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간 여성들 - 그들이 써 내려간 세계 환경운동의 역사
오애리.구정은 지음 / 들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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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her Nature라는 말을 성차별 단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왜 대자연에 성별을 붙이는가? 자연은 무성인데 어째서 굳이 여성 그것도 어머니라는 역할을 부여하는가? 그랬는데 지금은, 이 지구라는 거대한 자연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지를 한 결, 한 결 깊이 체감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연에 굳이 성별은 필요없으나 어머니라는 역할로 이름을 짓는 건 타당하지 않은가.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고 필요한 정서적 양분을 공급하고 자녀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자녀를 기르는 어머니라는 역할. 지금 자연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일이다. 사람의 신체도 자연에서 출발하고 사람의 정서적 양분도 자연에서 얻는다. 사람의 생존도, 성장도 자연에 달려 있는데 문제는 자연에 교감하지도, 소통하지도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숲으로 간 여성들]의 저자들은 여성과 환경의 관계에 대해 자연이 사람을 먹이고 돌보듯 '땅에서 키워낸 먹거리로 가족을 먹이고 돌봐온 여성들의 일상이야말로 오늘날 환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썼다. 같은 역할을 오랜 시간 해온 존재들이 서로의 위치와 입장을 공감하고 나아가 소통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자와 교감하는 일이 좀더 능숙한 여성들이기에 그랬을까? 암튼 이 책은 여성들이 시작했던 생태학과 환경 보호 그리고 녹색 투쟁에 이르는 세계 환경운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멀리는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환경운동의 역사 속에서 환경운동에 나섰던 여성들의 생은 하나같이 험난했다. 살충제로 인한 환경 피해를 고발하면서 화학 업계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던 레이첼 카슨을 비롯하여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환경운동에 나섰던 많은 여성들은 살해당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여성들의 환경운동은 진행 중이다. 도리어 환경운동에 나선 여성들의 연령은 점점 더 어려지고 있다. 학자나 연구가, 교사 등 사회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들만 아니라 성인이 되지 않은 툰베리나 우홍이와 같은 어린 운동가들의 활동은 '기특하다'가 아니라 '경이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고향의 울창한 숲이 벌목으로 잘려 나가자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여자들이 나무를 끌어안고 싸웠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개발과 성장 신화를 버리고, 보전과 공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기 위한 나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또 칩코 운동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적어도 환경운동만큼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 150-151쪽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


알레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은 투쟁을 이끌면서 가장 심각한 핍박의 대상이 되곤 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넘어 점점 '기후 정의'쪽으로 향해가고 있다. 거기에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와 싸우는 것, 삶과 공동체에서 대안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것, 기득권 남성들의 정치권력에 맞서 새로운 상상을 실천하는 것이 포함된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결국 지구 환경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인 것이다.

책159쪽


환경운동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하는 일은 아니다. 환경운동은 약자의 입장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헤아리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마침내 개선책을 실행해나가는 것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자연은 크고 광대하기에 우리가 애써 그의 병든 곳을 관찰하고 교감하고 소통해야만 그의 아픔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회적 약자가 그렇듯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래서 환경운동은 민주주의와도 닿아있고 평등과 존엄, 정의라는 가치에도 연결되어 있다. 환경운동은 우리의 터전을 지키고 생존 가능한 지구, 지속 가능한 발전의 지구를 만들어가는 일일 뿐 아니라 평등, 자유, 정의 마침내는 평화를 이루는 운동인 것이다. 반다나 시바가 환경운동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 인터뷰는 이런 맥락에서의 뜻이 아니었을까.


요즘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분리수거와 비닐 적게 사용하기다. 처음에는 미세플라스틱, 그러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흡입하고 있는 미세플라스틱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인간이란 정말 답이 없다. 왜 이런 것들을 일부러 만들어서 날마다 날마다 엄청난 량의 그것도 썩지 않는 쓰레기로 자기 자신은 물론 지구 전체를 망쳐놓는 걸까.'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정말이지 비닐백을 너무 쉽게, 대충 막 써버리니까 그게 너무 문제인거야.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노력만으로 지구를 지키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거다. 너무 무서운 것은 이번 세기 안에 지구 평균기온이 1.5도가 올라가면 돌이킬 수 없는 지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도 당장이라도 지구의 파국을 내 생애 동안 맞게 될까봐 너무 무섭다. 툰베리가 눈을 부릅뜨고 경제를 빌미로 지구를 대책없이 오염시킨 어른들이라며 따지고 드는 심정이 지금 내 심정이다. 제발 그만 좀 만들고 그만 좀 쓰고 그만 좀 파괴하고 그만 좀 오염시켜! 제발 그만!!


