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시인 장석주는 <은유의 힘>이라는 책에서, ‘의미를 맺지 못한 채 떠도는 소리들. 말이 소리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올 때 그것은 항상 무언가의 이름들로 온다. 이름은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이점을 조형하고, 본질을 외시해내는 효과가 있다.’고 썼다. 보이지 않고 떠도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익명의 무형자를 기명의 명료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름이라면, 아룬다티 로이는 오늘날 인도에게 ‘안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도의 영혼에 [지복의 성자]라는 육체를 지어 입혔다.
[지복의 성자]는 6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다. [작은 것들의 신]을 쓰고 부커상 수상을 비롯하여 세계 문학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아룬다티 로이가 10년 동안 쓰고 201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인도 델리와 카슈미르를 주요 배경으로 두 주인공들의 서사를 정밀하게 엮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함께 지니고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택하지만 현실에서 비참한 생을 살다 묘지로 거처를 옮기는 안줌은 이 소설 전반부의,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건축학도로 자라지만 카슈미르에 부는 분쟁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그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 틸로는 후반부 서사의 축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델리와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인도의 몸, 지금 인도의 상태를 아주 면밀하게 해부한다. 인도의 뼈와 관절과 근육과 췌장과 폐, 간, 심장 따위의 장기와 그 모두를 연결하는 동맥과 실핏줄과 그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세포들과 피, 혐오와 선동의 핏방울들. 부패한 정치꾼과 비정한 자본주의자들이 흘려보내는 돈이라는 혈청, 그 혈청에 실려 온 몸속을, 온갖 작은 존재들의 사이와 내부를 독하게 파고드는 권력이라는 독. 천년고도인 델리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창녀가 되고, 오래된 계급(카스트)에 짓눌린 사람들은 미디어의 밥이 되거나, 미디어가 주는 밥을 먹으며 비참하게 연명한다. 카슈미르는 또 어떤가? 종교와 파벌 그리고 그 명백한 단층선을 악랄하게 이용하는 정부는 카슈미르의 젊은이들의 시체 위에 지옥을 지어놓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국인이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신음을, 아룬다티 로이는 철저하게 해체하여 수많은 피와 눈물로 조직된, 만신창이 인도의 육체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꼭 보라고, 이것을 봐야 한다고.
1. 절대 질서와 종교 분쟁 아래 땜질된 몸으로 살아가는 안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생식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내면에는 두 파벌의 싸움, 이 둘이 싸우는 듯 두 개의 목소리가 나는 안줌은 그 자체로 인도다.
여성의 성기를 꿰맸다가 나중에 다시 풀고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안줌은 그와 같은 ‘히즈라(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성)’들의 공간인 콰브가에서 살았다. 콰브가는 기득권들의 질서, 상식, 규범, 문화와 관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나 그 기득권의 그늘에 기생하듯 살아가는 공간이다. 안줌은 땜질된 몸을 가지고 꿈은 일부만 실현된 상태로 콰브가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았다(책 47쪽). 살기 위해서 창녀가 되고 행복을 꿈꿨으나 쉽지 않았던 안줌의 운명은 수퍼 파워들의 국제사회 속에서 절대 권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인도가 걸어온 근현대사와 겹쳐 보인다. 안줌이 사상 최악의 종교 폭동인 ‘구자라트 폭동’을 당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 이유 역시 의미심장하다. 안줌을 살려두는 게 학살자들에게는 저주와 불운을 피하는 일이었기에, 안줌에게는 그녀 자신의 생존이 미칠 것 같은 치욕이요 수모였다. 이 치욕과 수모는 고스란히 자기 혐오(작품 속에서는 비탄)로 이어져 안줌은 트라우마의 구덩이에 빠진다. 그런 그녀에게 콰브가는 땜질된 몸과 구자라트 폭동의 트라우마로부터의 구원처가 아니었다.
여기서(콰브가)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중략)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책 39쪽, 님모의 말)
아룬다티 로이는 히즈라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콰브가를 떠나는 안줌을 빗대어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은 진짜인가? 소외된 자들의 공동 거처였던 콰브가조차, 그곳에서 누린 잠시의 즐거움과 만족조차 안주할 수 없는 가짜임을 깨달은 안줌은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콰브가를 떠나 묘지로 간다. 묘지는 음부, 죽은 것들이 모인다. 안줌이 누운 묘지는 그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계급과 종교와 성별의 잣대에 의하여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이 모이는 묘지다. 기득권을 부리거나, 기득권에 편승하거나 기생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세상이 현실이라면 그곳은 초현실, 현실 밖, 언어 밖의 세계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긴 하키라트(현실)가 없어.”
