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르마코스>까지 읽고 나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왜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이 기이하고 찝찝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왔을까.

온유한 베풂의 대가로 보석을 토하게 된 동생 수는 산채로 배가 갈렸다. 냉철한 거절의 대가로 벌레를 토하는 대신 물을 부르게 된 언니 루는 마을 전체를 수장시키고 홀로 남았다. 보석을 토하든 벌레를 토하든 무엇을 토하든 그 모든 것은 저주였다. 자매를 시험했던 여인은 베풂을 준 수에게도, 거절을 한 루에게도 가혹한 저주를 걸었다. 내 명치 언저리에서 원래 내몸이 아닌 것들이 식도를 타고 자꾸 넘어오는 일은 그게 보석이든 지렁이든 상관없이 치떨리게 괴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내가 토해낸 것을 빌미로 사람들이 나를 도구화하는 일이고 가장 싫은 것은 도구로 전락하는 나의 운명을 나 스스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관통>을 지나 <이창>을 넘어섰을 때, 나는 고민했다. 작가가 고민하는 것을. 무엇을 고민하길래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꾸역꾸역 이어가는 것일까.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쉼표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마침표를 번갈아 밟고 뒷장으로, 그 뒷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식우>를 관통하며 천재지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갑을체제의 공고함에 뒤통수가 곤두섰고 <이물>의 그 짐승이 내 집 어딘가에서, 아직 손톱만한 크기의 먼지뭉치로 보이는 유아기를 보내고 있진 않을까 싶어 잠시 옷장이니 서랍장이니 하는 가구 바닥마다 애꿎은 모기약을 분사하기도 했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 닿아서야 이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친구 집에 놀러갔던 나는 그가 기르는 강아지와 잠시 놀았다. 정신없이 놀고 나와 집에 가려고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어디선가 계속 꿉꿉하고 구린 냄새가 나서 나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주위를 훑으며 혼잣말을, 조금 크게, 이게 무슨 냄새야 이상한 걸 들고 탔나, 책망조로 내뱉었다. 객차가 입을 닫고 어두운 터널을 돌진하던 그때, 까만 차창에 비친 내 모습 오른쪽 갈비뼈 쪽에는 강아지똥이 묻어 있었다. 일초 정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였는지 모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음 역에 내려서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옷에 묻은 걸 닦고 급하게 화장실에 비치된 비누를 묻혀 임시로 세탁하기 전까지 나는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손잡이만 결사적으로 쥐고 서 있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이게 개똥이라는 걸 알까, 내가 지금 이걸 닦아내면 이걸 못 봤던 주변 사람들도 다 쳐다보게 되겠지. 집까지 정류장 세 개밖에 안 남았는데 구석에 가서 그냥 모른 척 있을까, 근데 이걸 두자니 냄새는 나고 더럽고 찝찝하고, 가방에 휴지가 있나, 아까 혼잣말을 왜 뱉어가지고, 벌써 내 앞에 아저씨는 흘금흘금 쳐다보는 눈치인데. 닦자니 시선 때문에 창피하고 안 닦자니 역시 시선 때문에 창피한 그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

 

거울로 비치는 내 얼굴에 분명 더러운 것이 있는데 닦아낼 수 없다. 아니, 실은 닦을 수 있다. 닦지 않고 방관하는 것, 모른 척을 가장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한때 사람이었던 덩굴손이들의 마른 줄기들을 무감각하게 치우면서, 누구도 그런 참담한 사건의 이유를 밝히거나 해결 방안을 연구하지 않고, 그것이 아무 피해도 입히지 않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는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은 더러운 얼굴을 거울로 지켜만 볼뿐 누구도 닦으려고 나서지 않는 현실을 서늘하리만치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피해를 주지 않으면 바로 지척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과 무관계의 세상. 무심과 무정이 예의인 것처럼 비치고 도리와 관심이 민폐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나는 실은, 벌써 이런 세상 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기준을 잃었다. <이창>의 화자가 오지라퍼인지 도의에 밝은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내가 <이물>의 양선이나 방난이었다해도 거실 한 가운데의 짐승인지 뭔지 모를 그것이 당연히 너의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을 것이다.

