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 - 상위 1%의 독주를 멈추게 하는 법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그런 고급 문구류를 평생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만년필이 생겼다.

이 녀석은 생긴 모습대로, 사용하기가 영 만만한 게 아니었다. 잉크 없이 속이 비어있는 채로 선물 받았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안에 잉크가 있는 줄 알고 한참 헤맸다. 아무리 가볍게 톡톡 두드려봐도 잉크가 나올 기미가 안 보여서 고장난 줄 알았지. 속을 열어보고 안에 잉크가 없다는 걸 알고 난 이후에도 한참 해맸다. 어떻게 잉크를 넣는지를 몰라서 말이다. 내가 우격다짐으로 잘못 다루면 혹시라도 망가질까봐 제대로 손도 못대고 이걸 어떻게 하는 거지,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포기했다. 결국 내가 이 만년필로 글자를 쓰게 된 건, 만년필 유저인 친한 동료가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준 덕분이다.

 

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세팅완료된 만년필을 건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의 필기 습관에 따라 촉 끝이 조금씩 마모된다. 그래서 사용자의 개성을 그대로 담은 고유의 필기구가 된다. 그게 만년필의 매력이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었던 나는 만년필을 쓰면서 자본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가 딱, 만년필 같아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촉끝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본주의는 덫이 될수도, 동력이 될수도 있으니까.

 

자본주의 자체가 세상을 망가뜨렸다고 하고 싶지 않다. 자본주의에는 분명 명암이 있지만, 그건 사람이 만든 모든 일이 그렇다. 어쨌든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돈이 윤리를 이기는 사회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돈 자체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돈보다 윤리를 우선하는 사람 때문이다.

 

만년필 촉끝이 마구 마구 망가져서 종이를 찢어 일을 망칠 지경이 되었다면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구하라]는 시스템의 몰락을 두 손 놓고 구경하지는 말라는 경고와 조언을 담은 책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속속들이 파고든 저자는 특히, 한국 저자들에게 미국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다.

자본주의가 자본가들, 기업과 상위1%의 소수 마음에도 흘러가도록 두지 말라고 말한다. 결국 그 길은 모두를 망치는 길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아주 가까운 사이는 본래 아주 사소한 이유로 부서진다.

 

가족이란 세상 어느 누구도 어떤 단체도 줄 수 없는 소속감과 안도감,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오해와 어긋남을 시작으로 관계가 부서지는 위험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상실과 불안과 상처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먼저 시작된다. 인간이 최초로 관계를 학습하는 공간이기에 가족이란 때로 그 자체가 가혹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에는 너무나 많은 상처들이 곪아 있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1977,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제임스와 메릴린의 첫째 네스는 하버드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둘째 리디아는 요란한 사춘기도 없이 명랑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의 시선 밖에 머무는 막내 한나 역시 아무 고민이 없는 어린 아이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고요 속에, 평범했던 어느 아침에 둘째 리디아가 사라졌다. 연락도 되지 않고 행적도 묘연해진 둘째 딸을 찾는 동안 부모는 리디아가 창틀에 앉아 전화로 수다를 떨던 아이들에게 리디아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리디아를 낯설어 했다. 그 아이들은 리디아의 친구가 아니라고. 부모가 가장 아끼던 자녀인 리디아가 사라지자 가족의 모든 것이 통째로 멈추었다. 아빠는 출근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그들은 그릇을 내려다보며 리디아의 소식을 기다리다 흩어지곤 했다. 그렇게 그들이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리디아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고 그때부터 제임스, 메릴린, 네스, 한나 그리고 리디아가 이 가정 안에서 각자 보고 듣고 말했던 모든 일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리디아는 왜 죽었나?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주목한 건 이 물음이었다. 사고였을까? 아니면 고의적인 살해? 그것도 아니면 자살?

그러나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물음이 바뀐다.

