야를 품어준 습지의 야생과 대비되어 더욱 수치스럽고 천박한 야만의 세계로 드러난다. 이 야만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기어코 카야를 체이스 살인 용의자로 몰아세워 재판정에 세움으로써 그 비열함의 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

여성

 

 이 ‘야만’의 표상으로 체이스를 대체할 인물은 없다. 체이스와 카야의 대립과 갈등은 카야를 여자의 얼굴로 읽게 한다.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외로움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동시에 외로움이 여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그린 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 여기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건 다름 아닌 여성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립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그 이름 자체로 혼자 서는 일. 카야는 나이 열 살에 일찌감치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립을 한 인물이다. 글을 가르쳐주러 온 테이트가 아동센터로부터 지원을 받으라고 권하자 카야는 단호하게 그를 거절한다. 습지의 판잣집은 카야에게 자기만의 공간이었고 카야는 홍합을 캐고 생선 훈제를 만들어 팔면서 혼자의 힘으로 그곳에서 연명할 수 있었다. 자립은 곧 진짜 성인이라는 증명이다. 체이스는 카야의 판잣집에 처음 온 날 그녀의 자립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립했으나 자기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형편을 꾸리는 것과 홀로 고독한 삶을 산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상기했듯이 사람은 외로움을 피해서 반려를 찾는다. 순수하게 번식을 위해서 짝을 찾는 다른 생물들에 비해, 그래서 사람의 반려자 선택은 실수와 사고가 빈번하다. 카야의 엄마는 실수를 저질렀고 카야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만약 테이트의 빈자리가 준, 더욱 견디기 힘든 외로움 때문에 카야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속이 뻔히 보이는 체이스의 접근에 속지 않았을지 모른다.
 첫사랑이자 여러 면에서 카야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테이트는 카야에게 사랑이고 삶이었다(책 182쪽). 나무 등걸이에 희귀한 새의 깃털을 주고 받는 걸로 시작된 소년과 소녀의 만남. 카야에게 그것은 야생이 아닌 사람과 맺은 최초의 깊은 정서적 교감이었다. 카야는 테이트를 통하여 책을 만나고 세상을 읽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건 아님을 알고 위로 받았다. 수없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카야는 테이트와 교감하고 싶었고 동시에 엄마가 자신을 버린 정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떤 동물은 새끼를 버린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엄마의 부재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망과 원망은 테이트가 대학 진학을 이유로 마을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진다. 엄마의 대한 카야의 깊은 트라우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체이스와의 교제를 계기로 해소된다.


 자신에게 청혼하고 그 대가로 섹스를 요구하는 체이스에게 카야는 잠자리를 함께한다. 이건 카야 나름의 타협이었다. 상대를 내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자기를 내주고 되돌려 받지 못할 거래였다. 테이트마저 자신을 떠났는데, 이대로 영영 아무도 자신의 곁에 없을 거라는 두려움은 카야로 하여금 발정 난 수사슴처럼 목에 힘이나 잔뜩 준 체이스를 가까이하게 만들었다. 체이스가 약속과는 다르게 마을의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는 기사를 읽은 후 카야는 비로소 거짓말로 엄마를 꼬드겨 늪지의 판잣집에 살게 만들었던 아버지처럼, 체이스 역시 그럴듯한 덫으로 자신을 꾀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동시에 카야에 대한 정복욕과 소유욕으로 그녀를 폭행하고 강간하려는 체이스에게 엄마를 죽을 만큼 때렸던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을 본다.

 

 얼굴은 이제 녹색과 보라색으로 시커멓게 변색되고 눈은 삶은 달걀처럼 부풀어올랐다. 목은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윗입술은 한쪽이 엽기적으로 뒤틀렸다. 엄마처럼, 괴물 같은 몰골이 되어 무서워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카야는 엄마가 왜 떠났는지 선명하고도 뚜렷한 깨달음을 얻었다. “엄마, 엄마.” 카야는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이제야 엄마가 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는지 알았어. 몰라서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카야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가 홱 고개를 젖혀 높이 치켜들었다. “난 그렇게는 살지 않을거야.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까 걱정하면서 사는 삶 따위 싫어.”
책 339쪽 [가재가 노래하는 곳] 