지질학적인 시간에 비하면 찰나를 사는 인간이지만 그 찰나의 삶이 스스로 택한 잘못된 경로 때문에, 혹은 힘 있는 이들이 멋대로 결정한 경로 때문에 피폐해지고 괴로워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토착민들은 싸움을 계속하고, 환경운동가들은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국제사회는 기후 대응 체제를 만들었고, 기업들도 녹색으로 향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생산과 관리 방식을 차츰 바꾸고 있다. (중략)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보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분야와 관점에서 접근하든, 그 출발점은 미래 세대의 절박함을 받아들여 지금의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296-297쪽



알레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들은 투쟁을 이끌면서 가장 심각한 핍박의 대상이 되곤 한다. 지구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넘어 점점 ‘기후 정의‘쪽으로 향해가고 있다. 거기에는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부와 싸우는 것, 삶과 공동체에서 대안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것, 기득권 남성들의 정치권력에 맞서 새로운 상상을 실천하는 것이 포함된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결국 지구 환경을 지키는 가장 큰 무기인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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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캉디드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7
볼테르 지음, 김혜영 옮김 / 미래와사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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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일이 안 되도 이렇게 안 될 수 있나? 마치 온 우주가 나를 망가뜨리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은 그런 나날들 말이다. 단순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순탄하게 풀리지 않는 선이 아니라 갑자기 창고 천정이 무너져서 비품을 모두 버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든가 옆 사무실에서 난 불이 우리 작업장까지 번져서 어제까지만해도 멀쩡했던 공간을 태워버렸다든가 하는 천재지변까지 거들고 나서면 정말 눈앞이 깜깜해진다. 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런 상황에 18세기 낙관주의자들은 '괜찮아, 결국에는 최선의 상태로 나아가게 될거야.'라고, 오늘 우리 시대 방식으로 치자면 '괜찮아, 다 잘 될거야'라고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도 현실은 상당히 빡세다. 21세기라서 빡센 건 아닌 것 같다. 왜냐면 18세기에도 저런 낙관주의자들을 비웃는, '현실이 이렇게 빡센데 최선이니 어쩌니 하는 공상만으로 정말 괜찮을 것 같냐'며 채찍을 휘두르는 소설이 있었기 때문이지.



볼테르의 풍자소설 [캉디드]는 이 소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 볼테르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시대 상황과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고 읽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내용 전개나 반전을 중요하게 다룬 작품이 아니기에 볼테르에 대하여 혹은 이 작품 자체에 대하여 약간의 정보를 갖춘 후에 소설을 읽어나가면 왜 이 소설이 이렇게 여러 지역을 종횡무진하며 주인공을 개고생시키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고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볼테르는 18세기 중반에 유럽 도처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와 참극, 전쟁 등을 보고 듣고 겪은 후에 이 작품을 썼다. 볼테르의 작품과 가치관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볼테르가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린다고 비난했지만 볼테르는 종교적 광신주의, 당시의 지배층인 가톨릭과 봉건주의에 맞섰던 지식인이었다.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주인공 캉디드를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게 하며 갖가지 사건 사고를 겪게 하는데 이 때에 당시 자신이 목격한 불합리한 현실의 사건사고들을 빗대어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런 저자의 입장을 알고 [캉디드]를 읽다보면 저자인 볼테르가 그의 작품과 그 주인공 캉디드를 통해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보다 분명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본성을 타락시켜 온 게 분명해요. 늑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늑대가 되고야 말았잖아요. 신은 인간에게 24구경 대포도 주지 않았고, 총검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인간은 총검과 대포를 만들어냈고, 서로를 죽이고 있잖아요. 파산과 재판을 생각해보아도 결론은 똑같아요. 법원이 파산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바람에 채권자들은 더 힘들어지잖아요."

