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문제
J.A.홉슨 지음, 김정우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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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빈곤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우리 시대에 정확한 경제개념에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을 앞두고 배추와 과일값 등 생활물가가 거침없이 오르고 있는 중이다.

배추 한 포기에 만 원이 넘는다고 기사까지 난 마당이니, 가정경제마다 깊은 주름이 패이는 것은 말해 입아플 정도.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물가만 올라가니 이거 살수가 없다'는 시민들의 원성이 수년간 이어져 왔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냉수처럼 시원한 해법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이제까지 서민이라면 누구나 해온 이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야 할 거라는 예상이 들어 막막할 뿐이다.

 

이단적인 경제사상으로 학계의 배척을 받았다는 J.A.홉슨의 [빈곤의 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한 (비단 한국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현상이지만) 이 암담한 현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것같은 책이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의 이론과 주장을 비판했고 비난했다고 하나 인간은 항상 '뭣이 중헌디'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아주아주 나중에나 발견하게 되는 존재들 아닌가. 홉슨의 주장을 비판했던 학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나는 '가난'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도 풍족하고 부유하게 살아온 적이 없는 나의 궤적을 돌아볼 때 나는 가난해서 비극을 겪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은 흉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아예 살지 못할 정도의 그런 고됨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세상은 '가난'을 비극으로 만드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

실상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 먹을 것 입을 것이 진짜로 아무것도 없어서 궁핍한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빈곤층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이거다.

남들이 먹는 것을, 가진 차를, 입는 옷을 나는 못 먹고 못 가졌고 못 입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사이의 편차가 너무너무 크다. 이것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의 빈곤이다.

우리의 세상은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것''내가 갖고 싶은 게 없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사람들이 눈만 높아져서 그런 것이므로 욕심을 버리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부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행하는 횡포를, 갑이 을을 착취하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만원 짜리 점심을 먹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원짜리 점심을 먹으면서 빈곤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욕심이 많아서, 사치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5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5천원짜리 찌개라도 먹고 싶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네 연봉에 적합한 소비를 하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는 나쁜 자본주의다.

'풍요 속의 빈곤'은 사람들이 사치와 향락에 젖어서 생겨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밤낮없이 일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수준의 소비만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니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빈곤의 문제] 역시 이런 고민과 시름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2016년대의 문제에 대해 백년 전의 경제학자가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경제개념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빈곤과 빈곤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들 그리고 빈곤을 부르는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움이 된다.

다만 조금 심란한 것은, 우리가 빠진 이 궁핍한 시절에서 탈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매우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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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혁명 - 자긍심을 회복하는 순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최종희 옮김 / 국민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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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무엇이 사는가....

2016년 중반을 지나면서 내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질문이다.

내 안에 누가 사는가.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내내 저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람의 안에는 무엇이, 누가 살기에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치열하게 부정하고 파괴하고 증오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서로를 부정하는 감정만 있다면 괜찮은데 이 증오심은 동전의 다른 면 같아서 뒤집으면 거기에는 정반대의 한없는 애정과 자비와 포용이 있다. 대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겼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나 자신'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인간이며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고 어떤 이상을 품은 인간인가.

이런 질문을 아직도 하고 있다니, 너무 늦었다 싶다가도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런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같이 든다.

그러다가도 이 나이에 이러고 있는게 정상인가, 왜 나는 같은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으로 이어진다.

항상 정반대의 성질과 생각이 내 안에서 쉬지않고 충돌하고,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고 내 손으로 나 자신을 찢어 발겨야 하는 그런 순간들이 날마다 이어진다.

이런 고민 속에 어느새 나 자신, 내 자아, 내 자신은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한다. 나도 모르게 껍데기로 꽁꽁 나를 싸매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고 살다보면 우울함이라는 긴 터널의 출구가 점점 멀어져간다.

 

자존감이니 자긍심이니 이런 '자기애'를 연상시키는 단어와 개념들을 다룬 서적들이 홍수처럼 난무하는 걸 보면 나같은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셀프혁명>을 이런 시기에 만나게 된 건 행운이다.