 

 

타인을 향한 재단(裁斷) 그것이 무관심에서 비롯했든 과한 관심에서 비롯했든)이 나를 향한 재난이 되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 재난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해자가 되는 것도 불편해한다. 그저 모두가 이런 재난이 나에게만은 닥치지 않기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가해자가 되건 피해자가 되건 어쨌건 나의 일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이 기기묘묘한 그물 밖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혹했던 현실을, 참담했던 상황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잊고 나는 아닌 것처럼 다시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노란색 표지 정가운데를 비집고 나오려는 듯, 길쭉한 칼집 사이로 습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고 바라는 사람들의 세상을 보여줄 뿐, 이것이 옳고 저것을 틀리다고 재단하지 않는다. 선동하지 않고 위선하지 않는다. 위악이라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가차 없다. 판타지 아닌 판타지인 이 작품들은 다만 비춘다, 너를, 세상을, 거울처럼. 그리고 들리는 이 목소리는 저자의 것인 듯하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척 하는 너를, 세상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저자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 척 하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고, 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거기에 비도 내리지 않는다면, 뜻있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수백여 톤의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지므로. 이 도시는 안 그래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었지만 덩굴식물들이 피어나는 시기는 제각각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사무실의 몇 번째 파티션 너머에서 꾸준히 싹을 틔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새로운 발병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덩굴식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란, P계장의 귀띰에 따르면 윗선에서는 겨울이 찾아와 메마른 강풍이 세상을 덮치고 눈이 쌓이면 소강상태로 접어들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궁극적으로는 이 도시에 그리 변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일터다.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줄 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페이지 238-239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분 심리학 - 뇌가 섹시해지는
앤 루니 지음, 박광순 옮김 / 생각정거장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당신의 뇌가 섹시해지는 데 필요한 시간, 15

하루에 15분씩만 이 책을 읽으면 뇌가 섹시해진다........

 

책 제목부터가 15분 심리학이니 대단한 내용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흘려 들어도 흥미가 돋고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내용 그러니까 상식 수준의 심리학 이야기들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은 맞았다. 다만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이 하나가 있었다. 책이 내 기대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왜 선택의 연속이냐고? 시간은 설득의 연속이니까.

 

우리는 갖가지 설득에 노출된 채 일생을 보낸다. 때론 타인이 혹은 타자가 그리고 종종 나 자신까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타자를 설득하건, 내가 설득을 당하건 이런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건 심리학이다. 그래서 심리학을 연구하는 혹은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을 통해 인간과 삶을 통찰해보려 한다.

 

그래서 이 책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하루에 15분씩 심리학에 대한 짧고 명쾌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번뜩이는 통찰력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근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하루 15분 가지고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지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가 있다. 이 책은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심리학 상식에 대해 알기 위해서라면 읽어볼만하다.

 

꼭지별 주제는 흥미롭다. 편견은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 도덕성은 타고난 것일까? 우리는 왜 공상에 빠져드는 걸까? 자아실현이란 무엇인가? 사이코패스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일을 미루는 걸까? 등등. 각 물음과 관련한 다양한 실험과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은 재미있다. 다만 책 전체적으로 상당히 산만하다. 그래서 몰입이 안 되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더의 나침반은 사람을 향한다 - 공병호, 불변의 리더십 키루스를 만나다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페르시아 부흥의 주역인 키루스.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키로파에디야>

 

이 책은 키로파에디야에 기록된 키루스의 면면을 살펴 부흥과 승리의 시대를 이끄는 리더란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한다.

 

나는 키루스 대왕에 대해 사실 잘 모른다. 세계사에 상당히 어둡고 심지어 기원전 역사에는 더더욱 그렇다. 키루스 대왕이라는 이름도, 키로파에디야라는 그리스의 고전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만약 이 키루스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노예들을 풀어준 '바사왕 고레스'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뜻밖의 인연으로 읽게 된 이 책은 기대하지 못했던 유익함을 주었다.

 

저자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건설하고 명철한 선택과 실천으로 명망을 높인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을 통해 이 전쟁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리더십과 경영 비책을 탐구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예상되는 독자는 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해야 하는 이들이며 대부분 기업의 관리자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덕목들은 굳이 리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정말 괜찮은 사람, 존경할만한 인물, 좋은 사람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적용이 되는 내용들이다.

 

나는 '좋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결 같고 예의가 있고 행동에 절제가 있으며 명철한 사람이다. 비열하지 않으며 경거 망동하지 않고 시야가 넓으며 약자를 배려할 줄 알고 때로 맞수(혹은 적)조차 너그럽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자기 영역에 관해서는 실제적인 역량과 능력이 분명한 사람이다. (혹은 역량을 충분히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나는 키루스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매력을 담뿍 느꼈다. 그의 일대기에 감탄과 찬사를 보태 기록한 책이 <키로파에디아>이니 그 기록을 통해 만나는 키루스대왕의 모습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라면, 나아가 사람이라면 키루스처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나의 모습은 어떤가를 비춰보는 기회도 되었다. 나라는 리더는 과연 구성원들과 함께 웃고 울 줄 아는, 리더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기회가 찾아 왔을 때 본능처럼 움직이고 탄탄한 실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는 그런 리더인가...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많은 생각과 성찰을 불러온 책. 나아가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부분을 메모하느라 손목이 아플 정도였던 책이다.

