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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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 혼자구나.’라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 나의 고독과 고립은 ‘종신형’이라는 생각에, 평생 나는 곁에 사람을 둘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온 몸을 치어 본 사람.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아닌 다른 데로 숨어본 사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얼굴의 멍자국 때문에 사람을 피해야 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 내 곁에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기 위하여 내 안의 어떤 것들을 버려본 사람.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카야에게 이토록 몰입되었을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는 내내 카야에게 빙의되어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엄마와 언니 오빠들 그리고 아빠까지, 카야만 두고 하나씩 늪지를 떠난 가족들의 빈 자리 속에 느꼈던 사무치는 외로움과 학교와 또래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느낀 수치심, 테이트와 체이스를 거치며 베인 살에 소금을 맞듯 경련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까지, 카야의 감정들이 내 것 인양 선명했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7살 카야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과 함께 습지 판잣집에 산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가고 차례로 언니와 오빠들도 집을 나간다. 몇 년을 함께 살던 아버지마저 카야가 열 살이 되던 해에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자신이 늪지 쓰레기라고 불리며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아는 카야는 학교를 가자거나 위탁가정에 가자고 찾아오는 사회복지사도 따돌리고 홀로 습지 생활을 이어간다. 흑인 아저씨 점핑에게 홍합을 팔고, 그들로부터 가끔 구호품을 얻으면서 카야는 내내 엄마와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도, 말할 사람도 없는 습지 판잣집에서 카야는 새 깃털과 조개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걸로 외로움을 달랜다.
 혼자 사는 카야가 걱정이 된 테이트는 가끔 찾아와 글을 가르쳐주었고, 카야는 테이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대학 진학 때문에 테이트와 카야는 헤어지고, 크게 상처받은 카야는 가족을 이룰 대상을 찾는다. 
 마을 유지의 아들로 오만방자한 체이스는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카야에게 접근한다. 카야는 처음에는 체이스를 경계하다가 곧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와 가족을 이룰 수 있을거란 소망을 품는다. 그러나 체이스는 카야가 몸을 허락한 이후,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이를 알게 된 카야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혼자 살리라고 다짐한다.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온 테이트는 카야와 체이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카야가 걱정되어 내내 카야 옆을 맴돈다. 카야의 수집품이 가히 박물관 수준임을 알게 된 테이트는 카야의 수집품과 그녀의 스케치를 투고하게 되고 카야는 바닷가 연안의 새와 조개에 대한 책을 쓴 작가가 된다. 이걸 계기로 카야는 다시 테이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연다.
 결혼한 체이스는 여전히 카야가 자신의 소유라는 걸 과시하려 그녀를 찾아와 강간하려 하지만, 카야는 그로부터 도망친다. 며칠 후 체이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카야는 체이스 살인용의자로 기소되어 긴 법정 싸움에 휘말린다. 유능한 변호사 톰의 호소와 그녀를 아끼는 소수의 지원 덕분으로 무죄를 받고 풀려난 카야는 남은 여생을 테이트와 함께 습지 판잣집에서 행복하게 보낸다. 66살의 나이로 카야가 숨을 거둔 후, 테이트는 우연히 카야가 집 바닥에 숨겨둔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서 체이스 살해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 테이트는 아무도 모르게 해변에 그것을 흘려보낸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는 세 개의 존재로 읽힌다.

야생, 사람, 여성. 


 

 *

야생

 

 카야는 습지에서 태어나 생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낸 인물이다. 카야의 부모님과 다른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습지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습지를 떠날 수 있었지만 카야는 아니었다. 클라크 가(家) 사람 중 유일하게 습지에서 태어난 카야에게 그곳은 세계였고, 안식처였고 가정이었다. 인간이지만 카야의 유대와 정서는 학교와 마을이 아닌 습지의 생태계와 긴밀하게 맺어져 있다. 