 

미국 여성 운동을 이끌어 온 저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건 아니었다. 순전히 우연에 의한 인연으로, 나와 이 책은 만났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너무나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평화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저자 본인의 이야기, 대중이 기억하는 명사들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여성''존재'와 자긍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기계발서라고만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다정한 책이다.

 

어린 시절 내가 취급받았던 그 모습 그대로 성인이 된 내가 나를 취급한다는 분석이나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대접을 받는 영역에 자신을 가두고 그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마치 나에 대한 내용 같아서 내내 마음에 남았다.

 

사실 자긍심이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셀프혁명]이라는 멋진 책 속에서 자긍심을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는 (해줄 수 있는) 마음'이라고 정리했다.

 

나는 여기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내 손으로 해줄 수 있는 마음이라.....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만인과 만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는 어느 현자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굳이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라도, 이 책은 분명 소중히 여기며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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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웨어 - 생각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리처드 니스벳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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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 했다.

 

내 업무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는데, '자기 업무가 아직 정리가 안 되었고 내 업무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기 업무를 정리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자료를 줄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 답변은 한번에 받은 게 아니고, 3번에 걸친 자료 요청 끝에 받은 답이었다. 그리고는 파일 두 개를 보내왔다. 내가 필요한 자료의 한 10%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의 자료였다.

 

다소 빡친 나는 '자료를 따로 정리해달라는 게 아니라 너네 쪽에서 업무 진행을 하면서 쓰는 자료를 주면 내가 그걸 참고해서 내가 해야 하는 업무를 진행하면 되니 그냥 그걸 넘겨주면 된다. 만약 문의가 있다면 너에게 혹은 네 팀원들에게 문의를 하면 되고, 네가 너무 바쁘면 문의를 받아줄 다른 사람을 나와 연결해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나의 요청에 대해 그 동료는 자기들 팀이 전체적으로 다들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자기도 답변할 시간이 없을뿐더러 물론 팀원들도 내 문의에 답변할 시간이 없다. 팀원 보호 차원에서 내 문의를 받아줄 사람을 연결해줄 수 없다. 어차피 나중에 자료가 정리되니 그때를 기다려 달라. 이렇게 답했다.

 

매우 빡친 나는 그럼 내가 보고 따로 문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이해가능한 수준의 자료는 언제 전달해줄 수 있느냐? 물었더니 약 두 달 뒤라고 했다.

 

결국 빡이 치다 못해 폭발한 나는 메신저로 긴 항의문을 보냈다. 너의 업무 행태는 나에게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너는 네 업무 진행과 네 팀원을 보호하고자 한다고 하지만 지금 너의 행태는 나의 업무를 방해하고 나의 팀원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다. 그토록 바쁘시다니 너의 바쁨을 존중하여 이후로 너에게 자료요청 하지 않겠다. 짜이찌엔.

 

내가 폭발한 뇌세포를 추스를 사이도 없이 멘탈이 갈갈이 찢기는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이 후로 이 동료는 내 메시지 자체를 읽지를 않는 것이다. 전달사항을 아무리 보내도 확인하지 않았다. 안 읽은 메시지가 차곡 차곡 숫자로 쌓여가던 어느 날, 내가 찾아가서 물었다. 왜 메시지 확인 안 합니까?

그는 말했다. 확인 다 했고 다 읽었다. 자기가 답변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이 준비되면 답하려고 미확인으로 놔두었다고 한다. 메시지 답장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미확인으로 놔두었다고 한다.

 

그 답변을 듣고나서 알았다.

..... 이이는 나와 생각의 조직, 의식의 흐름 자체가 아예 다른 이로구나.

그리고 그를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로부터 저런 대답을 듣기 전까지 내가 보낸 미확인 메시지들이 달군 프라이팬처럼 얼마나 내 마음을 지글지글 볶았는데, 저 답을 듣고 나니 나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 답장해야 하는 걸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일주일이 다 되도록 미확인 메시지로 놔두셨군요! 이런 사려깊은 사람을 보았나.

 

보통 메시지가 오면 당장은 대답할 수 없더라도 일단, '확인하고 알려주겠다'고 답하는 게 예의라고 알고 있던 내가 병신이었나 보구나.