책 117쪽
안줌을 낳은 엄마는, 안줌에게 두 개의 성기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책 19쪽)’라고 자문한다. 언어의 세계는 오직 남성과 여성만이 있는 세계다. 계급과 종교, 성性이 초월될 수 없고 초월되어서도 안되며 그를 초월한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세계 곧 현실이다. 우리의 현실은 언어로 지어진다. 언어로 말해지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해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이곳에 앉아 있고, 정부는 이 철제 난간 사이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희망의 부스러기를 먹여줍니다. 살아가기엔 충분치 않지만 우리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론인을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짐이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정부가 우리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중략)
그들이 지어놓은 새 화장실이 보이십니까? 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신사용과 숙녀용이 따로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거기 있는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책 179쪽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의 호소문 중에서)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통제를 당한다. 이 통제의 도구 역시 말, 언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들, 우리가 비통함을 잠시 해소할 수 있게 말하도록 해주는 그들, 우리의 말을 실어 나르고 또 그들의 말을 쏟아 부어 결국 우리의 생각과 의식까지 통제하는 그들. 땀과 피와 똥과 온갖 저주로 곤죽이 된 우리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다. 두려운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이 비명마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돈은 세상의 공기, 돈은 정치라는 파장으로 세상을 잠식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치 그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라는 것처럼. 그러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목소리를 입을 수 없기에, 결국 이 소설은 정치적이어야 했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처절하고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고함을 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하여. 어떤 타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고 듣고 뼛속 깊이 응전하며 버텨온 인도의 공기란 이런 것이었으니.
언어 밖의 세계로, 초현실의 그곳으로 안줌을 보낸 일 역시 작가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3살 때에 사원에서 데려온 자이나브라는 딸이 있었음에도 안줌은 어떻게든 엄마가 되고자 했다. 여성의 생식기를 통하여 자신의 아이를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안줌은 결코 잉태도, 출산도 할 수 없었다. 제3의 성은 무성, 즉 불구다. 생식도, 번식도 할 수 없는 그녀의 몸으로서는 다음 세대의 생존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생식을 초월하여 다음 세대로의 생명의 전이를 느끼게 한 건, 틸로 그리고 미스 제빈 2세와의 만남이었다.
2. 지지 않은 죄를 속죄하는 인도의 지식인, 틸로
아룬다티 로이는 카슈미르의 비극적인 역사 위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틸로와 세 남자의 관계를 수놓았다.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이슬람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무사, 인도 정보국의 고위 관료로서 카슈미르의 비극을 관망하는 비플랍, 비플랍과 정보를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자기 처지를 궁리하는 데에 몰입할 뿐인 나가, 이 세 인물을 연결하는 중심 인물인 틸로의 눈과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인권과 평화마저도 사업이 된, 카슈미르의 슬픔을 시처럼 읊조린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검은 마차 셋, 흰 수레 샛
우리를 한데 모으는 것은 우리를 갈라놓는 것.
떠나간 우리 형제, 떠나간 우리 사랑.
그는 누구를 애도하고 있었을까? 틸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한 세대 전체일지도.
책 355쪽
수십만 민중이 집에서 쏟아져 나와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의 분출조차도 전략적, 군사적 운영 계획의 일부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묘지로 행진할 것이었다.
책 307쪽
카슈미르가 오늘날의 분쟁의 도가니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충섬심이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민족과 그들의 역사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그들을 갈라지게 하고, 서로의 멱을 따게 하고, 슬픔이든 분노든 그들이 느끼고 표출하는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의 먹이가 되게 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야심이 그 먹이를 갉아먹고 증식한다는 사실이, 이 비통하고 한스런 일들이 저자의 은유가 가득한 문장으로 시처럼 펼쳐진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그래서 독자는 곧장, 이 카슈미르의 현실을 통하여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증식하고 있는 또 다른 카슈미르 내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정하고 비열하고 비겁한 인물들에 대한 경계와 분노를 끓어 올려 저들의 쌍둥이, 내 현실의 존재들에게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 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유감스럽게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비극이 없는 인간이라 거래할 상품이 없다. 나는 상류계급, 어느 모로 보나 상류계급의 압제자다.