애꾸눈이 된 팡글라스가 대꾸했다.

"모든 건 필수불가결했던 겁니다. 각자의 불행은 대다수의 이익을 만들어내죠. 개인이 불행해질수록 전체적으로는 더 좋아지는 거랍니다."

25쪽



"오, 팡글로스 선생님! 선생님은 이런 참혹한 일은 상상도 못하셨겠죠? 이제는 끝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낙천주의는 포기해야겠습니다."

캉디드가 소리 질렀다.

"낙천주의가 뭔가요?"

카캄보가 물었다.

"낙천주의? 아, 그건 상황이 안 좋은데 모든 게 좋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집착 같은 것이지."

101쪽



[캉디드]의 첫 챕터에서, 주인공 캉디드와 그의 연인인 퀴네공드는 아주 순진하고 맑고 명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화에 자주 등장하는 천사들의 모습처럼, 그들은 세상의 악하고 처참하고 무서운 일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이상한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험난한 세파 속으로 던져진다. 순진한 시절에 캉디드와 퀴네공드는 숭배하듯 팡글로스 선생과 그의 낙천주의를 따랐지만 그들이 진짜 리얼한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결국 깨닫고 만다. 낙천주의? 이제 그건 그만둬야지.


캉디드가 낙천주의를 결국 놓아버리기까지 겪는 파란만장한 사건 사고들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캉디드의 대화 속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무척 많은데 특히 볼테르가 프랑스와 파리를 비꼬아 놓은 부분이나 당시 관료, 성직자들의 부패를 꼬집은 부분들은 상당히 재밌다. 지금 읽어도 재밌으니 이 작품이 당시에는 얼마나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을지 짐작이 된다.



"나는 그 어떤 종교법 전문가와 대신의 이름을 알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그 사건에 대해서도 아는 게 전혀 없고요. (중략) 내가 농사짓는 밭에서 수확한 것들을 팔면 그걸로 된 거죠."

선량한 노인이 대답했다.

(중략)" 그 땅을 자식들과 함께 경작합니다. 노동은 우리를 세 가지 큰 불행,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멀어지게 해 주죠."

180쪽



캉디드는 농가로 돌아오면서 노인이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리고 팡글로스와 마르탱에게 말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도 함께 식사했던 여섯 명의 왕들보다 저 노인이 자신의 운명을 더욱 바람직하게 꾸리고 있는 것 같아요."

181쪽



이론과 사상, 학문, 정치 등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저런 거대한 것들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 개인의 삶이란 땅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캉디드는 마침내 다시 퀴네공드를 만나고 결국 가정을 꾸린다. 퀴네공드 역시 세파 속에서 천진한 시절의 아름다움을 다 잃고 심지어 괴팍해졌지만 둘은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캉디드는 유식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노인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땅을 경작하고 노동하며 그 노동의 결실을 신성한 삶의 양분으로 삼는 사람처럼, 우리 각자의 인생은 결국 각자가 경작하고 노동해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의 땅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책181쪽)"라는 캉디드의 짧은 말에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들어있다.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난제들이다. 누군가는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가난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준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고, 구닥다리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은 부자가 되게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가난을 면하게는 해준다. 나의 노동이 나를 먹고 살게 한다면 이 노동이란 얼마나 귀한 것이며 그렇게 내 삶을 내 손으로 경작해가는 일은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권태와 방탕에 빠져 자신의 생을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는 걸 볼 때에 200여 년 전에 세상에 등장한 이 작품 [캉디드]는 지금도 여전히 흥미롭고 의미있는 소설이다.더군다나! 지금 우리 시대에도 족보없는 낙천주의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작품을 읽다보면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정신 상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꽤 나이가 많은 소설이라 21세기의 독자로서 도전하기 어려워보인다면 미래와사람 출판사의 시카고플랜 시리즈 중 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캉디드를 읽기 시작하는 게 어떨지. 책 제일 앞부분에 인물 관계도가 있어 좋고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문장들이라 캉디드의 속도감과 파란만장함을 즐기기에도 좋다




