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소설이 된다면 이런 책이겠지. 얼마 전 읽었던 [진주]가 자기 자신의 증언을 소설로 빚었다면, 이 책은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0여 명의 참전 여성들로부터 채집한 목소리를 소설로 빚은 결과다. ‘소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허구, 꾸민 이야기, 극적인 즉 인위적인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담긴 글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극화劇化를 철저히 경계한 저자의 예민함에 힘입어 그런 류의 글에서 벗어난다. 이런 작품을 소설, 일명 목소리 소설(저자 자신은 소설-코러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야기가 허구여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것인 듯 전이되고 확장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은 읽는 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당연한 대가라고 느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자들 뿐 아니라 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얻은 훈장을 비추는 대신 ‘냄새나는 속옷’을 드러내는 저자의 책들 때문에 재판도 열렸다고 한다. 마땅히 기억되어야 하는 소리들을 남기는 일로 인하여 저자가 감수해야 했던 시간들 역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런 사람의 여정을 동행하는 데 그저 하루이틀, 부드러운 이부자리나 소파에서 엉덩이를 부비며 책장을 넘기는 태도는 무례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와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이기도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얼마 전에 읽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인연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그러하듯이. 어제 만났던 사람,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 내일 만나게 될 사람. 그 사람 사람을 어떤 타이밍에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와 인생의 맥이 달라지듯, 책과 책 그리고 그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책과의 인연에 따라 그 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달라진다.

 

 책의 면면이 너무 아까워서, 적어도 아직 전쟁 중인(휴전이지 종전이 아니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은 전쟁에 휩싸인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못 들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의 발췌문들을 옮긴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14쪽

 

 

 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그때의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날들의 진실. 감정의 속임수가 없는 진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지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와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는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삶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읽고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24쪽

 

 


 이름 없는 전쟁의 목격자나 참전자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나는 역사. 그렇다. 나는 바로 그런 역사가 알고 싶다. 그런 역사를 문학으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단순히 목격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나 창작자에 가깝다.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할 만큼 가까이 실제 현실에 다가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으며, 수없이 엇갈리는 입장과 견해들로부터 새로운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형상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25쪽

 

 

 그랬다. 그네들은 많이 울었다. 소리도 질렀다. 내가 떠나고 나면 그네들은 심장약을 먹었다. ‘구급차’가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다. “와요. 꼭 다시 와야 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살았어. 40년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았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든다. 사람은 전쟁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잘 드러난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저 깊숙한 피하조직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사랑할 때도 그럴지 모르겠다. 죽음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이념이 그 의미를 잃는다. 누구도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영원의 세계가 열린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우주가 아니라.
31쪽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37쪽

 

-당신은 전쟁의 추악한 면만 보여주고 있소. 냄새나는 속옷만 보여줬단 말이오. 우리의 승리가 당신한테는 무섭고 끔찍한 것에 불과한 거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 진실들.
 - 당신은 삶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거리에 있다고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천박해요. 지나치게 세속적이오. 아니,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그것!

48쪽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 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83쪽

 

 

 

우리 소녀병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고? 체르노바라는, 임신 중인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는 지뢰를 자기 옆구리에 끼워 날랐어. 새 생명의 심장이 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이제 좀 이해가 될 거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우리가 왜 그랬는지 굳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을 뿐이야. 우리는 조국과 우리는 하나라고 배우며 자랐지. 어린 딸을 데리고 시내 임무에 나선 친구도 있어. 딸아이 몸에 선전 삐라를 칭칭 돌려 감고 원피스를 입혀 감췄지.
132쪽

 

 

 전쟁은 이 집에서 아직도 진행중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171쪽

 

 

 

