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읽는 심리학 - 그리스부터 북유럽 신화까지
리스 그린.줄리엔 샤만버크 지음, 서경의 옮김 / 유아이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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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우리 집에 만화로 된 그리스신화 전집이 있었다.

여섯 살의 나는 그리스 여신들의 아름다운 의상과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에 매혹되어 그 책을 참 즐겨읽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화 그 자체를 즐겼다기 보다는 만화로 그려진 여신들의 모습을 즐겼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다. 그때 읽었던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그랬기에 청소년기에 접했던 그리스 신화는 왠걸,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게 신들의 이야기라고?

나중에야 그것은 신이라는 거죽 아래 다사다난한 인간사를 켜켜이 담아낸 이야기라는 해석을 듣고 나서 그리스 신화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화로 읽는 심리학' 서문에서 저자들이 쓴 바, 신화는 인생의 거울이다.

신이라고 이름지었지만 사실 모두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 한없이 너그러운 듯 하나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러면서도 또 한계없는 동정과 포용을 베풀수도 있는, 그런 아이러니하고 알쏭달쏭한 인간. 나 역시 그런 인간이고, 이 지구상에 바글바글한 사람들 역시 모두가 그런 인간들이기에 사람들은 신화를 좋아할 수 밖에 없나보다.

 

'신화로 읽는 심리학'52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심리의 다채로운 얼굴을 엿보고자 한 책이다. 에피소드는 그리스 신화가 메인이지만 그외에 아프리카 민족의 전통신화, 성경, 중동지역 고대 신화 등등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들까지 한데 모았다. 그래서 심리학 안내라는 책의 집필 목적을 잊고 읽다보면 다양한 신화를 읽는 그 자체로 매우 재미있다.

 

신화를 통해 인간의 심리 곧 나의 심리를 이해하고 나의 내면을 바꾸는 방법으로 쓰겠다고 한 저자들의 의도도 매우 좋다. 이야기란 항상, 인간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어온 가장 전통적인 거울이니까.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들의 해석에 의문을 표하게 되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해석하여 아주 단편적인 방향으로만 인간의 심리와 관계에 적용해 놓았다. 평면적 해석에만 그치면 다행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실제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제일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카인과 아벨 에피소드였다.

저자들은 여기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형제 갈등으로 보고 이 형제 갈등을 촉발한 것이 편애하는 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나님이 카인이 제사로 올린 곡식은 안 받고 아벨이 제사로 올린 양은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곡식보다 양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하나님이 카인보다 아벨을 더 사랑했다고 한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부모가 자녀를 편애했을 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경고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창세기 45절에서 8절에 읽어보면 하나님이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은 이유가 분명히 나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카인의 제사가 거부된 이유는 신이 아벨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카인이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카인과 아벨 에피소드는 형제간 갈등도 아니고 편애하는 신의 문제도 아니라 인간과 죄의 문제다. (그걸 왜곡해서 저렇게 책으로 내다니, 그것도 심리학 서적으로. 책 나오기 전에 감수 안 보나.)

 

이렇게 나의 내면에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오십 편이 넘는 다양한 신화들을 한 권으로 주르륵 훑어볼 수 있다는 책이라는 것에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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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독한 오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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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다가 아니면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그런 순간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거기서 내가 그런 말을 했어야, 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때 그 순간에 내가 네 손을 말없이 잡았어야, 혹은 놓았어야 했나.

내가 아무 준비 없이 마주한 뒤 순식간에 놓아버려야 했던, 의미 없는 일상이라고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고 여겼던 그런 순간들이 실은 아주 결정적인 한 때 였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내려앉는다.

흘러가도록 무심하게 지켜보았던 순간들이 실은 그렇게 무심하게 굴면 안되는 순간들이었다고, 시간이 말해주는 그런 때마다 후회나 분노 어쩌면 두려움 같은 것들이 선명해진다.

대부분 그런 순간들은 나의 혹은 상대의 진심이 드러나는 때다. 그런 순간을 그 당시에 알아채지 못했던 건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왜냐면 나에게 혹은 상대가 간직했던 진심이 그런 얼굴, 그런 말일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리안 모리아티의 작품이 흡인력을 갖는 건 그런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보여주기 때문일터다. 모리아티는 작품 속 등장인물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각자의 의식과 감정의 파도를 촘촘하게 늘어뜨리다 서로의 인식 혹은 감정이 맞닦드리는 그 순간을 민첩하게 엮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엮인 그물 속에 독자는 기꺼이 낚이게 되는 것이고.

 

6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호기심 많은 독자가 덥썩 물 미끼들을 충실하게 던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3쌍의 부부들이 함께 벌인 바비큐 파티라는 '그 날' 즉 과거와 그 이후 혼란과 후회 그리고 분노 속에서 갈등하는 현재의 시간이 촘촘하게 교차된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에서 출발한 나의 궁금증은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 서로의 진심은 대체 뭐야?'로 전환되었다. 사건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아, 결국 나는 이 책의 마지막까지 쉼없이 읽어갔다. 직업이나 삶의 모습, 형편 등 겉으로는 이상적이고 평온해보이는 호주 중산층의 삶은 매우 피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호주 중산층만의 일이랴. 어릴 때부터 삼십대인 지금까지 서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 그리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는 클레멘타인과 에리카의 사이는 뭐라고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다. 친구일까, 적일까.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감정은 적의인가, 호의인가.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질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일까. 저자의 성실하고 짜임새 있는 전개와 문장, 묘사 덕분에 저런 의문들은 클레멘타인과 에리카 사이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관계를 바라볼 때마다 바쁘게 떠올랐다. 제일 흥미로운 인물이었던 해리. 그가 그의 이웃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인가, 질투인가 아니면 그리움,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인가.