노동은 우리를 세 가지 큰 불행,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멀어지게 해 주죠.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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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펀 -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재미의 재발견
캐서린 프라이스 지음, 박선령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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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라고 주문을 외듯 노래를 부르는 광고가 있다. 비단 이 광고만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광고를 비롯한 모든 매체에서 '행복'이 마치 지상 최고의 목표인듯 말한다. 어느새 우리는 '행복해야만 해'라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금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마치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행복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생기고 평범한 개인의 새해 소망으로 '소박하게 행복한 한 해를 보내는 것'이라는 인터뷰를 자주 보게 되는 요즘, 이렇게 행복이 범람하니 나는 도리어 행복을 삐딱하게 바라보게 된다. "행복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내가 느끼는 행복은 감정의 상태다. 그래서 순간이다. 행복은 잠깐, 찰나, 시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이 왔다가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것같이 행복도 그렇다. 행복은 어느 순간 왔다가 물러가고 다시 꽃피듯 피었다가 스르르 져버리기도 하는 걸 반복한다. 사람이 시간을 붙잡을 수 없듯 누구도 행복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그래서 행복은 삶의 목표도, 일상에서 추구해야 할 상태로도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행복이 삶의 원동력, 어떤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추진력의 일부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어디까지나 과정에 필요하다는 뜻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한창 겪는 동안에는 행복이 중요하지, 라고 느꼈지만 팬데믹 이후 대면 활동을 재개하고 동시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촉발한 각종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를 겪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가 탐구하고 궁금해야 해야 할 것은 행복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재미의 시대가 아닐까. 재미, 진짜 재미. 시간을 낭비하고 에너지를 소모하게만 하는 그런 빈껍데기의 재미가 아니라 나의 창의력, 행동력, 삶의 의지를 솟아오르게 하고 이전의 스트레스를 활활 날려버리게 하는 진짜 재미. 그래서 날마다의 일상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고 참신한 발상과 신선한 태도로 오늘을 살게 만드는 그런 재미가 필요한 시점이다.


[파워오브펀]은 그런 면에서 아주 최적의 타이밍에 출간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저자 캐서린 프라이스는 '재미'가 대체 무엇인지, 우리의 인생에 재미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에 '우리가 진짜 재미를 잃어버린 인생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책 중반부를 오롯이 할애한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에 끼친 해악, 스마트폰과 관심경제가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우리의 뇌활동을 어떻게 교란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가짜 재미와 진짜 재미가 등장한다.


스마트폰으로 SNS나 포털 뉴스 등의 스크롤을 쉼없이 내리거나 아무 생각없이 넷플릭스 시리즈 여러 개를 정주행(혹은 역주행)하는 것 등은 큰 에너지가 들지 않는 활동이다. 소극적인 만큼 쉽고 아무 때나, 어디서나, 크게 고민하거나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이게 함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쉰다고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며 저런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이때 우리의 뇌에서 작용하는 도파민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선택한 콘텐츠에 하루 한두번만 노출되는 게 아니라 앱을 열 때마다 노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휴대전화를 볼 때마다 앱을 열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횟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에 달한다. 이걸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각각의 순간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전부 합쳐지면 자유 의지에 의문을 제기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94쪽


스마트폰의 도파민 분비 요인은 종종 쓸모없거나 매우 나쁜 습관을 강화하는 반면, 진정한 재미에 반응해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앞으로 우리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훨씬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은 세부 사항까지 잘 기억하도록 뇌를 대비시킨다.

157쪽


수동적 소비에는 계획이 필요 없다. 간편하고 접근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지쳐 있는지 생각하면 간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걸 바라는 게 당연하다. 길고 바쁜 하루를 보낸 후에 소파에 푹 파묻히고 싶어 한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중략) 문제는 수동적인 소비 자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가 기본이 될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수동적 소비가 우리의 기본 모드가 됐다. 스트레스와 피로도가 너무 높아서, 그리고 기술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수동적 소비를 너무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탓에 실제로 그걸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을 때도 수동적인 소비에 의지하게 됐다. (중략) 새로운 문제는 아니지만 기술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기술 때문에 일과 가정생활 사이의 경계가 약화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자유 시간을 수동적인 소비에 쓰는 것이 많은 기업의 수익에 필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74-275쪽