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그때의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날들의 진실. 감정의 속임수가 없는 진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지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와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는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삶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읽고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14세기 중반 흑사병이라 불리던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거시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미시적 관점, 즉 역사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결정권을 지닌 정치가들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뜻밖에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거물급 정치가 한 사람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없었다면 20세기의 유럽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미하일 고르바초브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냉전 시대가 평화롭게 종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 8쪽 – 프롤로그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의 여파로 나라가 멈춘 지 3주째에 접어들었다. 교육계는 3월 23일로 연기했던 개학 일자를 다시 한 번 연기해야 하는지를 긴급히 논의 중에 있고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 (주로 문화, 예술 목적의) 공기관들은 언제 다시 문을 열지 아무도 모른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도 마스크를 사기 위하여 약국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인파로부터 ‘저기에도 나 같이’ 이 전염병의 충격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연대감을 간신히 확인할 뿐이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 읽은, 전염병이 도는 유럽의 중세에 와 있는 것 같은 공포는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적절한 주제와 내용을 가지고 신간이 나오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폈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로날트 게르슈테 저자가 2019년에 출간한 책이다. 코로나19의 사태를 통하여 뼈저리게 배우고 있는 사실이란, 전염병은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바꾸는 동시에 전 국가, 세계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페스트나 매독 등의 전염병이 지나간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파괴력을 발휘했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전염병의 영향을 받은 사회와 국가라는 거시적 관점과 더불어 지구촌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관여한 질병의 영향을 탐구하는 미시적 관점을 더하여 이 책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를 집필했다.

 

 스스로를 글쟁이 의학자이자 수다쟁이 역사학자인 저자가 쓴 책인 덕분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학과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케네디가 호르몬 문제로 불안정했다든가 슈베르트는 매독 환자였고 하이네와 바흐는 돌팔이 의사에게 불법 안과 수술을 받은 후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아는 역사 덕후라면 이 책이 전혀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역사의 비밀 이야기를 읽는 듯한 신선함으로 이 책이 다가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26개의 꼭지로 구성된 이 책은 크게 페스트, 매독, 천연두, 통풍, 독감 등 국경을 초월하여 몇 세기 동안 인류를 괴롭힌 전염병을 주제로 한 내용과 아돌프 히틀러, 조지 워싱턴, 스탈린과 닉슨, 바흐 등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만든 주요 인물들이 앓고 있던 질병을 주제로 한 내용, 두 가지로 나뉜다. 26개의 꼭지가 개별 에피소드 형식이라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책의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프랑스아 미테랑 등 현재의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가 주로 등장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특히 추천한다. ‘집콕독서‘가 유행하는 이때를 함께 보낼 책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펜데믹이 선포된 지금, 시류에 편승하는 책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세 번째 꼭지인 <페스트>만 읽어봐도 질병과 역사의 상관관계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안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전염병이나 질병이 무조건 나쁘다, 악영향을 주어 극심한 피해만 입혔다’라는 1차원적인 시각에서 탈피한다. 질병과 인류의 역사를 서술하는 대신, 병이 남긴 호재나 좋은 영향까지도 탐색하고 몸의 질병으로 인해 드러나는 사람들 정신 속의 병까지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훗날 매독이라고 불리게 된 이 질병은 당시 교통수단이 이동하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나아가 당시 진군하는 군대의 속도와 유사한 속도로 퍼졌다. 이번 질병 전파의 주역은 샤를 8세의 군대였다. 프랑스에서는 해당 질병을 ‘나폴리 질병’이라 불렀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는 나폴리가 매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독일어권 국가, 나아가 영국에서는 그 질병을 ‘프랑스 질병’이라 불렀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질병’이라 부렀고,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이라 불렀다. 그 이름들을 보면 매독의 진행 경로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책 67쪽

 

흑사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희생양 찾기에 나섰고, 그런가 하면 세상이 저지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채찍질하는, 이른바 ‘고행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중세는 종교의 힘이 강해 페스트가 진노한 신이 세상에 내리는 벌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을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광신도들의 목표가 된 이들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이었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이경선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꽃은 피는 때가 있고 지는 때가 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꽃이란 한철임을, 그래서 그것이 피어날 때 그 향기에 흠뻑 취해야 하고 그것이 질 때 미련 없이 보내주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이 따라준다면 이 세상에 이 수많은 멜로는 왜 있으며, 애틋한 이별 노래들은 누구를 위하여 지어졌을까. 꽃이 만개한 채로 영원히 함께 있어준다면 세상에 뿌려진 슬픔의 절반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경선 시인의 시집은 연인과의 한 계절을 그렸다.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 산에 진달래들은 벌써 달아오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진분홍 눈웃음을 지었더라. 소리도 없이 입술을 달싹이다 불현 듯 토해지는 고백처럼 꽃들의 함성이 이제 산 지천에 깔릴 터다. 살그머니 다가온 연인과의 인연은 봄꽃 피듯이, 사랑이 문득 식어지고 연인과의 이별 역시 꽃 지듯 한다. 이경선 시인은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시들을 이 시집에 담았다.