정말 핫한... 여러가지 의미에서 뜨거웠던 몇 주를 보내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생각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라는 의문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 저 심각한 의문에 빠져 있어! 그러니 나에게 답을 달라!

 

사람은 모든 수를 알 수 없다. 내 앞에는 언제나 여러가지의 수가 있다. 상수가 있고 변수가 있고 허수가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수를 다 읽기엔,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고 편협하다.

상수인 줄 알았던 요소가 어느 날 어떤 감정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다시 보니 허수였던 적도 있고, 변수라고 생각했던 요소가 그를 둘러싼 상황을 전체적으로 다시 파악하고 나니 상수였구나, 싶은 적도 있다.

 

저자가 본문에 쓴 것처럼 상관관계, 인과관계 등등을 정확하게 측정하기란 정말 대단히 어렵다. 그 대단한 셜록도 추리를 틀리잖아.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자료가 충분해도 추측이 잘못되기 쉽고 이때 추측을 주도하는 당사자의 감정상태에 따라서 결과도 너무나 큰 편차가 나타난다.

저자는 이런 '사고'의 오류를 파고들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상황과 감정, 경험과 편견 등에 발목을 잡혀 잘못 판단하게 되는 일들을 두고, 그런 때에 보다 정확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논리적 사고를 자세히 풀어낸 책 같기도 하고 합리적 판단에 대해 안내하는 책 같기도 하다. 유익하고 어떤 부분은 엄청 재미있는데 문제는 조금 읽기가 어렵다.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책은 아닌데 좀 어렵다.

 

책이 어려워서 집중하고 읽어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책의 안내에 따라 내가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한 여러가지 상황과 정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어쨌건 이 책을 읽으면서 불쾌했던 감정을 많이 누그러졌다. 주의할 점이라면, 누그러졌다는 것이지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서 나에게 여전히 그 동료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생각 체계를 가진 존재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 진짜.... 사는 건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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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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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라는 단어가 잘못 쓰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있다. SNS의 세계를 마주할 때 특히 그렇다.

내가 제일 잘나가. 너보다 내가 더 행복해. 누구보다 내가 젤 멋져.

비교하고 자랑하고 깔아 뭉개고, 이런 것들은 서로 통하자는 단어의 목적을 애초에 부정하는 것 아닌가.

대중가사에서 너무 쉽게 쓰이는 이런 언어들에서 가시를 본다. 타인을 찔러 결국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가시들.

이런 언어들이 난무하는 격투기장을 구경하는 관객의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고뇌하는 햄릿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이 그렇지 않나. 어느 사이에, 햄릿이 내가 되고 내가 햄릿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격투기장을 구경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사이에, 내가 격투기장 한가운에데서 글로브를 끼고 서 있게 되고 마니까.

 

제일, 너보다, 누구보다...... 이런 상대적인 표현은 저런 데에 쓰이는 말이 아닐 것이다. 저 자리보다 더 나은 자리가 있을 것이다.

저 자리에서 저 단어들은 상대를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끌어내려지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버리고 마는 아이러니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고민에 빠지는가. 남보다 잘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남들 사는 만큼만 살자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언제나 비교 대상이 있다. 타자는 절대로 자아가 될 수 없는데, 자아를 주인공으로 세워야 할 나만의 무대에 타자가 올라선다. 자아를 주인공으로 삼지 못한 사람의 무대에 비교 대상으로 타자를 세우는 순간, 주인공이 뒤바뀌고 무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심연>은 그런 혼돈 속의 사람들에게 혼자 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보라고 한다.

단절하고, 관철하고, 침묵을 발견하고 더 깊은 동굴 속에서 있어보라고 한다.

때로 그 공간은 누에 고치의 안쪽 처럼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그런 혼돈은 다음 세상으로 나가는 현관이라고, 그럴 때 심연이라는 깊은 못으로 들어가 자신을 발견해내야 한다고 한다.

 

단편적인 영감을 제공하는, 좋은 느낌의 구절들이 있다. 각 주제별 도입페이지 마다 마하트마 간디나 키르케고르 등이 남긴 명언들이 아주 유익하다.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보라는 여러가지 가이드도 좋긴 하지만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막연하게 읽힐 수 있다.