이 가정은 치유받을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노골적인 차별이 당연한 시대였다. 여성은 기술수업이 아닌 가정수업을 들어야했고 아시안은 하버드 교수 임용에서 제외되는 시대가 그 시대였다. 하필 그런 시대에 여성인 메릴린과 중국인 제임스라는, 온 생애 내내 차별에 저항해야 했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꾸리게 된 건 비극이었나. 두 사람이 그들이 이겨 내야만 하는 차별의 무게 앞에서 도망쳐 서로 다른 길로 갔다면 이 모든 상처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뛰어난 물리학도였던 메릴린이 갑작스런 임신과 출산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탓에 평생동안 트라우마를 겪는 일과 리디아에게 강압적으로 훈육하게 되는 일도 없고, 부모가 리디아를 편애한다고 느낀 네스와 한나가 소외감과 박탈감으로 쓰라린 유년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라는 가정은 너무나 바보같은 것이라고 평소 늘 생각해왔지만, 리디아가 살아 있을 적의 시간들을 돌이켜 되새기는 이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부질없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작가는 제임스와 메릴린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개개인이 간직한 상처들을 촘촘하게 전개한다. 독자는 이 가족이 겪은 30년의 시간을 따라가 각자가 어떤 관계에서 어떻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안쓰럽지 않은 사람도 없다. 모든 비극은 누구도 일부러 만들지 않았지만 누구도 책임이 없지 않다. 죽은 리디아 본인 조차도.

 

정말 이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 치유의 길은 없나, 싶을 즈음에 작가는 고맙게도 각자의 상처에 빨간 약을 발라준다. 메릴린이 한나를 껴안고 제임스는 가정으로 돌아오고 잭과 네스는, 아마도 화해를 할 것이다. 상처에 바르는 빨간 약은 약 색깔 때문에 얼핏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낫고 있는 것이다. 요란한 빨간 약은, 고요한 내부의 상처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가족들은 저마다 격앙되고 흥분해서 요란한 일들을 저지르지만 그건 그들의 내면에 깊이 가라앉은 오래된 상처들이 치유되는 과정인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가 없어서 였다.

말로 할 수 없어서, 말로 하지 않아도 말없이 알아주던 것들이었다.

가족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 가족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았지만, 알아주는 일.

 

오늘 나의 가족들은 그리고 나 자신은, 가족들 서로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혹시 내가, 누군가 말하지 않는 일들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무심히 흘려 보내지 않았을까.

 

 

 

어젯밤에 네가 자러 간 뒤에 점검해봤거든. 23번이 틀렸던데, ?”

메릴린이 말했다.

5년 전에는, 1년 전에는, 심지어 6개월 전만 해도 리디아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오빠의 눈에서 연민을 봤다. 나도 알아. 나도 알아. 단 한 번의 깜빡임으로도 리디아의 시정을 알아차렸고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때 오빠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꽉 쥔 리디아의 손가락도 갑자기 붉어진 리디아의 눈가도 오빠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를 꿈꾸느라 리디아가 말하지 않는 일들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네스는 리디아의 마음속 소리를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뒤부터 리디아는 친구가 없었다.

223

 

 

네스는 여전히 잭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리디아는 이제 완전히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나에게 그 순간은 번뜩이는 번갯불처럼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해줬다. 오랫동안 갈망해온 탓에 한나는 그런 일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굶은 강아지가 음식 냄새를 맡으면 갑자기 콧구멍을 실룩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한나는 잘못 알 수가 없었다. 한나는 그 즉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사랑, 한쪽에서는 계속 상대를 향해 날리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 깊은 흠모.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이 어쨌든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는 조심스럽고 조용한 사랑. 한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랑이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한나의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밖으로 뻗어나와 숄처럼 잭을 감쌌지만, 잭은 눈치 채지 못했다. 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 멀리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2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한다.

이 말... 누가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봐야 할 필요를 못 느껴서 출처는 미상으로 두기로 한다. 어느 영화의 유행어처럼, 뭣이 중헌디. 저 말이 중하고 저 말을 한 이가 누구인지는 (지금 이순간에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기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린다라....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 자신이 되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거나, 못마땅한 현재를 견디거나.

 

돌연 채식을 하다 완전히 섭식을 끊기로 한 영혜는 투쟁하는 편을 택했다. (택했다기 보다는 사실, 그에겐 그 길밖에 없었다)

이 현재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이제까지 고수해온 취향, 식성, 습관, 성격, 가치관. 내가 몸 담아아온 세계와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의 질서, 그 사이에서 공유했던 정서와 규칙들. 그래서 현재에 투쟁한다는 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특히 가까운 사람들과), 세상의 질서와 어쩌면 온 우주와 싸우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 옆에서 현재에 투쟁하고 있을 때 당신은 그에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그의 싸움을 지지할 것인가,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방관할 것인가 