 

 한창 연애를 할 때 그리고 이별을 겪으면서도 나는 시에 의지해본 적이 없다. 연인만큼 무궁무진한 영감을 주는 건 없다고, 나도 그에 동의는 하면서도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시든, 대중가요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듣고 흘리곤 했다. 감성이 무딘 탓이라고, 지금은 겸허하게 나를 성찰하는 중.

 

 예전에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SNS에 사랑을 주제로 한 시나 짧은 글귀들이 무척이나 많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개인 채널이 많아진 덕분이겠지만, 아무리 개인 채널이 많아도 사람들이 ‘사랑’에 관심이 적다면 관련한 콘텐츠도 당연히 적을 수밖에 없다. 사랑에 대하여, 이별에 대하여, 그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노래하는 시가 많다는 건 아직 우리는 그런 감성이, 감정이 죽지 않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그대가 피었다.
 그대가 저문다.

 

시집의 소제목 두 문장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되고야 만다.
피었다 저무는 그대는 또 어디 다른 사람에게 가 닿아 다시 피어날테고, 나 역시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인연이 닿아 또 다른 꽃으로 피어나겠지. 그러다가 또 지고, 피고 다시 지고. 심수봉 님이 부른 <백만 송이 장미>가, 수많은 꽃이 피고 나는 별나라로 갈 거라는 아름다운 가사가 왜 그리 슬펐는지 이 시집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 삶은 너로 인해 빛났어
지난날들에 후회로 가득했던 내게
그날들이 모두 너를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을 읽은 듯이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이 왜 팔리는지 알게 만드는 서평이 있다. 이 서평들은 모두 책으로부터 내용을 길어와 책에 직결된 형태로 쓴 서평이다. 한 권의 책을 주인공으로 두고 관련한 다른 책들을 조연들로 등장시키는 형태도 있고, 두 권의 책을 대조하여 쓴 서평도 있다. 한편 책으로부터 내용이 아니라 영감을 길어와 쓴 서평도 있다. 책을 소개하거나 책 내용을 간추리거나 책의 특징과 의미를 설계하는 대신 에세이를 지어놓은 형태가 이런 서평이다.

이 책 [서서비행] 한 권에는 이 모든 종류의 서평이 다 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중략) 평균 4일이 걸린다고 하자. 그렇다면 [봄피아니 작품 사전]에 실린 모든 작품에다 4일을 곱하면 65,400일이 된다. 365일로 나누면 거의 180년이 된다. 이런 계산은 틀림없다.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31

 

표지에 대놓고 매문기賣文記라고 적힌 이 책은 금정연 저자가 쓴 서평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수많은 서평문 사이에 틈틈이) ‘왜 서평을 읽냐?’를 물어보는데, 움베르토 에코가 이미 답을 했다. 사람이 살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 독서가능영역의 국경선 위로 가뿐히 날아오르고 싶으니까 [서서비행] 같은 서평모음집에 몸을 맡기기 마련이다.

 

[서서비행]의 저자 금정연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하다 현재는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중이다. 이 책은 책을 팔다가 글을 팔게 된 저자가 서평문을 기고하면서 느낀 독서의 기쁨과 슬픔이다. 저자에게 독서는 오롯하게 취미, 재미, 의미의 온실 속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왜냐면 책 읽은 소감을, 책에 대한 소개를, 책 읽기를 추천하는 바를 글로 써서 팔아야 하거든. ‘먹고 사는 게 다 뭔지싶다가도 먹고 사는 게 전부지, 하고 마무리하게 되는 세상살이가 읽기와 쓰기를 생계 수단으로 삼게 되면 어떤 의식의 흐름을 보이는지 이 책이 잘 보여준다. 시종일관 마감과 생계의 족쇄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그 무겁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 두드리는 실로폰 놀이라도 하듯 쓴 서평이 이어진다.