그 사실을 위해 축배를 들자.
책 259쪽 비플랍의 독백 중에서
비극이 없는 인간, 거래할 상품이 없는 상류계급은 절대로, 절대로 그들의 전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 국가와 민족, 신념과 종교, 신을 위한 투쟁이라는 편가르기를 조장하며 그 단층선 사이로 칼집을 넣어 육체가 난도질당하게 내버려두고 그 피로 자신들의 생애를 존속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목소리를 잃은 채로, 산채로 회가 떠지는 생선처럼 도마 위에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할 것인가? 수상가옥에서 무사와 헤어진 후, 아무런 목적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이한 사진을 찍으며 기이하게 위험한 기록물을 축적하는 틸로는 그런 독자에게 힌트를 준다.
안줌이 인도를 상징한다면, 틸로는 저자의 분신으로 읽힌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카슈미르로 돌아와 여행을 한 건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책 359쪽)’는 틸로의 모습에서 저자가 왜 이 소설을 10년에 걸쳐 쓰고 기어코 완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저자는 그녀가 작가이거나 활동가이기 때문에 부패한 정치와 무자비한 자본주의, 환경 파괴와 인권 유린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고,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비린내가 걷히지 않은 인도의 시간 속에서, 지식인으로 교육 받고 살아온 저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르포를 쓰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소설을 발표한다.
개인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운명에 가닿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물며 이 거대한 전쟁을, 폭동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이 안줌 내부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틸로의 목숨을 위협했던 부패한 정권의 위력을, 지금도 많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있는 카슈미르의 공기총을 막을 수 있을까? [지복의 성자]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그것은 막는 게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 분쟁과 전쟁은 결국 붕괴하거나 자멸하는 것이며 버려진 자들, 언어 밖에 있는 자들, 죽은 자들로부터 불구의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하게 되리라는, 그녀만의 희망을 예언한다. 바로 미스 제빈 2세를 통하여.
3. 음부의 낙원, 잔나트. 낙원의 아이, 미스 제빈 2세
왜 묘지였을까?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서도 한참이나 ‘잔나트’의 이미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카슈미르인들처럼, 묘지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안줌과 그녀가 건설한 잔나트를 보여준 아룬다티의 마지막 목소리는 뜻밖에 ‘호소’였다.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 절반을 지나가도록 두 주인공인 안줌과 틸로는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다. 틸로가 미스 제빈 2세를 데리고 잔나트로 오기 전까지, 안줌과 틸로가 같은 공간에 모이는 건 딱 한 차례였다. 바로 미스 제빈 2세가 나타난 그곳에서.
미스 제빈 2세는 ‘정의를 위한 싸움, 악에 대항하는 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 투사들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이들이 모이는 곳(책 162쪽)’에서 나타났다.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누군가는 듣고 있을 거라는 믿음.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책 168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현했다. 안줌은 이렇게 나타난 미스 제빈 2세를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나섰고 그녀가 아가를 데려가는 걸 막는 자와 싸우다 소동이 났다. 틸로는 그 소동을 틈타 아가를 데려와 미스 제빈 2세라고 부른다.
아가를 데려와 보호하고 사랑을 주는 틸로의 선택은 얼핏 기이하다. 그녀는 무사와의 하룻밤으로 임신을 하자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게 자신의 복제물이라는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책 515쪽)’는 이유로 낙태를 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기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미스 제빈 2세를 안고 모성애를 느낀다. 자기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을 존재, 그런 확신이 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인류. 바로 이 존재가 이 소설이 노래하는 희망이다.
아기는 돌아온 미스 제빈이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게 아니라 세상을 돌아온. 미스 제빈 2세. 그녀는 어른이 되면 셈을 치르고 빚을 갚을 터였다. 형세를 뒤집을 터였다.