 습지는 육지와 바다(혹은 강)의 중간에서 둘을 연결하는 요지이다. 해양 생물의 약 60%가 습지에서 번식하는데, 수산 자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오염을 정화하는 역할도 한다. 축축하고 미끌거리는 흙바닥에서 보이지 않는 호흡을 이어가는 미생물과 사시사철 번식을 위하여 노래하고 날개짓 하는 곤충과 새, 물고기들이 생명의 거대한 순환을 계승한다. 짝짓기를 하러 온 수컷을 잡아먹고 교미 중에 상대의 머리를 뜯어먹는 야생의 번식은 엽기적이고, 힘이 약한 동물이 천적에게 잡아 먹히거나 무리에서 버려지는 생존 방식은 무자비해 보인다. 그러나 생명의 순환을 잇기 위한 야생의 번식과 생태에는 교미의 즐거움이나 실연의 상처, 인간적인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미세한 부품들이 조밀하게 호흡을 맞춰 빈틈없는 시간의 궤도를 그리듯이, 작은 반딧불이의 번식과 생존은 그들 뿐 아니라 지구라는 별 전체의 균형과 존속을 이루는 섬세한 부속이다. 이 커다란 흐름 속 하나의 톱니바퀴인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생명체들은 치열하다. 카야는 이 치열한 생명력을 배워 인간이 모두 떠난 습지에서 살아남았다. 노동은 해가 뜨는 시간과 달이 뜨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의 고됨은 카야의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살아남는 일의 핍절함, 핍절한만큼 엄정함을 자연은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지킨 생명이기에 거룩하고 아름답다. 카야는 자연으로부터 생태계의 한 부분인 자기의 존재를 깨닫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야생으로부터 생명을 존속하는 방법과 가치를 배웠다.


 그러나 인간은 습지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가치도 알아보지 못한다. 습지와 그 야생을 두려워하거나 멸시한다. 습지를 쓰레기들이 모이는 천박한 공간으로 취급하고 야생을 거칠고 미개한 것으로 취급하는 인간의 행태는 생태계의 습성에 반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습성과 야생이 접점을 찾아간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계몽적인 메시지에 페이지를 소비하는 대신 테이트에게서 체이스, 다시 테이트에게로 이어지는 카야의 서사를 통하여 서로에게 반反하는 두 세계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은유한다. 


 난생 처음 습지를 떠나 애슈빌로 가는 길에서 카야는 인간의 알량하고 조악한 행위를 본다. 나무를 베고 숲을 파괴하고 건물을 올리고 도로를 낸고 그 인공(人工)을 자랑하는 인간들. 체이스는 카야에게 광대한 벌판과 산에 지은 집과 도로들을 보라며 뿌듯해했지만 카야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체이스 역시 카야의 세계 즉 야생에 섞여들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정복하고 소유하는 인간인 체이스에게 습지에서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테이트는 카야와 인간 문명의 연결고리였다. 글을 가르쳐주고 책을 가져다주고 카야가 집대성한 결과를 책으로 내도록 이끈, 카야와 인간 세계와의 결정적인 교류에는 언제나 테이트가 다리였다. 그런 테이트가 카야와 여생을 함께 하는 카야의 판잣집은 그 자체로 습지가 된다. 이질적인 두 개의 환경을 연결하는 습지의 특성대로, 인간과 야생,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카야의 판잣집에서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

사람

 

 얼핏 카야가 습지에서 자라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 비춰보일 수 있지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사람인 카야를 분명하게 그리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습지에 고립된 채로 성장하고 살아가는 시간 동안 카야를 끈질기게 괴롭힌 건 외로움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떠난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왜 엄마 사슴은 돌아오는데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지’를 묻고, 아무도 없는 해안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며 자기와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는 일은 습지의 모든 야생과 카야를 구분 지어 사람인 카야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습지의 그 어떤 새도 외로움이 싫어서 반려를 구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가족을 만드는 조개도 없다. 오직 사람만이 고립되지 않기 위하여,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친구를 만들고 연인을 구하고 가족을 이룬다. 일곱 살 아이였을 때부터 뼛속깊이 물든 외로움은 카야가 내리는 모든 선택에 동기로 작용한다. 외로워서 테이트와 체이스와 가까워졌고, 그들이 떠난 후에 느낀 더 큰 외로움과 절망은 카야가 다시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닫도록 만들었다. 카야는 외로울 때마다 엄마가 해주었던 이야기들, 여자들의 유대와 연대에 대하여 떠올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말해준 엄마조차 카야의 연대자가 되어주지 않은 건 물론 그런 연대와 유대를 어떻게 맺는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참 기묘하다. 카야의 야생성에 대하여 시종일관 이야기하지만 그 야생성은 카야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 역시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야생의 카야를 만든 건 어린 날의 고립이었고 그 고립은 카야가 원한 것도 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카야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욱 미어지는 아픔으로 와 닿고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고 사람이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고독과 소외의 감정들이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전달된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자기 발로 나를 떠났고, 그 어떤 집단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냉혹한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다면, 언젠가 친구와 가족을 갖게 될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는 것이 고통일까 아니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켜켜이 쌓인 벽 뒤로 모습을 감추는 게 고통일까.