 

사실, 초반부에 저자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할 때의 경험들, 구체적으로 병아리 고르듯이 무감하게 수십 편의 서평을 본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 서평도 그런 취급을 받겠구나 하는 자괴감에 이거 더 읽어야 해, 말아야 해?’ 하기도 했다. 이 책의 초반부는 그 정도의 현타를 감수하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시길. 비행준비를 거쳐 이륙 초반을 지나면 이 비행飛行은 참으로 흥미진진해진다. 재밌다. 야간비행과 악천후 따위도 문제없다. “희망 같은 건 없는 좇같은 상황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는 경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야간비행><악천후> 꼭지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현실에 대한 염증을 더하기는커녕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다. 낭만주의의 엔진을 꺼보면 진짜 현실로 우리는 착륙한다.

 

이 책의 제목은 비행이지만 어쩌면 이건 메트로놈이다. 빠르기를 맞추기 위하여 피아노 위에서 연이어 손가락을 흔들던 그 놈.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즐긴다면 메트로놈 같은 건 불필요하다. 메트로놈은 나의 연주가 어느 정도 밸런스를 갖추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만 기능한다. 서평가는 그래서 독서 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될는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원고가 팔려야 원고를 쓰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책을 팔아야 원고를 사서 책을 만드는 사람도 계속 생긴다. 독서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소비하는 일과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일이 교차한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읽는 행위 자체에만 매진하는 독서가는 어쩌면 자기가 연주를 했다는 일에만 만족하는 연주가에 그칠 밖에. 소비자인 동시에 판매자였다가 이제는 생산자가 된 저자가 쓴 서평은 그런 면에서 메트로놈으로 기능한다. 책은 많이 팔릴수록 좋고, 어떤 출판사도 손해를 보거나 적자가 안 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나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말도 안 되는 책들을 팔거나 독자에게 권하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빠르지만 다정하고 위엄있게라든지 느리지만 경쾌하고 산뜻하게연주하라는 세상에 없을 밸런스를 요구하는 피아노 악보를 연주하는 일, 까다로운 세상 속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건 이런 것이다.

 

서평이라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기록은 메트로놈이 될 수 있겠지만 메트로놈이 필요치 않은, 독서 그 자체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상술한 움베르토 에코의 글처럼 우리가 제아무리 부지런히 독서를 한다고 해도 현실은 언제나 빡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을 놓쳐버리고 마는지. 저자 금정연은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한 선견자다. 설령 허점이 분명한 책, 참으로 읽기 난해한 책이더라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발견하여 일러준다. 저자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책을 알게 되는 기분 좋은 일이 바로 이런 서평을 읽을 때에 일어난다. 특히 이 선견자가 설탕을 입힌 것처럼 달콤한 일반론을 경계하는눈 밝은 독자라면 어찌 믿을만하지 아니한가. 독자에게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비지식인, 문명인이라는 흑백논리를 들이대거나, 자신의 화려한 문장이나 문체에 도취되거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는 등 별의별 서평이 온라인에 가득하다. 믿을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거나, 참고가 될 만한 서평문을 가르쳐달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한 권으로 대답이 되겠다.

 

 

p.s. 1)

원숭이와의 섹시 대결 : <모비 딕> 허먼 멜빌의 서평 ( 77)

책과 영화를 모두 좋아하는 저자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 책 중에서 최고로 웃겼던 글을 한 편 꼽자면 이것. 영화 <혹성탈출>을 본 여자친구가 섹시한 원숭이, 마초적인 킹콩에 대하여 던진 말들에서 털복숭이도 아니고, 우어어어하며 칠 갑빠도 변변치 않은데다 읽기와 쓰기라는 영 섹시하지 않은 취미와 생업을 가진 저자가 여성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도태되는 멸종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고군분투기를 쓴 내용이다. 자기 이름도 못 쓸게 분명한 털북숭이들에게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져서는 안 되는 현대 남성(적어도 글로 여자는 못 꼬셔도 독자는 꼬실 수 있는)으로서 대항할 수 있는 문학적 섹시함을 찾아 치열하게 책들을 뒤지다가 허먼 멜빌 찬가로 글을 끝내는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시길. 웬만한 코미디를 가뿐하게 이긴다, 이 글이.