"당신의 인생은 지금 당신이 결정하고 있습니까?" 책 제목은 [파워오브펀]이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재미가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묻는다. 내가 구입하고, 사용하고, 소비하기로 선택하는 것들이 온전히 나의 독럽적인 결적의 결과인지를 확인해보라고 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소비 선택권 뿐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조차 간섭을 받게 되었다. 위험한 건 우리가 간섭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책 [파워오프펀]은 스마트폰의 영향력에 취해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가짜 재미에 일상을 소비하지 말고 적극적인 활동으로 진짜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걸 일깨운다. 그래서 진짜 재미가 뭐냐고?


또 재미없는 게 있다면? 바로 물질적인 소유물이다. 재미있다고 광고하는 것들을 사려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소유물이 재미를 촉진할 수는 있어도 물건 자체가 재미를 주는 건 아니다.

자기 치료도 마찬가지다. 한 걸음 물러서서 어른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그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이 사실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잊기 위한 것임이 드러난다. 술 또는 마약에 취하거나 드라마를 몰아보거나 몇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하는 것 등이 그 예다.

55쪽


웃음, 해방감, 자유로움, 다 놓아버리는 느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자기 판단과 자의식에서 해방된 느낌, 평범한 삶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난 느낌,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 어린아이 같은 설렘과 기쁨, 긍정적인 에너지 증가, 온전히 자신이 된 기분

169-170쪽

그게 이 책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궁극적인 이야기다. 진짜 재미는 이런 거라고, 저자는 자신이 수집하고 연구하고 분석한 내용을 정리해 내놓았다. 저자가 진짜 재미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 중에 두 가지가 가장 인상깊었는데 '번영'이라는 부분과 '자기 자신을 비웃어라'는 부분이다. 재미는 원인-과정-결과 중에 따지자면 원인 부분인데 이 재미로 인해 생기는 결과가 행복이 아니라 '번영'이라고 한 부분에 무척 공감이 갔다. 성공이나 성취, 행복 같은 상태가 아니라 번영이라니. 이 재미야말로 지금 내 인생에 딱 필요한 것이로구나 싶었다. 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에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은 '결과에 대한 신경'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몰입해서 놀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우스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바보처럼 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했는데 이거야말로 애처럼 놀고 애처럼 스트레스를 풀고 애처럼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겠구나 싶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살펴보면, 이 책[파워오브펀]은 어떻게 하면 정말로 잘 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무척 좋은 책이지만 왜 스마트폰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이 중반부에서 할애하고 있는 스마트폰과 관심 경제의 악영향에 대해 읽는 것만으로도 오늘 당장의 선택에 많은 부분이 바뀔 것이다.

또 재미없는 게 있다면? 바로 물질적인 소유물이다. 재미있다고 광고하는 것들을 사려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소유물이 재미를 촉진할 수는 있어도 물건 자체가 재미를 주는 건 아니다.
자기 치료도 마찬가지다. 한 걸음 물러서서 어른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그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이 사실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잊기 위한 것임이 드러난다. 술 또는 마약에 취하거나 드라마를 몰아보거나 몇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하는 것 등이 그 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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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 타인 지향적 삶과 이별하는 자기 돌봄의 인류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28
이현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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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한창 돌아다니던 이미지가 하나 기억이 난다. 키가 크고 작은 세 명의 사람이 울타리 건너 먼 곳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이 세 명에게 각각 똑같은 높이의 발판을 주는 것과 세 명의 신장이 서로 다르니 각자의 신장을 고려하여 각각 다른 높이의 발판을 주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평등일까? 사람들의 의견을 묻자면 제각각 자기의 배경과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니 우리에게는 믿을만한 기준이 하나 필요하다. 헌법 그리고 헌법재판소라는 기준이면 아주 믿을만한 기준 아닐까?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 헌법이 지향하는 ‘평등’을 ‘실질적 평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질적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는, 즉 차이에 대한 존중이 평등의 본질임을 밝힌다.