 

 

카야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사이에 함께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깊어지는 하늘 아래 소녀들의 즐거움이 오라처럼 눈에 보일 듯 환했다. 엄마는 여자들은 남자보다 서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정을 가꿀 수 있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았다. 자연스레 카야는 숲속 더 깊이 물러섰다. 그리고 아이들이 백사장을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멀어져 모래사장의 작은 얼룩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104쪽

 

 

 

 옮긴이의 글에는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외로움’에 대한 책이라고 단언했고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고 써 있다. 작가는 홀로 유기된 어린 소녀의 인생사를 통하여 사람은 외로움을 친구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갇힌 주인공이 바람 빠진 배구공으로 친구 왓슨을 만들었던 이유와 그 왓슨을 폭풍우 속에 잃고 통곡했던 그의 심정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랴. 생물들에게 고립은 생존의 위기이지만 사람에게 고립은 존재의 위기가 된다. 그래서 사람을 고립시키는 차별과 혐오, 외면과 무관심은 부당하고 불의하다. 이 부당함과 불의는 생태계의 약육강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약육강식은 종족의 존속을 위한 야생의 방식이나 차별과 혐오 나아가 (체이스가 카야에게 휘둘렀던) 폭력과 정복욕은 야만이다. 차별과 혐오는 생태적 차원에서 약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휘두르는 쪽이 야만적이므로 벌어지는 일이다. 카야를 ‘외로움’으로 학대하고 카야를 돕는 유일한 어른인 점핑 역시 흑인이라고 멸시하는 마을의 모습은 카야를 품어준 습지의 야생과 대비되어 더욱 수치스럽고 천박한 야만의 세계로 드러난다. 이 야만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기어코 카야를 체이스 살인 용의자로 몰아세워 재판정에 세움으로써 그 비열함의 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

여성

 

 이 ‘야만’의 표상으로 체이스를 대체할 인물은 없다. 체이스와 카야의 대립과 갈등은 카야를 여자의 얼굴로 읽게 한다.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외로움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동시에 외로움이 여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그린 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려면‘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쓴 바 있다. 여기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건 다름 아닌 여성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립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그 이름 자체로 혼자 서는 일. 카야는 나이 열 살에 일찌감치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립을 한 인물이다. 글을 가르쳐주러 온 테이트가 아동센터로부터 지원을 받으라고 권하자 카야는 단호하게 그를 거절한다. 습지의 판잣집은 카야에게 자기만의 공간이었고 카야는 홍합을 캐고 생선 훈제를 만들어 팔면서 혼자의 힘으로 그곳에서 연명할 수 있었다. 자립은 곧 진짜 성인이라는 증명이다. 체이스는 카야의 판잣집에 처음 온 날 그녀의 자립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립했으나 자기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형편을 꾸리는 것과 홀로 고독한 삶을 산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상기했듯이 사람은 외로움을 피해서 반려를 찾는다. 순수하게 번식을 위해서 짝을 찾는 다른 생물들에 비해, 그래서 사람의 반려자 선택은 실수와 사고가 빈번하다. 카야의 엄마는 실수를 저질렀고 카야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만약 테이트의 빈자리가 준, 더욱 견디기 힘든 외로움 때문에 카야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속이 뻔히 보이는 체이스의 접근에 속지 않았을지 모른다.
 첫사랑이자 여러 면에서 카야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테이트는 카야에게 사랑이고 삶이었다(책 182쪽). 나무 등걸이에 희귀한 새의 깃털을 주고 받는 걸로 시작된 소년과 소녀의 만남. 카야에게 그것은 야생이 아닌 사람과 맺은 최초의 깊은 정서적 교감이었다. 카야는 테이트를 통하여 책을 만나고 세상을 읽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건 아님을 알고 위로 받았다. 수없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카야는 테이트와 교감하고 싶었고 동시에 엄마가 자신을 버린 정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떤 동물은 새끼를 버린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엄마의 부재에 대한 풀리지 않는 갈망과 원망은 테이트가 대학 진학을 이유로 마을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진다. 엄마의 대한 카야의 깊은 트라우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체이스와의 교제를 계기로 해소된다.