 

p.s. 2)

* 책에 직결된 형태로서의 서평, 가장 보편적이고 참고할만한 형식으로서의 서평

나태해진 영혼에 죽비를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한겨레 출판 49

쉼표 하나만큼의 성장 <담배 한 개비의 시간> 문진영, 창비 137~

어른이 자라는 법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푸른숲 145~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페테르 샌디, 문학동네 159~

김훈은 김훈이다 <흑산> 김훈, 학고재 169~

 

* 북에세이라고 부를만한 서평: 에세이 읽는 재미와 책 소개 받는 재미 이렇게 일타쌍피네.

낭만도 서른도 모두 병이다 <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134~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리> 서효인, 다산책방 342~

 

p.s. 3) 저자 금정연은 좋은 서평의 기준은 어쨌든 좋은 글이어야 한다고 에필로그에 썼는데, 전지적 독자의 솔직한 마음으로서는, 책을 정성스럽게 읽고 공들여 솔직하게 썼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썼든 읽어볼만한 서평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 P3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인 장석주는 <은유의 힘>이라는 책에서,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소리들. 말이 소리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은 항상 무언가의 이름들로 온다.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점을 조형하고, 본질을 외시해내는 효과가 있다.’고 썼다. 보이지 않고 떠도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익명의 무형자를 기명의 명료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름이라면, 아룬다티 로이는 오늘날 인도에게 ‘안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도의 영혼에 [지복의 성자]라는 육체를 지어 입혔다.

 

 [지복의 성자]는 6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부커상 수상을 비롯하여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아룬다티 로이가 10년 동안 쓰고 201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를 주요 배경으로 두 주인공들의 서사를 정밀하게 엮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함께 지니고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택하지만 현실에서 비참한 생을 살다 묘지로 거처를 옮기는 안줌은 이 소설 전반부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건축학도로 자라지만 카슈미르에 부는 분쟁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그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 틸로는 후반부 서사의 축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델리와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몸, 지금 인도의 상태를 아주 면밀하게 해부한다. 인도의 뼈와 관절과 근육과 췌장과 폐, 간, 심장 따위의 장기와 그 모두를 연결하는 동맥과 실핏줄과 그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세포들과 피, 혐오와 선동의 핏방울들. 부패한 정치꾼과 비정한 자본주의자들이 흘려보내는 돈이라는 혈청, 그 혈청에 실려 온 몸속을, 온갖 작은 존재들의 사이와 내부를 독하게 파고드는 권력이라는 독. 천년고도인 델리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창녀가 되고, 오래된 계급(카스트)에 짓눌린 사람들은 미디어의 밥이 되거나, 미디어가 주는 밥을 먹으며 비참하게 연명한다. 카슈미르는 또 어떤가? 종교와 파벌 그리고 그 명백한 단층선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정부는 카슈미르의 젊은이들의 시체 위에 지옥을 지어놓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국인이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신음을, 아룬다티 로이는 철저하게 해체하여 수많은 피와 눈물로 조직된, 만신창이 인도의 육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꼭 보라고, 이것을 봐야 한다고. 

 


 

1. 절대 질서와 종교 분쟁 아래 땜질된 몸으로 살아가는 안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생식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내면에는 두 파벌의 싸움, 이 둘이 싸우는 듯 두 개의 목소리가 나는 안줌은 그 자체로 인도다.
 여성의 성기를 꿰맸다가 나중에 다시 풀고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안줌은 그와 같은 ‘히즈라(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성)’들의 공간인 콰브가에서 살았다. 콰브가는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나 그 기득권의 그늘에 기생하듯 살아가는 공간이다. 안줌은 땜질된 몸을 가지고 꿈은 일부만 실현된 상태로 콰브가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았다(책 47쪽). 살기 위해서 창녀가 되고 행복을 꿈꿨으나 쉽지 않았던 안줌의 운명은 수퍼 파워들의 국제사회 속에서 절대 권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인도가 걸어온 근현대사와 겹쳐 보인다. 안줌이 사상 최악의 종교 폭동인 ‘구자라트 폭동’을 당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 이유 역시 의미심장하다. 안줌을 살려두는 게 학살자들에게는 저주와 불운을 피하는 일이었기에, 안줌에게는 그녀 자신의 생존이 미칠 것 같은 치욕이요 수모였다. 이 치욕과 수모는 고스란히 자기 혐오(작품 속에서는 비탄)로 이어져 안줌은 트라우마의 구덩이에 빠진다. 그런 그녀에게 콰브가는 땜질된 몸과 구자라트 폭동의 트라우마로부터의 구원처가 아니었다.

