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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평점 :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을 읽은 듯이 만드는 서평이 있고, 그 책이 왜 팔리는지 알게 만드는 서평이 있다. 이 서평들은 모두 책으로부터 내용을 길어와 책에 직결된 형태로 쓴 서평이다. 한 권의 책을 주인공으로 두고 관련한 다른 책들을 조연들로 등장시키는 형태도 있고, 두 권의 책을 대조하여 쓴 서평도 있다. 한편 책으로부터 내용이 아니라 영감을 길어와 쓴 서평도 있다. 책을 소개하거나 책 내용을 간추리거나 책의 특징과 의미를 설계하는 대신 에세이를 지어놓은 형태가 이런 서평이다.
이 책 [서서비행] 한 권에는 이 모든 종류의 서평이 다 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중략) 평균 4일이 걸린다고 하자. 그렇다면 [봄피아니 작품 사전]에 실린 모든 작품에다 4일을 곱하면 65,400일이 된다. 365일로 나누면 거의 180년이 된다. 이런 계산은 틀림없다. 그 누구도 중요한 작품을 모두 읽을 수는 없다.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31쪽
표지에 대놓고 매문기賣文記라고 적힌 이 책은 금정연 저자가 쓴 서평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수많은 서평문 사이에 틈틈이) ‘왜 서평을 읽냐?’를 물어보는데, 움베르토 에코가 이미 답을 했다. 사람이 살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의 한계, 독서가능영역의 국경선 위로 가뿐히 날아오르고 싶으니까 [서서비행] 같은 서평모음집에 몸을 맡기기 마련이다.
[서서비행]의 저자 금정연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하다 현재는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중이다. 이 책은 책을 팔다가 글을 팔게 된 저자가 서평문을 기고하면서 느낀 ‘독서의 기쁨과 슬픔’이다. 저자에게 독서는 오롯하게 취미, 재미, 의미의 온실 속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왜냐면 책 읽은 소감을, 책에 대한 소개를, 책 읽기를 추천하는 바를 글로 써서 팔아야 하거든. ‘먹고 사는 게 다 뭔지‘ 싶다가도 ’먹고 사는 게 전부지, 뭐‘하고 마무리하게 되는 세상살이가 읽기와 쓰기를 생계 수단으로 삼게 되면 어떤 의식의 흐름을 보이는지 이 책이 잘 보여준다. 시종일관 마감과 생계의 족쇄를 여과 없이 보여주며, 그 무겁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 두드리는 실로폰 놀이라도 하듯 쓴 서평이 이어진다.
사실, 초반부에 저자가 온라인 서점 MD로 일할 때의 경험들, 구체적으로 병아리 고르듯이 무감하게 수십 편의 서평을 본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내 서평도 그런 취급을 받겠구나 하는 자괴감에 ‘이거 더 읽어야 해, 말아야 해?’ 하기도 했다. 이 책의 초반부는 그 정도의 현타를 감수하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시길. 비행준비를 거쳐 이륙 초반을 지나면 이 비행飛行은 참으로 흥미진진해진다. 재밌다. 야간비행과 악천후 따위도 문제없다. “희망 같은 건 없는 좇같은 상황”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딱 맞는 경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야간비행>과 <악천후> 꼭지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현실에 대한 염증을 더하기는커녕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다. 낭만주의의 엔진을 꺼보면 진짜 현실로 우리는 착륙한다.
