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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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중반 흑사병이라 불리던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거시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미시적 관점, 즉 역사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결정권을 지닌 정치가들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뜻밖에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거물급 정치가 한 사람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없었다면 20세기의 유럽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미하일 고르바초브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냉전 시대가 평화롭게 종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 8쪽 – 프롤로그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의 여파로 나라가 멈춘 지 3주째에 접어들었다. 교육계는 3월 23일로 연기했던 개학 일자를 다시 한 번 연기해야 하는지를 긴급히 논의 중에 있고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 (주로 문화, 예술 목적의) 공기관들은 언제 다시 문을 열지 아무도 모른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도 마스크를 사기 위하여 약국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인파로부터 ‘저기에도 나 같이’ 이 전염병의 충격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연대감을 간신히 확인할 뿐이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 읽은, 전염병이 도는 유럽의 중세에 와 있는 것 같은 공포는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적절한 주제와 내용을 가지고 신간이 나오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폈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로날트 게르슈테 저자가 2019년에 출간한 책이다. 코로나19의 사태를 통하여 뼈저리게 배우고 있는 사실이란, 전염병은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바꾸는 동시에 전 국가, 세계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페스트나 매독 등의 전염병이 지나간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파괴력을 발휘했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전염병의 영향을 받은 사회와 국가라는 거시적 관점과 더불어 지구촌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관여한 질병의 영향을 탐구하는 미시적 관점을 더하여 이 책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를 집필했다.

 

 스스로를 글쟁이 의학자이자 수다쟁이 역사학자인 저자가 쓴 책인 덕분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학과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케네디가 호르몬 문제로 불안정했다든가 슈베르트는 매독 환자였고 하이네와 바흐는 돌팔이 의사에게 불법 안과 수술을 받은 후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아는 역사 덕후라면 이 책이 전혀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역사의 비밀 이야기를 읽는 듯한 신선함으로 이 책이 다가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26개의 꼭지로 구성된 이 책은 크게 페스트, 매독, 천연두, 통풍, 독감 등 국경을 초월하여 몇 세기 동안 인류를 괴롭힌 전염병을 주제로 한 내용과 아돌프 히틀러, 조지 워싱턴, 스탈린과 닉슨, 바흐 등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만든 주요 인물들이 앓고 있던 질병을 주제로 한 내용, 두 가지로 나뉜다. 26개의 꼭지가 개별 에피소드 형식이라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책의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프랑스아 미테랑 등 현재의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가 주로 등장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특히 추천한다. ‘집콕독서‘가 유행하는 이때를 함께 보낼 책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펜데믹이 선포된 지금, 시류에 편승하는 책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세 번째 꼭지인 <페스트>만 읽어봐도 질병과 역사의 상관관계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안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전염병이나 질병이 무조건 나쁘다, 악영향을 주어 극심한 피해만 입혔다’라는 1차원적인 시각에서 탈피한다. 질병과 인류의 역사를 서술하는 대신, 병이 남긴 호재나 좋은 영향까지도 탐색하고 몸의 질병으로 인해 드러나는 사람들 정신 속의 병까지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훗날 매독이라고 불리게 된 이 질병은 당시 교통수단이 이동하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나아가 당시 진군하는 군대의 속도와 유사한 속도로 퍼졌다. 이번 질병 전파의 주역은 샤를 8세의 군대였다. 프랑스에서는 해당 질병을 ‘나폴리 질병’이라 불렀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는 나폴리가 매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독일어권 국가, 나아가 영국에서는 그 질병을 ‘프랑스 질병’이라 불렀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질병’이라 부렀고,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이라 불렀다. 그 이름들을 보면 매독의 진행 경로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책 67쪽

 

흑사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희생양 찾기에 나섰고, 그런가 하면 세상이 저지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채찍질하는, 이른바 ‘고행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중세는 종교의 힘이 강해 페스트가 진노한 신이 세상에 내리는 벌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을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광신도들의 목표가 된 이들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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