 자신에게 청혼하고 그 대가로 섹스를 요구하는 체이스에게 카야는 잠자리를 함께한다. 이건 카야 나름의 타협이었다. 상대를 내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자기를 내주고 되돌려 받지 못할 거래였다. 테이트마저 자신을 떠났는데, 이대로 영영 아무도 자신의 곁에 없을 거라는 두려움은 카야로 하여금 발정 난 수사슴처럼 목에 힘이나 잔뜩 준 체이스를 가까이하게 만들었다. 체이스가 약속과는 다르게 마을의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는 기사를 읽은 후 카야는 비로소 거짓말로 엄마를 꼬드겨 늪지의 판잣집에 살게 만들었던 아버지처럼, 체이스 역시 그럴듯한 덫으로 자신을 꾀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동시에 카야에 대한 정복욕과 소유욕으로 그녀를 폭행하고 강간하려는 체이스에게 엄마를 죽을 만큼 때렸던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을 본다.

 

 얼굴은 이제 녹색과 보라색으로 시커멓게 변색되고 눈은 삶은 달걀처럼 부풀어올랐다. 목은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윗입술은 한쪽이 엽기적으로 뒤틀렸다. 엄마처럼, 괴물 같은 몰골이 되어 무서워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카야는 엄마가 왜 떠났는지 선명하고도 뚜렷한 깨달음을 얻었다. “엄마, 엄마.” 카야는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이제야 엄마가 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는지 알았어. 몰라서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카야는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가 홱 고개를 젖혀 높이 치켜들었다. “난 그렇게는 살지 않을거야.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까 걱정하면서 사는 삶 따위 싫어.”
책 339쪽 [가재가 노래하는 곳] 

 

 누군가는 강간을 남자의 생식 본능이라고 이야기한다. 틀린 말이다. 강간은 생식하려는 본능이 아니라 정복하려는 야만에서 기인한다. 생식의 목적은 더 많은 자식을 생산해서 종족을 번성하게 하고 대를 이으려는 것이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것이 생식 본능이다. 이런 차원에서 섹스는 생식 본능이다. 그러나 결혼한 체이스가 카야를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고 강간하려 한 것은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순전히 카야가 여전히 자기 소유라는 걸 확인하려는 야만적인 정복욕이다. 체이스에게 얻어맞은 자기 얼굴에서 과거의 엄마를 발견한 카야는 엄마를 용서하면서 원망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드디어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걸 알고 그걸 얻어내는 온전한 여성으로 각성한다. 이전까지 카야는 체이스를 생식의 상대로 대했다. 그러나 이제 체이스가 먼저 야만을 발휘하여 힘의 논리로 카야를 대했다. 이제 체이스와 카야는 생식이 아니라 생존의 무대에 서서 겨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야는 야생의 암컷들로부터 수컷을 해치우는 법을 배운 여성이다.

 

 

 

 


 카야와 그녀의 엄마는 같은 실수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카야는 야생으로부터 생존의 엄정한 가치를 깨친 여성이고 카야의 엄마는 인간의 세계에서 사회화된 여성이다. 피멍으로 퉁퉁 부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카야는 이렇게 만든 상대에 대한 분노를, 카야의 엄마는 수치와 자기 혐오를 느꼈다. 물리적으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를 때릴 때에 보편적으로 사람이 느끼는 건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공포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이 공포는 가해자인 상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피해자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와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카야의 엄마가 집을 떠난 후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며 은둔하다 무기력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가 얻은 자기혐오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리라. 성폭력에 대한 카야의 대처는 단순한 권선징악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의미로까지 읽힌다. 

 

 이 작품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가졌던 여러 인식들을 새롭게 고쳤다. 야생과 야만, 자연과 인간, 동물과 사람, 설렘과 공포, 두려움과 그리움.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과 감정의 많은 부분이 카야의 이야기에 비추어 조금 더 정밀하고 견고한 형태로 조정되고 카야의 눈빛과 저자의 목소리로 엮은 많은 문장들로부터 생명으로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내가 찾고 있던 삶의 태도를 빌려왔다.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사람은 아무리 반려자라해도 그의 전부를 포용하고 이해하고 교감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니 외로움과 싸우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여겼다. 외로움에게 지는 건 내가 외롭다고 느낄 때가 아님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알려준다. 외로움에게 지는 건, 내가 외로움에 대항하기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다. 눈에 띄지 않아도 한 해가 가면 어김없이 나무의 나이테가 굵어지듯이 대항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눈물을 쏟으면서 읽었던 카야의 이야기는 여전히 나더러 대항하라고, 야만이 아닌 뜨거운 생명력의 야생으로 살아가라고 말해준다. 
 


암컷들은 원하는 걸 얻어낸다. 처음에는 짝짓기 상대를, 다음에는 끼니를. 그저 신호를 바꾸기만 하면 됐다.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중략)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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