책 146쪽



평등을 논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너와 나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하면 나는 나 좋을대로 너를 대하고 너는 너 편한대로 나를 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를 대하듯 너를 대했으니 이건 평등이라고 오해를 하게 되고 이런 오해가 쌓이면 결국 관계는 망가진다. 다른 것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다르게 대해야 우리는 진짜 평등해지고 그런 평등한 관계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지향점 아닌가. 우리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같은 부분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그 지점으로 하나가 된다. 이 세상에는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인 이현정 저자가 지은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는 서로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하는 2023년 한국의 구성원 모두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현정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왜 대한민국의 취업이나 출산율 정책이 이렇게 무용하게 진행되는지, 왜 이렇게 우리는 지역과 성별과 나이에 따라 갈기갈기 찢어져 다투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젠더 논쟁.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젠더 논쟁이다. 뉴스 댓글이나 포털 게시판 등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들여다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평등의 개념이 희박한 우리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점을 다르게 대하는 실질적 평등이 아닌, 다른 점이 어떻든 간에 똑같이 대우하는 형식적 평등을 중심으로만 의견이 오고간다. 각자의 경험과 배경에서만 세상을 판단하는 게 인간의 한계인 것은 맞지만 적어도 상대가 나와 무엇이 다른지를 안다면 아니, 다른 점을 찾고 들여다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의 소모적인 논쟁은 원만한 이해와 협력의 단계로 방향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 치매에 걸린 여성을 모아 초점 집단을 만들어 집단 토론을 하게 했다. 이들이 남편을 돌보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남편의 불같은 화 또는 폭력이라고 고백했는데,...(중략) 137쪽


반면 남성의 경우 아내의 치매로 가장 어려운 점은 아내가 식사 시간을 잊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했다. 두 결과를 놓고 보자니 슬프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138쪽



30,40대 남성을 조사해보면 여성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수가 동의하는 입장을 보이는데, 그들은 사회 생활을 통해 여성의 임금 수준이나 대우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명명백백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대 남성의 경우 사회에 진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 문제를 직면하며 젠더 문제를 받아들인다.

142쪽



한국에서 젠더 논쟁이 뜨거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별에 따른 고정 역할이 무너지면서 가장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게 전통적인 '가족'이라는 단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 이상 가족은 희생과 헌신의 가치로 유지되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이현정 저자는 요즘 젊은 세대는 가족이 자신의 필요와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가족으로서 함께할 이유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가족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193쪽)고 언급하며 가족생활이 가치 추구나 사랑보다는 물질적, 기능적으로 도구화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려된다고 했다(193쪽).


한국은 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한반도라는 터 위에서, 개발과 결과만을 중시하고 원리 원칙이나 안전, 인간성은 모두 외면한 거친 성장기를 보냈다. 거칠고 불안한 사회 속에서 개인이 기댈 곳은 오직 유일하게 '가족'뿐이었고 이 때문에 가족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철저히 지키고 희생해야 하는 신성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깊어지면서 이제는 가족마저도 물질적, 기능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필요없어진 것이다. 여럿이 살아도, 혼자 살아도 불편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라면 차라리 혼자 살거나 뜻이 맞는 친구 정도나 반려동물과 함께 있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는 무엇보다 ‘생존’ 조건의 향상과 ‘생활’의 풍요가 결코 물질적으로 측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을 더 심각하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략) 삶은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정신적 영역, 관계적 영역, 역사적 경험의 축적 등 다양한 영역의 혼합으로 이루어진다.

책 44쪽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생존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두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평생을 고뇌하는 게 사람 아닌가. 때문에 우리가 매일 매일 보내는 시간, 태어나면서부터 맺는 여러 관계들을 물질적, 기능적으로만 재단하고 대한민국의 성장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윤과 효율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과연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투사하여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진정한 자유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를 고발하는 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는 내 기대보다 훨씬 더 폭넓고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왜곡된 나의 욕망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왜곡된 한국 사회의 잣대와 너무나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적 기준을 그리고 이것들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역사와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일까? 진정한 자기 돌봄에 가까이 가기 위하여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들려주기 보다는 나를 비롯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2023년을 작년과 같은 온갖 갈등과 논쟁의 해로 소모하지 않도록 '반드시 함께 풀어보세요~!'라고 미주가 달려 있는 듯한 질문들을 던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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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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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비디오 장르는 무협이었다. 30~40편짜리 장편 무협드라마에는 아주 환장을 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판타지 소설에 푹 빠졌다. 그렇게 재미있는 게 또 어딨을까? 닥치는 대로 장편물을 해치웠다. 그러다 어느 날, SF를 만났다.