이 책의 제목은 비행이지만 어쩌면 이건 메트로놈이다. 빠르기를 맞추기 위하여 피아노 위에서 연이어 손가락을 흔들던 그 놈.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즐긴다면 메트로놈 같은 건 불필요하다. 메트로놈은 나의 연주가 어느 정도 밸런스를 갖추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만 기능한다. 서평가는 그래서 독서 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될는지 모른다. 우리 시대에 ‘책’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원고가 팔려야 원고를 쓰는 사람이 계속 생기고, 책을 팔아야 원고를 사서 책을 만드는 사람도 계속 생긴다. 독서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소비하는 일과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일이 교차한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읽는 행위 자체에만 매진하는 독서가는 어쩌면 자기가 연주를 했다는 일에만 만족하는 연주가에 그칠 밖에. 소비자인 동시에 판매자였다가 이제는 생산자가 된 저자가 쓴 서평은 그런 면에서 메트로놈으로 기능한다. 책은 많이 팔릴수록 좋고, 어떤 출판사도 손해를 보거나 적자가 안 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나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말도 안 되는 책들을 팔거나 독자에게 권하는 건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빠르지만 다정하고 위엄있게’ 라든지 ‘느리지만 경쾌하고 산뜻하게’ 연주하라는 세상에 없을 밸런스를 요구하는 피아노 악보를 연주하는 일, 까다로운 세상 속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건 이런 것이다.
서평이라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기록은 메트로놈이 될 수 있겠지만 메트로놈이 필요치 않은, 독서 그 자체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상술한 움베르토 에코의 글처럼 우리가 제아무리 부지런히 독서를 한다고 해도 현실은 언제나 빡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을 놓쳐버리고 마는지. 저자 금정연은 눈 밝은 독자들을 위한 선견자다. 설령 허점이 분명한 책, 참으로 읽기 난해한 책이더라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발견하여 일러준다. 저자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책을 알게 되는 기분 좋은 일이 바로 이런 서평을 읽을 때에 일어난다. 특히 이 선견자가 ‘설탕을 입힌 것처럼 달콤한 일반론을 경계하는’ 눈 밝은 독자라면 어찌 믿을만하지 아니한가. 독자에게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비非지식인, 비非문명인이라는 흑백논리를 들이대거나, 자신의 화려한 문장이나 문체에 도취되거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는 등 별의별 서평이 온라인에 가득하다. 믿을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거나, 참고가 될 만한 서평문을 가르쳐달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한 권으로 대답이 되겠다.
p.s. 1)
원숭이와의 섹시 대결 : <모비 딕> 허먼 멜빌의 서평 ( 77쪽)
책과 영화를 모두 좋아하는 저자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 책 중에서 최고로 웃겼던 글을 한 편 꼽자면 이것. 영화 <혹성탈출>을 본 여자친구가 섹시한 원숭이, 마초적인 킹콩에 대하여 던진 말들에서 털복숭이도 아니고, 우어어어하며 칠 갑빠도 변변치 않은데다 읽기와 쓰기라는 영 섹시하지 않은 취미와 생업을 가진 저자가 여성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도태되는 멸종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고군분투기를 쓴 내용이다. 자기 이름도 못 쓸게 분명한 털북숭이들에게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져서는 안 되는 현대 남성(적어도 글로 여자는 못 꼬셔도 독자는 꼬실 수 있는)으로서 대항할 수 있는 문학적 섹시함을 찾아 치열하게 책들을 뒤지다가 허먼 멜빌 찬가로 글을 끝내는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시길. 웬만한 코미디를 가뿐하게 이긴다, 이 글이.
p.s. 2)
* 책에 직결된 형태로서의 서평, 가장 보편적이고 참고할만한 형식으로서의 서평
나태해진 영혼에 죽비를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한겨레 출판 49쪽
쉼표 하나만큼의 성장 <담배 한 개비의 시간> 문진영, 창비 137쪽~
어른이 자라는 법 <마르크스 평전> 프랜시스 윈, 푸른숲 145쪽~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페테르 샌디, 문학동네 159쪽~
김훈은 김훈이다 <흑산> 김훈, 학고재 169쪽 ~
* 북에세이라고 부를만한 서평: 에세이 읽는 재미와 책 소개 받는 재미 이렇게 일타쌍피네.
낭만도 서른도 모두 병이다 <빵 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134쪽~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리> 서효인, 다산책방 342쪽~
p.s. 3) 저자 금정연은 좋은 서평의 기준은 어쨌든 좋은 글이어야 한다고 에필로그에 썼는데, 전지적 독자의 솔직한 마음으로서는, 책을 정성스럽게 읽고 공들여 솔직하게 썼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썼든 읽어볼만한 서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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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꼭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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