책 288쪽
압도적인 우둔화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인도. 이 우둔화는 말로, 언어로 진행되고 그래서 안줌은 언어 밖의 세계에, 음부에, 묘지에 잔나트를 세우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몸은 이대로는 더 이상 생식할 수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안줌처럼, 후대에게 운명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 낙태하는 틸로처럼 불구의 몸이다. 이대로 인도에게 희망이 있을까? 이제 인도는 어디로 가야 할지, 인도의 무엇이 죽어야 하며, 그 죽음 후에는 무엇이 살게 되는지. 계급으로서의 인도, 종교로서의 인도, 성별로서의 인도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미래는 무엇인지, 그 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 희망에 대한 작가의 염원이 미스 제닌 2세에게 실려 있다. 불구가 된 인도의 몸, 그 음부 잔나트라는 낙원에서 엄마가 될 수 없는 안줌과 엄마이기를 거부하는 틸로는 미스 제닌 2세를 키운다.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그곳에 새 생명이 깃든 일이다. 잔나트의 구성원들이 미스 제닌 2세를 촘촘하게 둘러싸는 소설의 결말에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작품 [지복의 성자]는 불구가 된 인도를 낱낱이 해부하고 해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만신창이가 된 육체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는 초인의 노래다. 이전과 같지 않은 신인류, 고통에 밀려 언어 밖으로 추락한 진정한 미래, 신기루를 불러내는 아룬다티 로이. 이것이 소설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는다.
4. 2020 한국, 우리는 신인류가 될 수 있을까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간 행위 원리 중 하나로 ‘공감’을 제시했다. 누군가의 감정은 사회성과 합리성을 획득하면 보이지 않는 공감의 힘을 발휘하게 되고, 이 공감대를 느끼는 것을 아담 스미스는 인간성이라고 보았다. 아담 스미스의 시민사회 분석은 현대의 시민사회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타당성과 필요성과 연결된다. 소설이 선사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공감을 부른다. 이 문학적 상상력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과 정서적 관계를 맺게 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우리 각자가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한다(<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소설로부터 얻은 공감을 현실에 적용하여 체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책 90쪽)
“다들 구경만 했어요.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중략) 난 아버지를 죽인 폭도의 일부였어요.” 사담이 말했다.
웅성거리는 벽과 은밀한 지하 감옥이 있는 안줌의 비탄의 요새가 다시 그녀를 둘러싸고 솟아오르려 했다. (책 124쪽)
아룬다티 로이가 묘사하여 건네준 건 인도의 얼굴이나 거기에 한국의 현재가 비친다. 나와 정치적, 사상적 뜻이 다르면 원색적인 욕을 퍼부어도 마땅하고 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이라는 말이 대기에 넓게 퍼져 있고 특정 종교단체가 기이할 정도로 미디어의 집중포화를 맞고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인도의 거기, 델리, 카슈미르, 구자라트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한다. 칼부림만 없을 뿐, 영혼들이 흘린 피가 낭자하다. 지복의 성자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언어 밖의 세계로 탈출할 수 있을까? 언어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들의 성지, 내가 지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는 이들의 시원, 편견과 역사가 미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이 같은 걸음으로 귀결하는 낙원으로 우리는 과연 다다를 수 있을까? TV와 온갖 미디어들이 합세하여 전염병처럼 혐오와 야만을 도처에서 증식시키며 우리를 갈라놓는 데, 우리가 과연 무얼 할 수 있냔 말이야.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뭔지 알아? 가장 싸우기 힘든 상대가? 연민이야. 우린 자기 연민에 빠지기가 너무 쉽지... 우리의 사람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집집마다 끔찍한 일을 당했어.. 하지만 자기 연민은 너무도... 너무도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어. 너무 굴욕적이고.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은 맞서 싸우는 것뿐이야.”
책 487쪽 무사의 말 중에서
인도의 계급과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았던 ‘우둔화’는 현재 이곳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에 비쳐 보이는 지금의 한국을 제대로 보는 것. 자신을 향한 모욕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음에 영혼이 병들어 버린 안줌처럼, 아버지가 몰매를 맞는 동안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사담처럼, 우리 사회의 진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비탄-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보아야 할 때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때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이 비탄의 요새는 안줌과 사담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가둘 것이다.
누군가는 목청에 날을 세운다. 이 피해에 대하여, 비극에 대하여 책임지고 이 탓을 짊어져야 한다고.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비극에 대한 본질적이고 엄정한 대답이다.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책 428쪽
우리 자신이 발견하고 목도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된다. 우리는 저항하고 비판해야 한다. 무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우리를 비탄의 요새나 폭동의 구름 속에 가두어두려는 우둔화에 대하여,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척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미디어에 대하여, 우리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모든 것을 갉아 먹는 정치꾼들에 대하여 의심해야 한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서로를 만나면서, 지금까지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 밖의 세계로 함께 나갈 때에 여기 한국에서도 미스 제빈 2세들이 나타나리라.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 P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