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간학 - 약함, 비열함, 선량함과 싸우는 까칠한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이지수 옮김, 이진우 감수 / 다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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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한 구절 한 구절 곱씹으면서 읽은 책은 정말 오랜만이라, 읽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니체의 철학과 니체라는 인간을 자신의 신념대로 분석한 저자는 일본의 유명한 철학자라고 한다. 저자와 저자의 저서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괴팍한 인물이 또 다른 괴팍한 인물을 괴팍하게 분석한 책이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다.

 

저자는 현재 일본 사회내에 퍼져 있는 니체 찬양에 대한 강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토록 공격적인 혈기를 못이기시는 양반이 평소에는 어찌 사시나, 걱정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해서 이 책을 썼다. <니체의 인간학>. 니체 철학에 열광하면서도 그 철학대로 실천하려는 용기 따윈 없는 '착한 인간'들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폭로하는 동시에 니체 본인조차도 그런 나약한 인간이면서 그런 약함을 감추는 까칠한 철학관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책 내용에는 일본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기만과 노예근성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과 니체 사상을 찬양하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접근할 뿐 그 근본과 실천의 단계에까지는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 게으른 습성에 대한 저자의 분노 그리고 니체 철학 사이사이에서 저자가 발견해낸 나약함과 자기기만에 대한 비웃음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한다. 저자는 니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일본사회를 그리고 무리라는 방패 뒤에 숨기를 자처하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비열하고도 용기 없는 연약한 자들을 쥐어패려고 니체 철학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읽다보면 니체를 니체대로가 아닌 '나카지마 요시미치'라는 프레임에 분산된 니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감수인 이진우 교수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니체 철학을 정식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미리 안내를 한다.

 

니체와 그의 철학을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누가(어떤 습성을 지닌 자가) 이 병폐의 숙주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주 적합한다. 저자인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일본 사회에 팽배한 갖가지 모순과 기만들이 얼마나 웃기고 나쁜 일인지를 설명하는데, 그 일들은 단순히 바다 건너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익명의 우산 아래 온라인에 난무하는 각종 쓰레기 언어, 거짓말을 일삼는 미디어, 상향평준화가 아니라 하향평준화로 무리들을 끌고 내려가는 우리 자신의 현실이다.

 

착하다/나쁘다의 기준이 어떻게 약하다/강하다와 결합하게 되는지를 서두에 설명한 저자는 이후로 이 약해서 착한 자들이 어떤 모순 속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세밀하게 정리했다. 저자의 독하고 신랄한 비판을 따라가다보면 여러번 가슴이 찔린다. 약자라는 껍질을 쓰고 나는 때로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를 속이고 안온하지만 나태한 기만 아래 숨어 있던 적은 없는가. 약하니까 선하다는 인식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착한 사람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갈등'을 다루는 부분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게 기쁘기까지 했다. 갈등은 필요하다. 갈등을 피해 달아난 곳에 평안과 발전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발전과 변화를 위해 어디까지의 갈등이 적합하냐에 대한 또 다른 논의를 낳으므로 이건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문제이기도 하다.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니체를 해석한 내용에 대해 지지를 보내진 않는다.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방향에 맞춰서 니체의 말을 갖다 붙인게 아닌가 싶은 부분도 여러 군데고 무엇보다 저자 자체가 극도로 신랄하다. 노예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렇다고 현대인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노예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 오만하고 고압적인 시선 아닌가. (물론 이 부분은 니체 철학을 가져와 해석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이래서 저자는 에피로그에서 '니체의 사상 앞에서는 거의 모든 인간은 살 가치가 없어진다'고 언급했는지 모른다.)

