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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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코스>까지 읽고 나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왜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이 기이하고 찝찝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왔을까.

온유한 베풂의 대가로 보석을 토하게 된 동생 수는 산채로 배가 갈렸다. 냉철한 거절의 대가로 벌레를 토하는 대신 물을 부르게 된 언니 루는 마을 전체를 수장시키고 홀로 남았다. 보석을 토하든 벌레를 토하든 무엇을 토하든 그 모든 것은 저주였다. 자매를 시험했던 여인은 베풂을 준 수에게도, 거절을 한 루에게도 가혹한 저주를 걸었다. 내 명치 언저리에서 원래 내몸이 아닌 것들이 식도를 타고 자꾸 넘어오는 일은 그게 보석이든 지렁이든 상관없이 치떨리게 괴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내가 토해낸 것을 빌미로 사람들이 나를 도구화하는 일이고 가장 싫은 것은 도구로 전락하는 나의 운명을 나 스스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관통>을 지나 <이창>을 넘어섰을 때, 나는 고민했다. 작가가 고민하는 것을. 무엇을 고민하길래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꾸역꾸역 이어가는 것일까.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쉼표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마침표를 번갈아 밟고 뒷장으로, 그 뒷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식우>를 관통하며 천재지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갑을체제의 공고함에 뒤통수가 곤두섰고 <이물>의 그 짐승이 내 집 어딘가에서, 아직 손톱만한 크기의 먼지뭉치로 보이는 유아기를 보내고 있진 않을까 싶어 잠시 옷장이니 서랍장이니 하는 가구 바닥마다 애꿎은 모기약을 분사하기도 했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 닿아서야 이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친구 집에 놀러갔던 나는 그가 기르는 강아지와 잠시 놀았다. 정신없이 놀고 나와 집에 가려고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어디선가 계속 꿉꿉하고 구린 냄새가 나서 나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주위를 훑으며 혼잣말을, 조금 크게, 이게 무슨 냄새야 이상한 걸 들고 탔나, 책망조로 내뱉었다. 객차가 입을 닫고 어두운 터널을 돌진하던 그때, 까만 차창에 비친 내 모습 오른쪽 갈비뼈 쪽에는 강아지똥이 묻어 있었다. 일초 정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였는지 모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음 역에 내려서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옷에 묻은 걸 닦고 급하게 화장실에 비치된 비누를 묻혀 임시로 세탁하기 전까지 나는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손잡이만 결사적으로 쥐고 서 있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이게 개똥이라는 걸 알까, 내가 지금 이걸 닦아내면 이걸 못 봤던 주변 사람들도 다 쳐다보게 되겠지. 집까지 정류장 세 개밖에 안 남았는데 구석에 가서 그냥 모른 척 있을까, 근데 이걸 두자니 냄새는 나고 더럽고 찝찝하고, 가방에 휴지가 있나, 아까 혼잣말을 왜 뱉어가지고, 벌써 내 앞에 아저씨는 흘금흘금 쳐다보는 눈치인데. 닦자니 시선 때문에 창피하고 안 닦자니 역시 시선 때문에 창피한 그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

 

거울로 비치는 내 얼굴에 분명 더러운 것이 있는데 닦아낼 수 없다. 아니, 실은 닦을 수 있다. 닦지 않고 방관하는 것, 모른 척을 가장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한때 사람이었던 덩굴손이들의 마른 줄기들을 무감각하게 치우면서, 누구도 그런 참담한 사건의 이유를 밝히거나 해결 방안을 연구하지 않고, 그것이 아무 피해도 입히지 않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는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은 더러운 얼굴을 거울로 지켜만 볼뿐 누구도 닦으려고 나서지 않는 현실을 서늘하리만치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피해를 주지 않으면 바로 지척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과 무관계의 세상. 무심과 무정이 예의인 것처럼 비치고 도리와 관심이 민폐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나는 실은, 벌써 이런 세상 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기준을 잃었다. <이창>의 화자가 오지라퍼인지 도의에 밝은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내가 <이물>의 양선이나 방난이었다해도 거실 한 가운데의 짐승인지 뭔지 모를 그것이 당연히 너의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을 것이다.

 

 

타인을 향한 재단(裁斷) 그것이 무관심에서 비롯했든 과한 관심에서 비롯했든)이 나를 향한 재난이 되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 재난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해자가 되는 것도 불편해한다. 그저 모두가 이런 재난이 나에게만은 닥치지 않기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가해자가 되건 피해자가 되건 어쨌건 나의 일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이 기기묘묘한 그물 밖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혹했던 현실을, 참담했던 상황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잊고 나는 아닌 것처럼 다시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노란색 표지 정가운데를 비집고 나오려는 듯, 길쭉한 칼집 사이로 습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고 바라는 사람들의 세상을 보여줄 뿐, 이것이 옳고 저것을 틀리다고 재단하지 않는다. 선동하지 않고 위선하지 않는다. 위악이라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가차 없다. 판타지 아닌 판타지인 이 작품들은 다만 비춘다, 너를, 세상을, 거울처럼. 그리고 들리는 이 목소리는 저자의 것인 듯하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척 하는 너를, 세상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저자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 척 하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고, 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거기에 비도 내리지 않는다면, 뜻있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수백여 톤의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지므로. 이 도시는 안 그래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었지만 덩굴식물들이 피어나는 시기는 제각각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사무실의 몇 번째 파티션 너머에서 꾸준히 싹을 틔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새로운 발병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덩굴식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란, P계장의 귀띰에 따르면 윗선에서는 겨울이 찾아와 메마른 강풍이 세상을 덮치고 눈이 쌓이면 소강상태로 접어들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궁극적으로는 이 도시에 그리 변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일터다.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줄 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페이지 238-239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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