 

 

근데 참 아쉽다. 저자는 이 책을 편집자와 충분히 상의하지 않았나보다. 본문에 오자가 너무 많고 중복되는 내용도 꽤 많다. 작가가 책을 출간하는 게 급했던 것인지 편집자가 일을 제대로 안 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결정적으로...... 제목이 굉장히 별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책등을 보고 읽어 제목을 상기해야 했다. 차라리 '리더라면 키루스처럼' 이렇게 짧고 쉽게 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요한 건, 사람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이다. 인연을 두고 인생을 두고, 우리는 흘러간다고 표현한다. 생각해보면 멈춰 있는 것은 없다. 완전무결한 무관계 속에서 독수공방하는 자도 없다. 어떤 인간이든 과거로부터의 줄기를 받은 한 갈래의 선이다. 몸도, 생각도 결국에는 나를 둘러싼 선의 접점이 만든 흔적들이니까.

 

더 중요한 건, 선의 접점이란 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은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흐를 뿐이다. 계획한다고 만사가 계획한대로, 다짐한다고 모든 일이 다짐 그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사람은 단호하고 엄정한 심판자인 시간이 일방통행으로 내어둔 선 위를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닿을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걸 아는 건 아무 의미 없는지도 모른다. 닿는다는 건 끝. 사람에게 끝이야 죽음밖에 더 있나. 종착지가 어디인가에 집중하는 건 길의 영역이다. 선의 영역은 따로 있다.

 

[선의 법칙]이 따라간 주요 인물들의 궤적이 올곧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벽이 나타나면 잠시 혹은 아주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고여있거나,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돌아 흐르는 것이 선의 법칙이다. 윤세오, 신기정, 조미연, 부이, 이수호, 신하정 모두 선의 법칙에 충실하게 움직인다. 장애물을 만나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진로를 틀고, 다른 선을 만나면 그 접점만큼의 관계만 간직한 채 각자 서로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선의 법칙에는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선의와 악의. 선은 움직이되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 때로 의지가 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의지라는 것은 선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의지라는 미지수가 골치 아픈 이유는, 선이 지닌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이기도 하고 악의이기도 한 이 의지의 모호성은 고장난 나침반이다. 선은 갈팡질팡한 궤적을 그리면서도 스스로가 어떤 모양으로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일도 하는 존재였다. (본문 페이지 78)’ 차라리 면처럼, 동전의 앞뒤가 분명하듯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분리된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궤적은 보다 명료하고 서로의 입장은 더 명쾌했을까.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사람이란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조차 실패한다. 내 안에서 하루에도 몇 천 번씩 얼키고 설키는 선을 풀다 풀다 다 풀지 못하고 종착지에 도달해버리고 마는 존재다. 그래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우리를 으로 두어야 했나보다. 의도치 않게 엉키고 때로 꺾이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끊임없이 흐르고 흐른 만큼의 궤적을 틀림없이 남기는, 그것이 사람이니까.

 