 

 

어떤 몰락이든 거기에 성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곧바로 구분할 수 있다. 몰락을 향한 행동이나 몰락을 향한 삶의 방식이 그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 있으면 그 몰락에는 성의가 없다. 성의 있는 몰락이란 에도시대의 기독교 신자처럼,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공산주의자처럼 신변이 위험해지는 몰락, 주위 사람들에게 커다란 재앙을 초래하는 몰락이다.
그러면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몰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천 년도 더 된 유대교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현세에서 얌전히 지내면 내세에서 보답 받는다거나, 약하고 선량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등의 옛날이야기를 버리는 것이다. 육체를 경멸하고 힘을 경멸하며 진부한 정신의 덩어리로 인생을 보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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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없이 회의하라 - 가족, 직장, 친구, 나 자신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5가지 T.A.B.L.E
김동완 지음 / 레드베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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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때 제일 어려운 건 팀과제 수행이었다.

팀원들끼리 역할분담이 된다거나 누군가가 총대를 단단히 매고 궂은 일을 해야 한다거나 (그게 내가 되어야 한다든가;;) 이런 점도 물론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였지만 내가 제일 부담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회의.

팀원들이 만나서 회의라는 걸 해야 하는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표현을 회의라고 붙였을 뿐이지 잡담이 되거나(서로 안부만 묻다 끝나는 경우) 서로 감정적으로 부딪혀 난장판이 되는 경험을 몇 번 하고나니 회의랍시고 팀원들과 마주 앉게 되는 일이 보통 부담스러워지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경제학 수업을 들을 때였다. 어김없이 팀 과제가 주어졌고 한 팀이 된 우리는 도서관 1층 쉼터에서 만났다. 팀이 구성된 이래 첫 회의였다. 그날 처음 본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아는 선배도 있었고, 팀에는 낯익은 사람과 낯선 사람이 뒤섞여 있었다. 이날의 회의에서 나는 ', 이런걸 회의라고 하는구나'라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이날 회의는 좌장 역할을 자처한 (일부러는 아니었고 어찌하다보니 그 선배가 그렇게 하게되었다) 선배가 팀원들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곤 주제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에 대해 먼저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멍석이 깔리자 팀원들은 각자 자신들의 시각과 견해들을 내놓았다. 타인의 말을 중간에 치고 들어서는 팀원은 없었다. 상대의 의견에 감정적으로 맞서는 사람도 없었다. 너와 나의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고 누가 옳은지 다퉈보자가 아닌, 그 중에 제일 적확한 내용을 찾아보자는 합의가 이미 팀원들 개개인에게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태가 본래 회의에 들어가는 구성원들이 갖춰야 할 기본인데, 나는 이걸 그날의 회의에서 처음 보았다. 회의는 본래 회의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향으로 잘 진행되었고 신기하게도 팀원들의 의견들은 마치 탑을 쌓는 것처럼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서로 맞물리고 연결되어 결론까지 닿았다.

 

회의란 연약하고 섬세한 퍼즐을 맞추는 일이다. 그 바탕에 상대와 상대의 의견에 대한 존중을 갖추지 않으면 금방 부서지고 만다. 아니, 애초에 성립이 되질 않는다고 해야 하나.

 

회의가 시작되고 마칠 때까지, 구성원들은 말을 하지 않는 순간에도 표현을 하고 있다. 내가 당신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고, 당신에게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회의 중 소리로 도출되는 말 뿐만 아니라 모든 제스쳐까지도 회의를 구성한다. 그렇다보니 구성원들 전원이 회의에 적합한 마인드와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회의가 산으로 가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실제로 이런, 이름만 회의인 회의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지 않나.

 

[테이블 없이 회의 하라]의 저자는 한국 특유의 회의문화를 지적하고 그것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이다. 그는 그동안 그가 축적한 소통의 기술을 회의에 접목하여 어떻게 회의해야 생산적인 회의를 할 수 있을지 가이드를 정리해 책으로 냈다.

teach, admit, because, late, enemy 이 다섯가지 요소를 훌륭한 회의를 만들어가는 데에 주목해야 할 요소로 제시했다.

가르치려들지말고, 변명하지 말고, 늦지 말고, 적으로 삼지 않는 회의를 만들어가자는 차원에서 이니셜을 붙였는데 admit은 모르겠다. 억지로 넣은 듯 잘 붙지가 않는다. 나의 의견을 잘 피력하라는 의미는 좋지만 아무리 읽어도 전략적으로 붙인 차원이라고밖에 안 느껴져서 아쉽다.