 

 누군가는 강간을 남자의 생식 본능이라고 이야기한다. 틀린 말이다. 강간은 생식하려는 본능이 아니라 정복하려는 야만에서 기인한다. 생식의 목적은 더 많은 자식을 생산해서 종족을 번성하게 하고 대를 이으려는 것이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것이 생식 본능이다. 이런 차원에서 섹스는 생식 본능이다. 그러나 결혼한 체이스가 카야를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고 강간하려 한 것은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순전히 카야가 여전히 자기 소유라는 걸 확인하려는 야만적인 정복욕이다. 체이스에게 얻어맞은 자기 얼굴에서 과거의 엄마를 발견한 카야는 엄마를 용서하면서 원망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드디어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걸 알고 그걸 얻어내는 온전한 여성으로 각성한다. 이전까지 카야는 체이스를 생식의 상대로 대했다. 그러나 이제 체이스가 먼저 야만을 발휘하여 힘의 논리로 카야를 대했다. 이제 체이스와 카야는 생식이 아니라 생존의 무대에 서서 겨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야는 야생의 암컷들로부터 수컷을 해치우는 법을 배운 여성이다.

 

 

 

 


 카야와 그녀의 엄마는 같은 실수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카야는 야생으로부터 생존의 엄정한 가치를 깨친 여성이고 카야의 엄마는 인간의 세계에서 사회화된 여성이다. 피멍으로 퉁퉁 부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카야는 이렇게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를, 카야의 엄마는 수치와 자기 혐오를 느꼈다. 물리적으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를 때릴 때에 보편적으로 사람이 느끼는 건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공포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이 공포는 가해자인 상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피해자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와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카야의 엄마가 집을 떠난 후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며 은둔하다 무기력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가 얻은 자기혐오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리라. 성폭력에 대한 카야의 대처는 단순한 권선징악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의미로까지 읽힌다. 

 

 이 작품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가졌던 여러 인식들을 새롭게 고쳤다. 야생과 야만, 자연과 인간, 동물과 사람, 설렘과 공포, 두려움과 그리움.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과 감정의 많은 부분이 카야의 이야기에 비추어 조금 더 정밀하고 견고한 형태로 조정되고 카야의 눈빛과 저자의 목소리로 엮은 많은 문장들로부터 생명으로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내가 찾고 있던 삶의 태도를 빌려왔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사람은 아무리 반려자라해도 그의 전부를 포용하고 이해하고 교감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니 외로움과 싸우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여겼다. 외로움에게 지는 건 내가 외롭다고 느낄 때가 아님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알려준다. 외로움에게 지는 건, 내가 외로움에 대항하기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다. 눈에 띄지 않아도 한 해가 가면 어김없이 나무의 나이테가 굵어지듯이 대항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눈물을 쏟으면서 읽었던 카야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더러 대항하라고, 야만이 아닌 뜨거운 생명력의 야생으로 살아가라고 말해준다. 
 


암컷들은 원하는 걸 얻어낸다. 처음에는 짝짓기 상대를, 다음에는 끼니를. 그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됐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중략)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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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의 탄생 -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
군터 게바우어.스벤 뤼커 지음, 염정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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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운동이 수행되었고, 플래시몹이 출몰하고, 온갖 종류의 폭동이 일어난다. 이 불씨가 얼마나 빨리 옮겨갈 수 있는지 그리고 가상의 대중에서 어떻게 실제의 대중이 생겨나는지는 얼핏 단번에 나라 전체를 덮치는 것으로 보이는 대중 시위의 급속한 확산이 보여준다. 이것은 2004년과 2013~14년의 우크라이나, 2013년의 브라질 혹은 2016~17년의 서울의 경우에서 드러난 바 있다.
책 271쪽 [새로운 대중의 탄생] 중에서

 