가장 처음 만난 SF는 스타트랙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 SF는 스타트랙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장르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상, 지구라는 작은 별을 뒤덮은 바다 따위는 비교도 할수 없이 무한으로 펼쳐진 우주를 누비는 항해. 나에게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스타트랙을 시작으로 갖가지 SF 드라마와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내리듯 시청자를 공략하던 때였다.


그렇게 무심코 읽고 보고 즐겨 왔던 SF가 단지 한때의 공상이 아니라 실상으로, 현재의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와 있다는 걸 깨닫는 건 나에겐 조금 무서운 일이었다. 왜냐면 내가 기억하는 SF 장르의 영화, 소설, 드라마 등등은 결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봤던 SF 만화 중에 아직도 충격적인 위기감을 주는 장면들은 환경오염으로 멸망한 지구, 기후변화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들, 완전히 사막화된 지구에서 모래쥐처럼 살아가는 인류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내가 보았던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한 장면들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들은 신기한 동시에 불안하다.


수십년 전부터 미래의 재앙을 그려냈던 SF.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그리되 결국 현실과 이어지고야 마는 이 문제적 장르.

이동신 교수는 이제는 SF를 어떻게 읽고, 거기서 무엇을 건질 것인지를 묻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생각보다 SF라는 장르는 무척 어렵다. 무척이나 어렵다. 왜 어렵냐면 이 장르가 시작되는 그 지점, 이 장르가 해야할 이야기들을 모두 발산하고 끝을 맺는 그 지점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그런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온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지식체계가 아닌 그 너머의 사변'에서 SF는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그래서 그렇구나! 무협과 판타지를 좋아하던 내가 SF를 접할 때마다 느꼈던 생소함, 기이함은 그것이 진짜 SF다운

SF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나는 실은, 내가 과학을 싫어해서 SF마저 불편하게 느끼는 구나 싶어서 스스로에게 실망을 좀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뒤늦은 위로를 해본다.


서가명강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이 시리즈는 독자를 한 명의 청강자로 두고 책 전체의 강연 내용을 최대한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책의 가장 첫 페이지에 해당 도서가 다루고 있는 학문의 영역을 도식화해서 보여준다던지, 해당 도서를 읽는 동안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할 개념들을 미리 정리해 앞에서 다 보여주고 책을 시작한다던지 하는 점들은 정말 출판사가 고마울 정도다. 덕분에 우주선과 외계인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즐길 줄만 알았지 SF 자체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던 독자 하나에게 빛을 주었으니까.

[SF, 시대정신이 되다]라는 제목 때문에 SF 장르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사람에게만 이 책이 눈에 띌까 싶다. 이 책은 SF장르 자체에 대한 호감도를 떠나 '현재의 지구와 인류'에 대해 먼지만큼이라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SF가 어떤 장르인가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 '인류 공통의 위기를 맞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학과 문화 속에서 어떤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문화를 생산하고 누군가는 문화를 소비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생산자에게 윤리, 시대정신, 가치성 있는 주제의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동신 교수는 생산자가 그런 사명감이 없이 생산했다고 해도 괜찮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생산자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비자, 책으로 치자면 독자다. 독자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읽는다면, 생산자인 작가들이 결국 그 변화를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세상이 험하고, 혼란할수록 문화의 소비자들은 더 예리하고 수준 높은 안목으로 문화를 읽어내야 한다. 오늘 당장 비닐 한 장 덜 쓰는 것도 너무나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저마다 예리한 독자, 소비자가 되어가는 것 역시 지금의 위기와 혼란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일 것도 같다.





작가들이 그런 사명감을 갖고 쓰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독자인 우리가 그런 사명감을 갖고 읽으면 되기 때문이다. 독자가 달라진다면 작가들도 그 변화를 점차 따라오게 된다. SF는 그렇게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장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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