이 소설은 묻는다. 이 물음이 왜 중요하냐면 이때 폭력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영혜의 각성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 그녀의 명치에 대롱대롱 작은 목숨 하나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일이었다. 현재에 투쟁할 힘이 없어 견디기만 했던 그녀에게 꿈이 불을 당긴 것 뿐이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느꼈지만 한강은 인간의 폭력성을 서글프게 전달하는 특이한 작가다. 처참하게 피를 흘리는 살덩이를 그려 폭력이 나쁘다고 알리는 법이 없다. 다만 슬퍼하고 애끓는 어떤 목소리로 해치면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 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상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조차도 필요없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 하나로도, 아무 감정을 담지 않은 눈빛 하나로도 인간은 상대의 다리를 꺾어 다시는 못 일어서게 만들수도 있다. 애정을 가장한 간섭이나 예의를 가장한 경멸 같은 것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는 위로를 잠자코 들어야 하는 굴욕처럼 살면서 얼마든지 겪어야 하는 아픈 것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물론 살아가면서 이렇게 아픈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아픔을 달래주는 것들도, 치료해 새 살이 돋게 하는 것들도 분명 있다.

영혜의 언니가 생각한 것처럼, 그래서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죽일듯 미웠던 사람에게 아주 오랜 뒤에쓸쓸한 연민이 들기도 하고,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소리내어 웃기까지 하고.

어쩌면 이런 인간의 아이러니가 이 민감한 폭력의 바다에서도 인간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신이 배려한 유일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영혜보다는 영혜의 언니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허물고 꿈으로 건너가기 위해 미쳐버리는 대신, 현실에 투쟁하지만 미칠수는 없어서 굴욕과 경멸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영혜는 이름이 있지만 그녀의 언니는 이름이 없다.

왜 영혜는 영혜라는 고유의 이름으로 특정되었지만 그녀의 언니는 그러지 못했나.

어떤 인물로 특정되지 않아 내가 되기도 하고 내 지인이 되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도록, 그래서인가보다.

영혜처럼 살지 못하여 그녀의 언니처럼 살아가는 많은 우리를 위해 이름 없이 두었나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 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로잡은 주역 - 동양철학과 인문학의 고전 읽기
이중수 지음 / 별글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팔괘니 천간이니 하는 규칙들은 참 신비하다.

동생은 몇 년 생이니? 토끼띠에요. 아유, 언니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이런 대화가 가능한 문화권에서 살아왔으므로, 십이지나 갑을병정이니 하는 십간은 나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규칙이다. 그리고 때로 이런 규칙들로 풀어내는 운세, 사람 생의 흐름이 어느 정도 맞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토정비결이나 오늘의 운세 등에서 풀어내는 것들도 전혀 얼토당토한 것은 아닌 듯하다. 올해만 해도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병신년'으로 작년부터 우려도 많고 말도 많았는데 이름에 걸맞는 오만가지 사건들이 다 생기는 것을 보라.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주역에 대한 책을 읽게 된 건, 위에서 설명한 나의 성장배경 때문이다. 십간과 십이지가 지배하는 시간 속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런 질서의 근본이 되는 역학 체계가 어찌 아니 궁금할 수가 있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궁금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미래를 점치는 건 일기예보를 믿는 거와 같다고 생각한다. (기상청 디스 아닙니다) 큰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나 세세한 사건과 운명의 향방까지 예측하는 것은 신도 못하는 일이라고 감히 생각하며 살고 있다. 왜냐면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니까. 생각도, 선택도 변화무쌍한 존재, 그래서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바로잡은 주역>을 읽으면서 생소하고 복잡한 체계와 언제 읽어도 어려운 한문 덕에 머리가 복잡했다. 아직은 내가 감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싶어 포기하려던 나를 한 구절이 위로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입장과 주역이 바탕에 깔고 있는 미래에 대한 입장이 같다는 사실.

 

' [주역]이 보여주는 운명 예측은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 195쪽 에필로그

 

이런 공감대를 발견하고 나면 그때부터 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부쩍 재미있어지고, 흥미로워진다.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주역을 공부해보려고 시도했으나 매번 첫 장에서 낑낑대다가 포기하곤 했단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서야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이 부분에서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어려워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격려했다. 너가 이상한게 아니다... ㅠㅠ)

 

​​​이 책은 본격적으로 괘에 대한 부분 즉 본편을 들어가기 앞서 주역의 근간 사상을 먼저 익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주역의 철학을 담고 있는 계사전을 크게 두 덩이로 나누어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 나간다. 해석이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닌, 사상을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갈릴 듯 하다. 나의 경우에, 사상을 설명해주어서 오히려 읽기가 부담이 없었다. 동양 인문학을 읽는 느낌으로 주역이 사상적을 바탕하고 있는 세계관을 짚어 나갔다. 주역의 세계관을 읽어나가면서 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이 책이 그간 많은 군자와 학자들의 총애를 받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주역의 철학은 사람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하므로, 그 운명이 조금이라고 길한 쪽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옳은 행실을 하라고 가르친다.