 인터넷 기사 댓글란의 갑론을박은 언제 읽어도 치열하다. 거기는 언제나 두 개의 편이 있다. 중도는 허락되지 않는다. 한 쪽이 존재하기에 다른 한 쪽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간도 있어서는 안 된다.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서로가 달라서 맞서는 게 아니다. 오히려 둘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진정한 국민의 목소리를 자처한다는 점, 자신의 세계관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의견과 미디어만 수용한다는 점, 내 편에 대한 긍정보다 대립하는 상대에 대한 부정에 더 열을 올린다는 점. 데칼코마니도 이런 데칼코마니가 없다. 댓글을 읽다보면 그 치열함이 내가 선 공간이 점점 포위해 온다. 마치 너는 어느 편이냐고 심문을 당하는 기분이랄까. 나 역시 국민인데, 이 두 개의 편이 주장하는 두 개의 국민 중 어느 쪽이 내 쪽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진정한 국민’을 자처하는 호소 아래 나와 다르다면 모두가 ‘가짜 국민’이라고 속삭이는 뭉근한 목소리를 숨긴 이 대중은 누구이며, 이들에게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나와 같은 다수는 또 어떤 대중인가?

 

 

 [새로운 대중의 탄생]은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바꾼 후 다시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탐구한 책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 교수인 군터 게바우어 교수와 철학 강사인 스벤 뤼커는 최근 100년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인 ‘대중’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이론과 사건, 최근의 여러 현상들을 아주 세밀히 살펴본다. 두 명의 저자가 여러 이론을 현미경 삼아 낱낱이 해체하여 이 책에 나열한 대중은 시민혁명을 이끌었던 그 때의 민중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이론이나 역사로부터 읽을 수 있는 대중은 현재의 대중과 무척이나 다르다. 그래서 ‘새로운 대중’이라고 이름을 붙였나보다.

 

 두 저자는 새로운 대중이 가진 여러 얼굴을 신중하게 추적하지만 이 대중의 내면까지 파고들어 그 생각이나 욕망까지 밝히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한다. 가능한 어떤 편향도 제거하려 노력한 덕인지 [새로운 대중의 탄생]이 밝힌 대중의 기원, 구조와 작동 원리, 발전 양상과 오늘날 대중의 활동 등의 내용은 이제까지의 어떤 이론이나 정치적 입장 혹은 이익 집단의 관점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대중이 벌어지는 대사건에 직면해 있는 동시에 그것을 서술할 적절한 이론은 없다는 이중의 문제를 알고 있다. 이 현상들에 전통적인 대중 이론을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학자들 대다수는 대중의 변화된 겉모습에 현혹되어, 대중의 사건이 현대 정치와 문화의 근본 문제가 되었던 대중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보다 더 잘못된 견해는 없다. 그렇지만 미디어 시대의 대중은 매스 미디어의 영향으로 잡다한 혹은 개별화된 대중으로 변해버렸다 .”
책 9쪽, [새로운 대중의 탄생]

 

 [새로운 대중의 탄생]을 쓴 두 저자는 대중이 변형되어온 시간을 크게 세 개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사회 질서를 전복시킨 민중으로 기억되는 대중, 두 번째는 19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 중산층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문화적 동질성을 갖는 대중 그리고 그런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질서에 반항하는 또 다른 대중, 세 번째는 오늘날 폭발적인 확장으로 변혁을 일으킨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파도를 타고 가상과 실재를 두 세계를 넘나들고 있는 대중 곧 우리의 얼굴이다.

 

 저자들은 대중이라는 단어의 어원(mass, crowd)을 추적하는 걸로 본격 대중 탐구에 나선다. 길어 올린 ‘반죽’과 ‘짓이김’이라는 의미를 통하여 대중의 속성 곧 ‘구분할 수 없게 뒤섞임’과 ‘파괴되는 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대중의 속성이다. 지금의 대중은 커다란 덩어리이지만 그 안에서 개인은 뭉개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새로운 대중은 밀레니얼 세대다. 연대를 체험함으로써 그것을 개인화하고 그 개인화된 사건은 무한으로 통하는 SNS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전 지구에 연결된다. 이 연결은 가상의 세계에서 가상의 대중을 만들고 이렇게 창조된 대중은 오프라인에서의 행동과 결합하여 실제의 대중이 된다. 이실제의 대중 속에서 개개인은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 개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에 대하여는 결코 타협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며 자신과 공명하는 다수와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이 새로운 대중의 속성과 직결된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대중은 그 전의 르봉과 타르드 시절의 구성체와는 성질이 다르다. 이것은 적어도 선거권이 주어지고, 미디어가 자유롭게 허용되고, 여론이 깨어 있고,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따라서 개개인이 의견을 밝히고, 어딘가에 소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들에서는 통용된다. 이러한 법률적 수단과 정보 교환 수단뿐 아니라 사상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주어진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의 무리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 몸소 집결할 수 있다. 그들의 등장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해질 수 있고, 사진으로 전송될 수 있고, 거기에 소식이나 요구가 첨부될 수도 있다.
책 20쪽, [새로운 대중의 탄생]

