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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과학 - 뇌는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만드는가 ㅣ 프린키피아 7
한나 크리츨로우 지음, 김성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당장 마음만 먹으면 사람은 뭐든지 될 수 있다.
내가 어떤 존재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불굴의 개척자 정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제 내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고 한다. 내 유전자, 내 환경, 내가 존재하기 이전의 모든 것들이다.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발달은 단순히 의학적 혁신이나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이 두 분야는 이제 개인의 인생 전체를 두고 청사진을 그리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시력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심장 질환을 앓을 확률이 높은 사람과 아닌 사람 정도를 구별할 수 있었던 유전자 정보는 이제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어떤 성향의 선택을 내리며 생물학적정신적 질환을 망라하여 어떤 병을 앓게 되는지도 예측 가능한 수준에 와 있다. 이에 따라 태어날 아이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약점과 강점을 알 수 있는 시대. 그래서 과학이 사람의 운명 소위 팔자까지도 진단할 수 있는 시대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다. 잠깐만!! 내 운명이 정말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단 말인가? 내 성격과 습관, 질환까지 예측 가능하다면, 이렇게 다 짜여진 판 속에서 나는 내 운명을 바꿀 기회가 없단 말인가? 유전자가 제공하는 것 말고 다른 버전으로 팔자를 고쳐볼 방법은 무엇일까?
‘우주는 결정론적이에요.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써내려 가는 주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보다 앞선 무언가에 의해 야기되니까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인지과학 종사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 책 231~232쪽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퍽이나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과학자들, 의사들, 대학교수들과 심지어 신학자까지 찾아다니며 그는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내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사고를 당해서 불구가 되었을 때 왜 어떤 사람은 재활에 성공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왜 어떤 사람은 그대로 우울의 늪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가. 왜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일상을 소화하면서도 누군가는 날씬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는 반면 누군가는 먹는 게 없어도 살이 찌고 이유모를 질환에 시달리는 걸까. 우리는 그동안 대부분 그 사람의 의지를 탓했다. 끈기 없는 성격과 낮은 집중력, 심지어 (확인된 바 없지만 분명히 확신하며) 낮은 지능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이 오롯이 그의 성격이나 지능 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제 여러 분야의 연구와 분석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뇌과학과 신경과학은 그가 타고난 어떤 유전자와 뇌의 배선이 남보다 쉽게 살이 찌거나, 남보다 쉽게 우울해지거나, 남보다 쉽게 지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발견하고 있다. “너는 왜 남들처럼 못하니?” 이런 잔소리로부터 나 자신을 변호할 근거가 생긴 셈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는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추구하도록 진화해 왔다. 개인별로 이런 욕구가 얼마나 강력할지는 그 사람이 타고난 유전자와 뇌의 배선에 달려 있다. 자신의 식습관을 바꾸어보려는 개인의 시도는 항상 이런 요소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책 105쪽
사람마다 효과 있는 전략도 달라진다. 습관 형성은 대단히 복잡하고 사람마다 다양하기 때문이다. -책 111쪽
저자는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발전을 거듭하며 인체의 미래까지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기에, 이런 세상에서 과연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자유 의지로 만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개인의 인생 궤도가 생물학적, 신체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과학이 알려주니, 개인이 가지는 자유라는 건 대단히 작거나 의미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이 책 속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정반대의 생각을 했다. 인생의 궤도가 예측가능하다면 내 인생을 괴롭게 할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약점을 보완할 전략도 준비 가능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오히려 질병과 약점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을까. 더구나 내 뜻대로 안 되는 내 인생의 무엇에 대하여,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만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건 정말로 내 탓이 아니니까. 나는 그저 비만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뿐, 내가 해야 할 일은 불어나는 몸무게 앞에서 나 자신을 책망하거나 혐오하는 대신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게 적합한 관리 방법을 찾아나가면 될 뿐이다.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발달이 이토록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고, 나는 가까운 미래가 기다려진다. 솔직히 아직은 이 분야들의 연구 발표나 관련 서적 내용들을 100% 신뢰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변수가 통제된 연구실에서 진행된 연구들 혹은 몇 개의 표본들로부터 도출한 내용이 실제 나라는 개인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과학에 대한 미신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이 빠르게 발전한다면 분명 우리는 각자의 생물학적 특성을 분석한 보물지도 하나씩 갖게 될 수 있으리라. 내 약점을 스스로 알 수 있단 사실만큼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건 또 없으니까.
또한 이러한 과학의 발전이 교육, 복지, 법 제도 같은 사회 구조에 어떤 변화를 요구할지도 지켜보고 싶은 부분이다. 책 속에서도 유전자 조작에 따른 여러 윤리적인 문제와 부작용 등이 등장한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과학에 대한 맹신은 금물이다. 과학과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순 없다. 무엇보다도, 과학의 힘으로 예측한 미래가 틀렸을 때, 그 보상은 무엇으로 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 입장도 함께 정리가 된다. 과연 나의 뇌는 이미 내 운명을 정해놓고 있었을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서 내 유전자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다. 내가 어떤 모양으로 태어나는 건 결정할 수 없었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건 여전히 나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결정된 것들은 모두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일 뿐, 결정은 내 몫이니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과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유전자는 나무에 달린 이파리로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파리들은 중요하지만 언 이파리 하나가 나무 전체가 드리우는 그늘에 미치는 영향은 적죠.’
책 274 쪽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과학자 앤-로라의 말 중에서
유전자는 나무에 달린 이파리로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파리들은 중요하지만 언 이파리 하나가 나무 전체가 드리우는 그늘에 미치는 영향은 적죠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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