 

미래를 점쳐보는 '' 자체도 흥미롭지만 '변화하는 인간'이라는 변수에 무게를 두되 이 변화를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지, 또한 나는 어떻게 변화해나갈 것인지를 고민해보는 주역의 근간도 아주 재미있다. 주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나, 주역의 철학이 궁금한 사람이 차분히 읽어볼 만하다.

  

 

 

    



"선한 일을 쌓지 않으면 족히 이름을 빛내지 못하고,

악한 일도 쌓이지 않으면 족히 몸을 망치지는 않으리니,

소인은 조금 선한 것을 유익함이 없다 하여 행하지 아니하며,

조금 악한 것은 (나쁘긴 하지만) 해가 적다 하여 그만두지 아니한다.

그런데 악이 쌓여 숨길 수 없게 되면 죄가 커져 풀 수가 없게 되니,

역이 이르되 `형틀을 짊어져서 귀가 없어지니 흉하다` 했다."

- 火雷噬嗑괘 上九 효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장에도 품격이 있다.

사람에게 그러한 것처럼.

문장이란 사람이 쓰는 것이라 문장의 품격은 다름아닌 사람의 품격에 달렸다.

그래서 문장의 품격을 만나게 되는 일은 멋있는 문장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멋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문장의 품격]이라는 책 제목을 읽는 순간, 나는 그런 기대에 설렜다. 멋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을 기회다!

 

조선의 문장가들은 무엇을 썼을까?

나는 오늘, 인스타00에 내가 만든 소품 사진 한 컷을 올리면서 짤막한 문장 몇 개를 썼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생각난 일정들을 다이어리에 짧게 정리해 썼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것들을 달력에 두 문장으로 써 넣고 지금은 이렇게 포스팅을 쓴다. 일기거나 일정이거나 sns거나.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런 기록들, 사소하고 즉흥적인 문장들이 지배하는 내 삶과는 달리 조선의 문장가들은 분명 뭔가 그들만의 특별한 글감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문장의 품격은 특별한 것을 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이렇게 일상을 쓰면,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내 삶에도 품격이란 것이 자라게 되나?

 

조선의 문장가들은 참 사소한 것들을 쓰고 그것을 주고 받았다. 집에 쌀이 없으니 좀 꿔주게, 이런 부탁을 하거나 '우리집에 서재를 새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글 좀 써주시오'라는 부탁에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이런 자랑글을 쓰기도 하고 벗을 위로하는 짧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일상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와는 접점도 교집합도 거의 없는 옛날 사람들이 쓴 이야기가 재미있을 줄이야.

재미 뿐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다. 애초에 글 잘 쓰는 기술에 대한 내용을 읽기 위해 이 책을 편게 아니었다. '품격 있는 문장'을 썼다고 알려진 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다 갔는지 궁금했다. 그런 나의 물음에 대해 이 책은 아주 적합한 답변을 해주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많은 글, 많은 문인들의 삶이 인상적이지만 이덕무와 이용휴의 글이 특히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청빈.. 말이 좋아 청빈이지. 쌀을 꾸면서 술도 있으면 좀 같이 보내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는 것이 그들의 나날들이었다. 그런 궁핍함 속에서 그들이 문장에 담은 것은 좁은 방의 답답함이 아니라, 조금만 몸의 위치를 바꿔도 사방이 바뀌는 이치의 신비함이었다. 좋은 재료로 빚었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되는 게 아니라, 좋은 것을 담았기 때문에 좋은 그릇이 되는 법이다. 문장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무엇을 생각하며 글을 쓸 것인가. 이 부분이 문장의 품격이 출발하는 지점이겠지.

 

시간이 지나 또다시, 글이 무엇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게 될 때 꺼내 보고 싶은 책이다.

 

 

아! 우임금도 풍속을 따라 바지를 멋었고 공자도 남을 따라 사냥을 하고 잡은 짐승을 비교해보았다. 대동하는 마당에 시세를 위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들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할 것인가? 아니다! 마땅히 이치를 따라야 한다. 이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에 있다. 범사에 반드시 자기 마음에 물어보라! 마음이 편안하면 이치가 허락한 것이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이치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만 한다면, 따라서 행하는 일이 올바르고 하늘의 법칙에 절로 부합할 것이며, 마음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도 기수(氣數: 저절로 오고 간다는 길흉화복의 운수)와 귀신이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이다.

69-7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