 

부디 바란다. 정말 꼰대 없는, 지각자 없고 적의가 없는 그런 회의를 바란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건 자아성찰이지. 나부터가 그런 회의 구성원이 되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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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 - 거대한 그린란드상어를 잡기 위해 1년간 북대서양을 표류한 두 남자 이야기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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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시작했을까?

그 생각을 실행으로 옮긴 건 객기라고 해야 할까, 오기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분명한 건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를 잡으려고 덤빈 두 사람이 실제로 있었고 이건 그들이 만든 실제사건이다.

 

저자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와 그의 친구 후고 오스요르는 상어를 잡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는데, 그건 뭐 어떤 엄청난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이야기가 대단한 것은 어쩌다 시작하게 된 이 호기로운 계획을 이 둘이 굉장히 진지하게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철학적으로, 무엇보다 재미있게 기록했다는 점이 특히 최고.

 

모험가이자 역사학자, 사진작가,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해온 저자의 배경 덕분인지, 이 책은 마치 네셔널지오그래피에서 방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극한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상어를 잡는 이야기라고 해서 상어와 그 포획법에 대해서만 시야를 제한하지 않는다. 어쩌면 상어를 잡겠다는 목표는 단순한 멍석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저자가 폭넓은 이야기를 다이나믹하게 풀어놓기 위한. 저자는 바다와 그 속의 생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해수면 안팎에 써온 역사를 끌어오고 신화를 파헤치고 소설가들이 남긴 일러준다. 사회와 산업과 과학과 생물학 등등 상어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저자가 긁어모은 자료의 범위는 바다만큼이나 광활하다.

 

그래서 모든 기록들이 살아있다. 이 책은 지구 반대편에서 상당히 다른 삶의 모습일지라도,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슈와 닿아있고 나의 관심사를 날렵하게 찔러온다.

나는 저자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을 미끼처럼 입에 물고 파닥파닥 좇아갈 뿐이다.

 

본래 나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다. 흙과 나무처럼 나를 품어주지 못하는 공간으로 느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쳐지는 느낌이 드는 곳이 바다였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수면 아래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아서 두렵기까지 한 곳이 바다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바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어느정도 허물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바다를 찬양해서도, 저자의 친구인 후고가 바다를 경외해서도 아니다.

이런 드라마와 경이가 존재하는 곳이 바다라면, 내쳐진듯한 고독과 고립감을 주는 곳이라도, 따듯한 흙과 나무가 없는 곳이라도 충분히 사랑할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안 건데, 이 책의 주인공 둘이 상어잡이에 나선 바다인 로포텐제도는 내셔널지오그리픽이 선정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하니.

저자의 광활하고도 서늘한 풍경묘사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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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
애덤 갤린스키.모리스 슈바이처 지음, 박준형 옮김 / 토네이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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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는 Friend and Foe, 심지어 전면 상단에 '성공하려면 세상의 모든 적을 활용하라'는 카피를 내세웠다.

 

그래서 친구냐, 적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양분하는 책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내용은 아니다.

 

친구 혹은 적. 이 부분에 대해서 친구가 될 것이냐 적이 될 것이냐의 가능성을 다양한 자료와 전략을 바탕으로 조율해보려는 책이라고 해야 어울리겠다.

 

 

 

(개인적으로 책 제목이나 홍보 카피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건 이제 너무 식상하고 고루하다고 느낀다.)

 

책은 아주 재미있는 부분부터 출발한다.

 

첫 챕터 '사람은 누구나 비교하며 살아간다'에서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습성인 '비교 본능'을 다룬다. 경영학, 심리학, 경제학 전문가인 두 지은이는 인간의 아주 못된 얼굴인 '샤덴프로이데'까지 거침없이 설명한다. 샤덴프로이데는 말하자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인간의 심보인데, 저자들은 저열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이런 모습에 대한 증거를 뇌과학에서까지 끌어와 제시한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는 거지. 두 저자가 과학과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연구 자료와 증거를 샅샅이 정리하여 인간의 심리적인 본능을 까뒤집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하면 상생하고 발전해갈 것인지 전략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매 챕터는 권력, 계급, 성차별, 호칭, 신뢰의 몰락 등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여러 갈등 및 (부정적) 경쟁 요소들이 어떻게 상생과 발전을 방해하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마무리에는 항상 이런 본성을 초월해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잡아갈 수 있는지 전략을 제시한다.