 

여기서(콰브가)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중략)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책 39쪽, 님모의 말)

 

 아룬다티 로이는 히즈라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콰브가를 떠나는 안줌을 빗대어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진짜인가? 소외된 자들의 공동 거처였던 콰브가조차, 그곳에서 누린 잠시의 즐거움과 만족조차 안주할 수 없는 가짜임을 깨달은 안줌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콰브가를 떠나 묘지로 간다. 묘지는 음부, 죽은 것들이 모인다. 안줌이 누운 묘지는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계급과 종교와 성별의 잣대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이 모이는 묘지다. 기득권을 부리거나, 기득권에 편승하거나 기생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세상이 현실이라면 그곳은 초현실, 현실 밖, 언어 밖의 세계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긴 하키라트(현실)가 없어.”
책 117쪽

 

 안줌을 낳은 엄마는, 안줌에게 두 개의 성기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책 19쪽)’라고 자문한다. 언어의 세계는 오직 남성과 여성만이 있는 세계다. 계급과 종교, 성性이 초월될 수 없고 초월되어서도 안되며 그를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세계 곧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지어진다.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이곳에 앉아 있고, 정부는 이 철제 난간 사이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희망의 부스러기를 먹여줍니다. 살아가기엔 충분치 않지만 우리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론인을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정부가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중략)
 그들이 지어놓은 새 화장실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신사용과 숙녀용이 따로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 있는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책 179쪽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의 호소문 중에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통제를 당한다. 이 통제의 도구 역시 말, 언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들, 우리가 비통함을 잠시 해소할 수 있게 말하도록 해주는 그들, 우리의 말을 실어 나르고 또 그들의 말을 쏟아 부어 결국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 통제하는 그들. 땀과 피와 똥과 온갖 저주로 곤죽이 된 우리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이 비명마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돈은 세상의 공기, 돈은 정치라는 파장으로 세상을 잠식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치 그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라는 것처럼. 그러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목소리를 입을 수 없기에, 결국 이 소설은 정치적이어야 했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처절하고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고함을 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하여. 어떤 타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듣고 뼛속 깊이 응전하며 버텨온 인도의 공기란 이런 것이었으니.

 

 언어 밖의 세계로, 초현실의 그곳으로 안줌을 보낸 일 역시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3살 때에 사원에서 데려온 자이나브라는 딸이 있었음에도 안줌은 어떻게든 엄마가 되고자 했다. 여성의 생식기를 통하여 자신의 아이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줌은 결코 잉태도, 출산도 할 수 없었다. 제3의 성은 무성, 즉 불구다. 생식도, 번식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몸으로서는 다음 세대의 생존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생식을 초월하여 다음 세대로의 생명의 전이를 느끼게 한 건, 틸로 그리고 미스 제빈 2세와의 만남이었다.


 
2. 지지 않은 죄를 속죄하는 인도의 지식인, 틸로

 

 아룬다티 로이는 카슈미르의 비극적인 역사 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틸로와 세 남자의 관계를 수놓았다.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이슬람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무사, 인도 정보국의 고위 관료로서 카슈미르의 비극을 관망하는 비플랍, 비플랍과 정보를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자기 처지를 궁리하는 데에 몰입할 뿐인 나가, 이 세 인물을 연결하는 중심 인물인 틸로의 눈과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인권과 평화마저도 사업이 된, 카슈미르의 슬픔을 시처럼 읊조린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샛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책 355쪽

 

수십만 민중이 집에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의 분출조차도 전략적, 군사적 운영 계획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묘지로 행진할 것이었다.
 책 307쪽

 

 카슈미르가 오늘날의 분쟁의 도가니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충섬심이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민족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그들을 갈라지게 하고, 서로의 멱을 따게 하고, 슬픔이든 분노든 그들이 느끼고 표출하는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의 먹이가 되게 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야심이 그 먹이를 갉아먹고 증식한다는 사실이, 이 비통하고 한스런 일들이 저자의 은유가 가득한 문장으로 시처럼 펼쳐진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그래서 독자는 곧장, 이 카슈미르의 현실을 통하여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증식하고 있는 또 다른 카슈미르 내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정하고 비열하고 비겁한 인물들에 대한 경계와 분노를 끓어 올려 저들의 쌍둥이, 내 현실의 존재들에게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 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유감스럽게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극이 없는 인간이라 거래할 상품이 없다. 나는 상류계급, 어느 모로 보나 상류계급의 압제자다.
 그 사실을 위해 축배를 들자.