 

 밀레니얼 세대가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여 가상과 실제의 세계 양쪽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이 책 [새로운 대중의 탄생]은 오늘날의 대중이라는 무리가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에는 ‘흩어진 개인은 어떻게 대중이라는 권력이 되었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개인주의와 다원주의에 따라 집단과 연대가 힘을 잃고 개인으로 해체되어 대중이라는 개념 역시 과거의 유물이 된 줄 알았던 독자들은 이 책으로 말미암아 대중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있으리라는 예감을 하게 된다.

 

 이 새로운 대중은 과거의 대중과는 그 영향력의 결이 다르기에 이 대중이 만들 세계 역시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예전의 대중은 무조건 지도자를 숭배하며 따르는 무지성과 감정의 분출에 따른 폭력성, 폐쇄성을 동반하곤 했다. 그러나 이 대중은 개방적이고 평화적이며 구조 역시 수평적이다. 아랍의 봄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새로운 대중이 이뤄온 역사적 순간들로 이미 이 대중의 힘은 입증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퍼퓰리즘적 대중의 역습이다.

 

 

 여기서 특히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봐야 할 당위성이 형성된다. 이 당위성은 선택지가 아니다. 지금도 인터넷 기사 댓글란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포퓰리즘적 대중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4장 포퓰리즘을 읽으면서 내가 왜 인터넷 댓글에서 치고 박는 두 개의 패 중에 어느 쪽으로도 동조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유를 찾았다. 왜 이렇게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자처하는 무리들이 많아졌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나라에 팽배해 있는 포퓰리즘에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다면 역시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포퓰리즘이란 생각보다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평생 남 욕 한 번 안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사람의 속성임을 감안하면 포퓰리즘과 아닌 것을 구별하는 일도, 포퓰리즘을 능가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니 이 시대의 대중은, 스스로가 포퓰리즘적 대중이 되지 않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할 사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 때, 촛불시위 때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먼 훗날에 ‘포퓰리즘에 휩쓸려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는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하여 [새로운 대중의 탄생]과 같은 책들이 필요하다.

증오를 전파하는 대중은 남들에 대해 no라고 말하며, 적대적인 대치 집단에 관점을 맞춘다. 이들은 포퓰리즘적 개념 구상에 부합한다. 반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대중은 자신에 대해 yes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따른다. (중략) 포퓰리즘의 증오를 전파하는 대중과는 달리 ‘자기애에 빠진 대중’은 자신에게 존재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만족한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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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뒤부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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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빨간 구두를 신는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되어 이 땅에 출현하는 그 순간에 이미 각자는 발에 빨간 구두를 신고 태어나 있다. 우리의 발에 채워진 저주는 삶의 불확실성을 무곡舞曲 삼고 어쩔 수 없는 박자를 따라 나를 끌고 간다. 한 순간도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때로는 쫓기듯, 때로는 신들린 듯 춤을 추는 일은 고통이다. 삶의 박자는 고정되지도 않고 예측할 수도 없다. 나를 끌고 가시덤불로 들어간 구두가 숲을 뒹굴며 나를 고슴도치로 만들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받아들이는 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삶이 신겨준 빨간 구두의 저주를 알아차리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의 주인공 소녀가 숲의 나무꾼더러 발을 잘라달라고 소리친 건 비극일까? 이 저주에서 빠져 나올 길을 선택한 그녀의 결정을, 그 시도를 우리는 어쩌면 부러워하고 있진 않는가? 