작가는 미약하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개인을 따라가며 점도, 면도 아닌 가느다란 선으로서의 우리들을 지면에 옮긴다. 차분하고 덤덤한 문장으로 노정을 안내한 작가는, 하얀 종이 위에 까만 잉크가 제멋대로 그린 선을 조망하듯,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난 삶을 목도하게 했다. 세오의 집요하고 안쓰러운 악의 때문에, 신기정의 무심하고 냉담한 애도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나마저 건조하고 염세적인 기분으로 끌어내려지곤 했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나는 세오와 이수호에게 든 연민을 죄책감 없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물처럼 엮인 선의 도가니를 자유롭게 부유한 부이에게서, 이수호의 집에서 조용히 나온 세오에게서 나는 [선의 법칙]의 선이, ()과 더불어 선()의 법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정이가 세오의 손을 잡아쥐었던 것처럼, 어딘가에서 세오와 닮은 선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접점에서 잠시 그 선을 안아주고 싶다. 나 역시 세오와 같은 궤적을 그리게 되었을 때, 선의와 악의가 뒤섞인 한가운데에서 침전하고 있을 그때, [선의 법칙]에서 만났던 말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윤세오를 만나도 그럴 것이다. 윤세오가 동생에 대해 애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 그래도 윤세오가 제 삶을 사느라 동생을 모른 척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동생과 달리 윤세오의 삶이 밝고 따스했던 것도 아니었다. 젊은 애다운 광채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부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정은 세 사람을 두고 해온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누구의 삶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고, 무관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다.
궁금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시절이 낭랑하게 흘렀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시간과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돈도. 동생처럼 많은 액수의 빚을 지기도 했을 것이다. 같은 실패를 경험한 후 시간을 통과하면서 동생은 죽고 윤세오와 부이는 살아남았다. 살아서 누군가를 뒤쫓게 되었을지라도.
페이지 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프 리스트
로리 넬슨 스필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돈만 많으면 살기 편한세상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는다. 나 역시 그런 말에 일부 공감한다. 일부가 아니라 아주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돈만 많으면, 얼마나 편리하고 안온하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돈이 많으면 살기 좋은세상이라는 말에는 반대한다. 편한 것은 편한 것일 뿐, 좋은 것과 다르다. 이 소설의 출발은 거기였다. 좋은 삶은 과연 어떤 삶인가? 작은 화장품회사를 일류기업의 반열에 올린 한 여성 CEO는 죽으면서 그녀의 딸에게 말도 안 되는 조건부 유언을 남겼다. ‘딸아, 네가 14살에 작성했던 라이프리스트(내 인생동안 꼭 해야 할 일)를 완수하렴.’. 두 아들에게는 억대 자산을, 며느리에게는 회사를 상속한 엄마는 정작 딸인 주인공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해고까지 당한다. 번듯한 화장품회사 홍보실장에서 순식간에 백수가 된 주인공은 그때부터 그녀의 라이프리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인공 브렛이 14살에 쓴 라이프리스트는 뭐 크게 대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강아지를 기르고 말을 기르고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빠와 화해하고 지금 가장 친한 친구와 영원한 우정을 간직하고 뭐 등등등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싱글 여성이 저런 목표들을 달성하기에는 굉장한 부담이 따른다. 강아지야 뭐 어느 정도 현실성 있지만, 도시에서 말을 기르라니 거기에 아이 엄마가 되라니. 더구나 아빠와 친구 같은 관계는 아이가 아니라 도리어 어른이게 더 힘들고 어려운 과제 아닌가. 라이프리스트 목표 달성의 기한은 1. 1년의 4계절을 보내며 주인공은 참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야기의 끝은 물론 해피엔딩. 엄마는 하나뿐인 딸에게, 그것도 그녀의 영혼을 다 바친 사랑의 결실인 유일한 딸인 브렛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커다란 유산을 상속해주었다.

 

나는 내가 14살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지? 내 인생에 어떤 기대를 걸고 꿈을 가지고 살았던가? 돌이켜 본다. 그때 내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 서랍장 제일 안 쪽 구석에, 표지가 해지고 종이가 노랗게 바랜 내 오래된 일기를 꺼내보아야겠다. 시간이 오래된 먼지 냄새로 깃들어 있는 내 삶의 기록. 어쩌면 거기에도 내 인생의 중요한 어떤 것을 일깨워 줄 라이프리스트가 들어있을지 모르니까.

 

 

"부자들은 그러나 봐." 제이 오빠가 말한다. "그 사람 아버지가 무려 서른 개가 넘는 특허를 가지고 있대. 다른 주에도 집이 있고, 카리브 해에 섬도 가지고 있고 자식은 허버트뿐이래."
"나 같은 사람에게 흥미 없을 거야. 교사에다 필슨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데."
셸리가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젓는다. "그런 당분간이잖아. 유산 상속이 미뤄졌다는 얘기는 제이가 벌써 했대."
입이 벌어질 일이다. "뭐?" 나는 오빠를 본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그 사람과 수준이 맞는 사람이란 걸 알리고 싶을 거 아냐?"
오빠의 말에 불편한 감정이 밀려온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어떤 곳에 사는지, 얼마나 돈을 버는지 같은 것에 따라 사람ㅇ르 판단하는 사람? 내가 앤드루하고 만났던 친구들이 모두 부유하고 매력적이었던 게 그냥 우연이었나? 전율이 인다. 엄마가 내게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삶과 깊이 없는 만남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라고 떠밀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더디고 화려하지 않게 보일지 몰라도, 난 처음으로 살아가는 일을 즐기며 가고 있다.

p308 –3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