책 259쪽 비플랍의 독백 중에서

 

 

 비극이 없는 인간, 거래할 상품이 없는 상류계급은 절대로, 절대로 그들의 전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 국가와 민족, 신념과 종교, 신을 위한 투쟁이라는 편가르기를 조장하며 그 단층선 사이로 칼집을 넣어 육체가 난도질당하게 내버려두고 그 피로 자신들의 생애를 존속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목소리를 잃은 채로, 산채로 회가 떠지는 생선처럼 도마 위에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할 것인가? 수상가옥에서 무사와 헤어진 후, 아무런 목적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이한 사진을 찍으며 기이하게 위험한 기록물을 축적하는 틸로는 그런 독자에게 힌트를 준다.  


 안줌이 인도를 상징한다면, 틸로는 저자의 분신으로 읽힌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카슈미르로 돌아와 여행을 한 건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책 359쪽)’는 틸로의 모습에서 저자가 왜 이 소설을 10년에 걸쳐 쓰고 기어코 완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저자는 그녀가 작가이거나 활동가이기 때문에 부패한 정치와 무자비한 자본주의,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고,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비린내가 걷히지 않은 인도의 시간 속에서, 지식인으로 교육 받고 살아온 저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르포를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소설을 발표한다.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운명에 가닿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이 거대한 전쟁을, 폭동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이 안줌 내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틸로의 목숨을 위협했던 부패한 정권의 위력을, 지금도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있는 카슈미르의 공기총을 막을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그것은 막는 게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 분쟁과 전쟁은 결국 붕괴하거나 자멸하는 것이며 버려진 자들, 언어 밖에 있는 자들, 죽은 자들로부터 불구의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게 되리라는, 그녀만의 희망을 예언한다. 바로 미스 제빈 2세를 통하여.


 

3. 음부의 낙원, 잔나트. 낙원의 아이, 미스 제빈 2세

 

 왜 묘지였을까?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도 한참이나 ‘잔나트’의 이미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카슈미르인들처럼, 묘지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안줌과 그녀가 건설한 잔나트를 보여준 아룬다티의 마지막 목소리는 뜻밖에 ‘호소’였다.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절반을 지나가도록 두 주인공인 안줌과 틸로는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다. 틸로가 미스 제빈 2세를 데리고 잔나트로 오기 전까지, 안줌과 틸로가 같은 공간에 모이는 건 딱 한 차례였다. 바로 미스 제빈 2세가 나타난 그곳에서.
 미스 제빈 2세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 투사들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들이 모이는 곳(책 162쪽)’에서 나타났다.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듣고 있을 거라는 믿음.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책 168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현했다. 안줌은 이렇게 나타난 미스 제빈 2세를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나섰고 그녀가 아가를 데려가는 걸 막는 자와 싸우다 소동이 났다. 틸로는 그 소동을 틈타 아가를 데려와 미스 제빈 2세라고 부른다.

 

 아가를 데려와 보호하고 사랑을 주는 틸로의 선택은 얼핏 기이하다. 그녀는 무사와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하자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게 자신의 복제물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책 515쪽)’는 이유로 낙태를 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미스 제빈 2세를 안고 모성애를 느낀다.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을 존재, 그런 확신이 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류. 바로 이 존재가 이 소설이 노래하는 희망이다.

 

 

 

 아기는 돌아온 미스 제빈이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게 아니라 세상을 돌아온. 미스 제빈 2. 그녀는 어른이 되면 셈을 치르고 빚을 갚을 터였다. 형세를 뒤집을 터였다.