 

 

 폴 카트라킬리스는 기묘한 가족력을 소유한 남자다. 할아버지인 스피리돈 카트라킬리스, 삼촌인 쥘 갈리에니, 엄마인 안나 갈리에니, 아버지 아드리안 카트라킬리스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자살했다. 스탈린의 뇌조각을 잘라와 평생 그것을 전시한 채로 살았던 할아버지로부터 남동생과 부부처럼 지내면서 정작 자기 남편과 아들에 대한 애정 표현에는 무감각했던 엄마, 무기력한 시계공으로 살다 어느 날 출처를 알 수 없는 전화를 받고 사흘 후에 130km 속도로 오토바이를 몰아 벽으로 돌진한 삼촌 그리고 가족들이 연이어 자살하는 가시덤불 속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 없이 병원을 운영하던 아버지. 폴은 이들을 ‘각자가 세상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다른 가족의 삶에는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운 사람들’(101쪽)이라고 회상한다. 이들의 유전자를 상속받은 폴은 자기 자신 역시 그 사람들 안에 묶어 넣었다. 끝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다. 


 자기 세포 하나하나 속에 화인으로 뿌리 박혀 있는 카트라킬리스와 갈리에니의 유산을 부정하고 싶었던 폴은 의사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펠로타 선수가 되어 마이애미 하이알라이로 도망친다. 펠로타는 버들가지로 짠 라켓을 손에 끼고 화양목을 둥글게 깎아 염소가죽을 씌운 공을 치는 경기다. 베팅을 한 1만 5천명의 관중 앞에서 허공으로 뛰어 올라 시속 300km로 공을 쳐내는 일로 자기 삶에 내려진 저주를 이기려고 했던 폴은 어느 날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 듣고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동안 잊고 싶었지만 잊지 못했던 ‘가족의 유산’을 마주하게 된 폴은 모든 절차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더 하이알라이로 가서 삶에 붙어있으려는 시도를 한다. 바다에서 빠져 죽어가던 걸 건져준 이후 평생에 가족이 된 개 왓슨, 재치와 열의로 무장한 채 삶에 맞서는 펠로타 동지 조이 에피파니오, 인생의 여인이 된 잊지 못할 첫사랑 잉빌 룬데. 인생의 황혼에 이른 어느 날 ‘그때 참 행복했다’라고 추억 할 수 있는 보통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은 그는 잉빌 룬데와 헤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가업을 이어 아버지가 하던 병원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면서 비로소 자기가 처한, 자기가 상속받은 유산의 실체를 발견한다. 카트라킬리스와 갈리에니로부터 상속 받은 그것은 실은 지구상 천지개벽 이래 1천 80억명의 사람 모두가 빠져나가지 못했던 보편적 저주였다. 우리 모두가 신고 있는 빨간 구두를 직시한 폴은 자기 몫의 저주를 풀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장폴 뒤부아가 쓴 [상속]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삶의 열망으로 들끓거나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한 인물도, 세상도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이 살아온 배경, 그들의 직업, 그들이 사는 세계 등 모든 것이 이미 소멸했거나 소멸하고 있는 중이다. 스피리돈 할아버지는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질 때 간신히 탈출했으면서도, 그 시대의 유물(스탈린의 뇌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인물이고 엄마와 삼촌의 직업은 더 이상의 비전도 미래도 없는 시계공이다.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 아드리안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생의 소멸을 돕는 조력자였다. 시간이 먼지가 되어 풍화하는 듯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젊은 폴이 꽂힌 건 스포츠 ‘펠로타‘였다. 한때 올림픽종목이었으나 이제는 베팅에 관심 있는 구경꾼들의 경기가 된 이 스포츠는 그나마도 경제논리에 밀려 구장이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른다. 폴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함께 만들었던 잉빌은 신체 기능은 물론 기억까지 잃는 불치병에 걸리고 폴의 우울한 생애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반려견 왓슨은 폴의 품에서 요단강을 건넌다. ’살아간다‘곤 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음을, 그 안에서 잠시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더 깊은 심연으로 우리는 침몰한다는 사실을, 쉼없이 소멸하고 사라지고 있음을 이 소설이 알려준다.