구체적인 방안은 스스로 고찰해서 찾아보라는 저자의 의도가 있을수도 있겠다.

 

다만, 종교학자의 에세이여서 그런가. 경서나 원시 역사 등등에 대해 ' ~~ 그랬을 것이다.' 라거나 '~~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등의 자기만의 해석(문자 그대로 해석, 논거가 없다) 으로 글을 풀어 나간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부분은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과학적 미지와 영적 신비의 구분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과학적 미지의 영역을 '미지'라는 이유로 '영적 신비'의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이 테오리아로부터 이론을 뜻하는 영어 단어 THEORY가 파생했다. 이론이란 고착된 편견이나 굳어진 도그마가 아니다.
95쪽 묵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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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순, 고귀한 인생 한 그릇 - 평범한 인생을 귀하게 만든 한식 대가의 마음 수업 인플루엔셜 대가의 지혜 시리즈
심영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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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심 선생님이 책을 내셨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과정을 적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조물조물 무쳐냈다.

범상한 밥 한 그릇이 고귀한 인생 한 그릇이 되기까지의 여정이다.

 

예전에 김치견문록이라는 책을 읽고는 한동안 김치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끙끙 앓았다.

김치의 세계는 정말 넓고도 깊었다.

배추도 무도 그냥 밭에서 나는 듬직한 풀떼기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자연이였고 우주였고 삼라만상의 섭리였고 후에는 인생이 되기까지 하는 생명체였다. 식재료가 야물어가는 과정, 산지에서 캐어져서 다듬어지는 과정, 그 재료들을 혼합하여 맛깔나게 요리하는 과정. 그 어느 하나 흥미롭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이 요리 자체가 한국인의 정서요 한국인의 얼이라고 짚어낸 부분이었다. 김치는 한국인들이 만들어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요리라는 게 아니라, 한국인의 혼에서 혼으로 이어온 한국만의 정서가 뿌리깊게 담겨 있는 요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국요리였다.

심영순 선생의 책에서 나는 그때 느꼈던 '한국인의 맛'을 보다 명확하게 발견했다. 심 선생은 '한국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맛'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맛, 그 요리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한국요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문화인지를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음식을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나는 네가 한국 음식을 제대로 배웠으면 했다. 여기는 그만 다녀라라고 말씀하셨지요. 결국 어머니는 다음 달 학원 등록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이 말씀은 70년 나의 요리 인생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요리는 언어나 관습과 마찬가지로 그 나라 사람들의 정체성이라 말할 수 있지요. 요리 문화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고작 먹는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생각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나물을 즐겨 먹고 국물을 좋아하고 김치 없이 밥을 못 먹고 된장, 간장, 젓갈 등의 발효 양념을 먹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기질, DNA와 다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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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든 사람이든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반 세기에 걸친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정체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아직도 다리를 절듯 반쪽자리 생을 살고 있는 나라다. 온전치 못한 정체성 때문에 많은 비극과 사건들로 시끄러운 나라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더 가슴이 저렸는지도 모른다.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창씨개명까지 해야했던 어머니와 그 어머니 아래에서 대한민국의 복잡한 근현대를 오롯이 걸어온 어머니와 딸(심영순 선생의 어머니와 심 선생)의 이야기가 어떻게든 정체성 한 조각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한 우리나라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요리 그 자체를 경외하고 요리에 혼을 담아 마침내는 그 정성으로 사람의 구석구석 반듯하고 바른 혼을 불어넣는 모녀가 보여주는 인생의 자세가 너무나 희귀해진 우리 사회가 애닳아서였기도 하다.

[심영순, 고귀한 인생 한 그릇]은 꼼꼼히 읽을수록 유익하고 재미있다. 계란장조림을 맛있게 하려면 생계란을 장아찌로 담궜다가 먹을 때 익혀내면 탄력이 있고 좋다 등의 요리팁은 물론이고 정성스러운 요리가 사람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담겨있다. 요리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도, 아름다운 인생의 자세를 배우고 싶은 사람도, 한국요리의 특징과 정체성을 알고 싶은 사람도 모두 재미있게 읽고 많은 것들을 느끼게 될 책이다.

 

 

요리를 해준다는 것은 함께 있어준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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