 

      

나에게는 초중반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권력은 언제 몰락하고 이 몰락을 방지하는 요소는 무엇인가를 설명한 '2. 왕 노릇은 영원하지 않다', 여성과 남성의 상생과 조화라는 포인트를 어떻게 잡아내야 할지 힌트를 주는 '4. 모두의 배를 띄우는 힘'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지금 한국사회의 흐름에서 가장 핫한 이슈들을 다룬 챕터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가를 다룬 '8. 부서진 조각 맞추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친구냐, 적이냐. 그것은 흑과 백처럼 단호하게 분열되어 있는 것도, 처음부터 숙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드는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겠지.

 

유동적이고 언제든 어떻게든 변화하며 어떤 힘이 가해지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만들어진다는 점.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개념은 바로 권력이다. 이는 물리학의 근본 개념이 에너지인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쥐고 있는 권력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한다.
권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곧바로 그 뜻을 이해한다. 권력은 특정한 사람이 타인에게 지니고 있는 통제력의 양이다. 희소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이 크면, 자원을 더 쉽게 통제하게 된다. 그래서 자원을 더 쉽게 제한하거나 소유하며 별다른 제재 없이 여기저기에 배분한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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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문제
J.A.홉슨 지음, 김정우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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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빈곤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 정확한 경제개념에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을 앞두고 배추와 과일값 등 생활물가가 거침없이 오르고 있는 중이다.

배추 한 포기에 만 원이 넘는다고 기사까지 난 마당이니, 가정경제마다 깊은 주름이 패이는 것은 말해 입아플 정도.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만 올라가니 이거 살수가 없다'는 시민들의 원성이 수년간 이어져 왔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냉수처럼 시원한 해법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이제까지 서민이라면 누구나 해온 이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거라는 예상이 들어 막막할 뿐이다.

 

이단적인 경제사상으로 학계의 배척을 받았다는 J.A.홉슨의 [빈곤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한 (비단 한국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현상이지만) 이 암담한 현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같은 책이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의 이론과 주장을 비판했고 비난했다고 하나 인간은 항상 '뭣이 중헌디'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아주아주 나중에나 발견하게 되는 존재들 아닌가. 홉슨의 주장을 비판했던 학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나는 '가난'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도 풍족하고 부유하게 살아온 적이 없는 나의 궤적을 돌아볼 때 나는 가난해서 비극을 겪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은 흉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예 살지 못할 정도의 그런 고됨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세상은 '가난'을 비극으로 만드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

실상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 먹을 것 입을 것이 진짜로 아무것도 없어서 궁핍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빈곤층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이거다.

남들이 먹는 것을, 가진 차를, 입는 옷을 나는 못 먹고 못 가졌고 못 입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사이의 편차가 너무너무 크다. 이것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의 빈곤이다.

우리의 세상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것''내가 갖고 싶은 게 없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사람들이 눈만 높아져서 그런 것이므로 욕심을 버리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부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행하는 횡포를, 갑이 을을 착취하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만원 짜리 점심을 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원짜리 점심을 먹으면서 빈곤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욕심이 많아서, 사치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5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5천원짜리 찌개라도 먹고 싶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네 연봉에 적합한 소비를 하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는 나쁜 자본주의다.

'풍요 속의 빈곤'은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에 젖어서 생겨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밤낮없이 일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수준의 소비만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빈곤의 문제] 역시 이런 고민과 시름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2016년대의 문제에 대해 백년 전의 경제학자가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경제개념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빈곤과 빈곤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들 그리고 빈곤을 부르는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움이 된다.

다만 조금 심란한 것은, 우리가 빠진 이 궁핍한 시절에서 탈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매우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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