 

288쪽 

 

 

 압도적인 우둔화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인도. 이 우둔화는 말로, 언어로 진행되고 그래서 안줌은 언어 밖의 세계에, 음부에, 묘지에 잔나트를 세우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몸은 이대로는 더 이상 생식할 수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안줌처럼, 후대에게 운명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낙태하는 틸로처럼 불구의 몸이다. 이대로 인도에게 희망이 있을까? 이제 인도는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의 무엇이 죽어야 하며, 그 죽음 후에는 무엇이 살게 되는지. 계급으로서의 인도, 종교로서의 인도, 성별로서의 인도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미래는 무엇인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 희망에 대한 작가의 염원이 미스 제닌 2세에게 실려 있다. 불구가 된 인도의 몸, 그 음부 잔나트라는 낙원에서 엄마가 될 수 없는 안줌과 엄마이기를 거부하는 틸로는 미스 제닌 2세를 키운다.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그곳에 새 생명이 깃든 일이다. 잔나트의 구성원들이 미스 제닌 2세를 촘촘하게 둘러싸는 소설의 결말에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작품 [지복의 성자]는 불구가 된 인도를 낱낱이 해부하고 해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는 초인의 노래다. 이전과 같지 않은 신인류, 고통에 밀려 언어 밖으로 추락한 진정한 미래, 신기루를 불러내는 아룬다티 로이. 이것이 소설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는다.

 


4. 2020 한국, 우리는 신인류가 될 수 있을까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간 행위 원리 중 하나로 ‘공감’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감정은 사회성과 합리성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는 공감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이 공감대를 느끼는 것을 아담 스미스는 인간성이라고 보았다. 아담 스미스의 시민사회 분석은 현대의 시민사회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타당성과 필요성과 연결된다. 소설이 선사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공감을 부른다. 이 문학적 상상력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과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우리 각자가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소설로부터 얻은 공감을 현실에 적용하여 체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책 90쪽)
 
 “다들 구경만 했어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중략) 난 아버지를 죽인 폭도의 일부였어요.” 사담이 말했다.
 웅성거리는 벽과 은밀한 지하 감옥이 있는 안줌의 비탄의 요새가 다시 그녀를 둘러싸고 솟아오르려 했다. (책 124쪽)

 

 

 

아룬다티 로이가 묘사하여 건네준 건 인도의 얼굴이나 거기에 한국의 현재가 비친다. 나와 정치적, 사상적 뜻이 다르면 원색적인 욕을 퍼부어도 마땅하고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이라는 말이 대기에 넓게 퍼져 있고 특정 종교단체가 기이할 정도로 미디어의 집중포화를 맞고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인도의 거기, 델리, 카슈미르, 구자라트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한다. 칼부림만 없을 뿐, 영혼들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지복의 성자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언어 밖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을까? 언어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들의 성지, 내가 지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는 이들의 시원, 편견과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이 같은 걸음으로 귀결하는 낙원으로 우리는 과연 다다를 수 있을까? TV와 온갖 미디어들이 합세하여 전염병처럼 혐오와 야만을 도처에서 증식시키며 우리를 갈라놓는 데, 우리가 과연 무얼 할 수 있냔 말이야.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책 487쪽 무사의 말 중에서

 

 

 인도의 계급과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우둔화’는 현재 이곳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한국을 제대로 보는 것. 자신을 향한 모욕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음에 영혼이 병들어 버린 안줌처럼, 아버지가 몰매를 맞는 동안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사담처럼, 우리 사회의 진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비탄-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보아야 할 때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때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이 비탄의 요새는 안줌과 사담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가둘 것이다.

 누군가는 목청에 날을 세운다. 이 피해에 대하여,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이 탓을 짊어져야 한다고.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비극에 대한 본질적이고 엄정한 대답이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책 428쪽

 

 

 우리 자신이 발견하고 목도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된다. 우리는 저항하고 비판해야 한다.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우리를 비탄의 요새나 폭동의 구름 속에 가두어두려는 우둔화에 대하여,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척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디어에 대하여, 우리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모든 것을 갉아 먹는 정치꾼들에 대하여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서로를 만나면서, 지금까지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밖의 세계로 함께 나갈 때에 여기 한국에서도 미스 제빈 2세들이 나타나리라.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 P4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