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통이라는 단어가 잘못 쓰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SNS의 세계를 마주할 때 특히 그렇다.

내가 제일 잘나가. 너보다 내가 더 행복해. 누구보다 내가 젤 멋져.

비교하고 자랑하고 깔아 뭉개고, 이런 것들은 서로 통하자는 단어의 목적을 애초에 부정하는 것 아닌가.

대중가사에서 너무 쉽게 쓰이는 이런 언어들에서 가시를 본다. 타인을 찔러 결국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가시들.

이런 언어들이 난무하는 격투기장을 구경하는 관객의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고뇌하는 햄릿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이 그렇지 않나. 어느 사이에, 햄릿이 내가 되고 내가 햄릿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격투기장을 구경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에, 내가 격투기장 한가운에데서 글로브를 끼고 서 있게 되고 마니까.

 

제일, 너보다, 누구보다...... 이런 상대적인 표현은 저런 데에 쓰이는 말이 아닐 것이다. 저 자리보다 더 나은 자리가 있을 것이다.

저 자리에서 저 단어들은 상대를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끌어내려지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버리고 마는 아이러니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고민에 빠지는가. 남보다 잘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남들 사는 만큼만 살자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언제나 비교 대상이 있다. 타자는 절대로 자아가 될 수 없는데, 자아를 주인공으로 세워야 할 나만의 무대에 타자가 올라선다. 자아를 주인공으로 삼지 못한 사람의 무대에 비교 대상으로 타자를 세우는 순간, 주인공이 뒤바뀌고 무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심연>은 그런 혼돈 속의 사람들에게 혼자 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라고 한다.

단절하고, 관철하고, 침묵을 발견하고 더 깊은 동굴 속에서 있어보라고 한다.

때로 그 공간은 누에 고치의 안쪽 처럼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그런 혼돈은 다음 세상으로 나가는 현관이라고, 그럴 때 심연이라는 깊은 못으로 들어가 자신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한다.

 

단편적인 영감을 제공하는, 좋은 느낌의 구절들이 있다. 각 주제별 도입페이지 마다 마하트마 간디나 키르케고르 등이 남긴 명언들이 아주 유익하다.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보라는 여러가지 가이드도 좋긴 하지만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막연하게 읽힐 수 있다.

구체적인 방안은 스스로 고찰해서 찾아보라는 저자의 의도가 있을수도 있겠다.

 

다만, 종교학자의 에세이여서 그런가. 경서나 원시 역사 등등에 대해 ' ~~ 그랬을 것이다.' 라거나 '~~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등의 자기만의 해석(문자 그대로 해석, 논거가 없다) 으로 글을 풀어 나간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부분은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과학적 미지와 영적 신비의 구분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적 미지의 영역을 '미지'라는 이유로 '영적 신비'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이 테오리아로부터 이론을 뜻하는 영어 단어 THEORY가 파생했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95쪽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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