 

 천지개벽 이래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늘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세상을 빛 없는 시공간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빛은 소중한 축복일진대 다른 어떤 우주만을 비추고, 그 우주 둘레를 이 세상을 포함한 암흑이 둘러싸고 있다는 관점이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을 빛이 없는 어떤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그 지하세계란 까마득히 깊은 검은 구멍 같은 것으로 천지개벽 이래 1천80억 명의 인간을 삼켜왔다. 스스로 영혼을 지녔다고 믿을 만큼 갈망이 크고 자만심도 큰 인간을 말이다.
342쪽

 

 

 

 장폴 뒤부아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적이 없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대부분 폴이었다는 것도 이 소설을 번역한 임미경 님이 쓴 글을 읽고서야 알았다. 이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 피도 눈물도 없이 현실을 직시하는 매서움을 자랑한다는 것 역시 역자의 글을 읽고 알았다. 자기의 생을 이 땅에 발 붙여 보려는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살을 택한 주인공의 마지막 기록을 읽고 나서 한동안은 너무나 우울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었다면 장폴 뒤부아는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폴의 삼촌인 쥘이 “삶은 길을 잘못 들면 안 돼. 후진이 안 되거든.”(114쪽)이라고 했던 말은 애초에 태어난 것이 잘못 든 길이라는 뜻처럼 읽혔다. 할아버지가 폴에게 이야기 해준 ‘콰가’의 멸종은 모든 개체가 서서히 사라지고 지상의 단 한 마리의 콰가가 죽어가는 과정이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폴이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사랑한 이도, 친구도, 아끼던 반려견도 있었으나 이들이 사라진 후 그들과의 친밀했던 시간은 도리어 깊은 슬픔이 되어 우리를 덮친다. 아무리 붙잡으려 애써도 스러질 뿐이고, 간직하려 하는 아름다운 것들 역시 모조리 시간 속에 저물어 버리는 게 삶이라면, 이 속에서 빨간 구두를 신고 온 몸이 망가지도록 춤을 추는 인간들의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나? 


 바로 이 지점에 저자는 펠로타 선수들이 손뼈가 으스러지면서도 무엇 때문에 이 스포츠를 지속하는지를 대입한다. 관중이 없어도, 연봉이 시원찮아도 펠로타 선수의 길을 가기로 했던 폴의 선택이야말로 이 답 없는 인간의 생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냐는 저자의 전언이다. 열심히 살다보면, 노력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테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건 고문이다. 마치 종교에서 ‘신이 나를 도와줄 것이다’는 믿음과 다름없는 이런 희망은 도리어 절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삶은 그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일은 어디로 갈지 그리고 내 삶을 지속할지 여부까지도 나의 선택이고 결정에 달린 일이다.

 

 

 장폴 뒤부아는 폴 카트라킬리스의 기묘한 가족사와 구 소련의 붕괴, 문을 닫은 시계 공방과 하이알라이 구장 등 현대 정치 및 산업사를 직조하여 낡고 부패하고 소멸해가는 우리의 현실을 가차 없이 그렸다. 소소하고 소박한 즐거움들은 계주를 하듯 이어지고, 꿈이 현실이 된 어떤 순간들은 고스란히 포르말린 병으로 들어가 유물이 된다. 삶에 빛나는 순간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빨간 구두를 신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순간이 지속될 거라는 낭만은 나를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니 ‘잘될거야’라는 미신에 취하지 않기를. 폴이 상속 받은 유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지구상에 없으니까. 내가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삶이 나를 제멋대로 끌고 가버린다.

집으로 돌아와 식탁의자에 걸터앉았다. 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본 것에 대해, 내가 한 일에 대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후회하는지 아니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여기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2층에 포르말린에 잠겨 있는 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의 기억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이 집은 공허하고 말없는 무덤이었다. 나는 이 무덤의 유일한 하숙인이었다. 왓슨은 긴 소파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잉빌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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