 

모든 감정은 한 가지 얼굴을 하지 않는다. 애정에는 질투와 두려움, 분노가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고 분노에는 공포와 애착 등의 감정들이 어깨를 같이 한다. 단지 한 가지 감정에 매몰된 내가 혹은 우리들이 그 복잡다양한 얼굴과 표정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람이란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표정과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오랜만에 사람이 궁금해지는 마음으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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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콘서트 : 핵, 과학이 만든 괴물 - 지식의 신세계로 떠나는 오싹한 호기심 여행 잡학 콘서트 시리즈 1
공공인문학포럼 지음 / 스타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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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 때부터 고립주의를 표방했던 트럼프가 결국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지금, 한국은 그야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 속에 갇힌 느낌이다.

이전의 그 어떤 대통령과도 판이하게 다른 트럼프라는 새로운 인물이 세계 패권을 쥐게 된 상황에, 있는 눈치 없는 눈치 죄다 발휘해가며 앞날을 모색해도 모자랄 판에.

바지대통령에 열받은 국민들은 추위도 막지 못한 뜨거운 촛불을 들고 청와대 앞으로 달려가고 대통령은 죽어도 자기자리 못 내놓겠다며 배째라로 일관.

상심한 국민들이 지갑을 닫고, 이름 밖에 없는 대통령은 그나마 있는 이름이라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계시느라 나라 일은 뒷전(이라고 썼지만, 이 분은 아마 취임 이후에 내내 나라 살림에는 뒷전이셨을 거라고 추측된다) . 이러니 덩달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외교 역시 모두 일시정지 상태일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가 급변하는 이 마당에 외교까지 마비상태니 한국이란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그나마도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는 거 아닐까, 걱정이 들던 차에오늘 아침에 한 기사를 읽었다.

한국이 국제 외교에서 특히 대북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소외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니 외교니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나라 앞날이 이렇게 막막한데....... 어찌 할까나.

이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전혀 위로해 주지 않는, 희망이라곤 절대 주지 않는 책 한권을 읽었다.

 

잡학콘서트라는 제목 뒤에 ''이라는 주제를 품은 이 책은 핵의 탄생을 시작으로 현재 국제사회에서 핵의 영향력, 핵 보유국과 그들의 관계 등에 대해 정리한 핵의 상식사전 같은 책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핵실험을 하는 북한을 정수리에 두고 살면서도 핵에 그다지 큰 관심도, 두려움도 없다. 나는 이게 우리가 핵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잠시 외국에 지낼 때가 있었는데, 언젠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서 세계가 북한 미사일 뉴스로 뒤숭숭했었다. 하필 그때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옆집 사람들은 진심으로 걱정을 해주었다. '지금 한국에 꼭 들어가야하니? 전쟁이 날 것 같아. 너무 위험해. 무섭지 않니? ' 나는 정말 무섭지가 않았다. '괜찮어. 북한이 뭐 하루이틀 저랬나? 늘 그러는 애들이야.'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그때 나는 정말 저렇게 대답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국제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같은 땅을 함께 쓰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만큼은 최소한이라도 알고 지내려고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시선이 아닌, 외국인들의 시선에서 북한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예측이 안되기 때문에 더더욱) 무서운 존재인지를 경험하고 나서였기 때문인 듯하다.

 

북한을 이해하려면 핵을 이해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참 반갑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저자인 공공인문학포럼의 목소리대로 우리나라에는 대중이 핵과 핵문제, 핵이 불러온 관계들을 이해하게 해주는 변변한 서적이나 매체가 적다. (없다고는 못하겠다. 나도 모든 책을 다 찾아본 건 아니니까) 이 책의 등장은 그렇기에 더 반갑다.

 

이 책은, 핵이 세상에 태어나던 그 때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재의 핵보유국, 핵을 보유하려고 노력하는 나라들(특히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의 등장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비롯되는 서울의 핵 공격 가상 시나리오 등등으로 이어진다. 중간에 북한의 화학무기에 대한 꼭지는 굳이 넣지 않아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 책 전체에 핵을 중심으로 파생되는 다양한 주제의 이모저모를 잘 담았다. 특히 핵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충분히 설명하고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핵의 참혹한 실상을 감추고 있다는 부분으로 책을 마무리 지은 부분은 정말 좋았다.

 

핵이라는 가공할 무기는 이미 지구상에 너무 많고 너무 충동적이고 책임감없는 리더들이 핵무기의 조종대를 손에 쥐고 있다. 더 두려운 일은 IS와 같은 일당들이 실제로 핵무기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핵무기 암시장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당장 오늘밤에라도 지구 어딘선가 핵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현실. 본문 중에 인도는 평화 목적으로 핵실험을 하고 핵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구상의 모든 핵은 반드시, 되도록 빨리 폐기되어야 한다. 핵을 빨리 폐기하지 않으면 정말 핵이 지구를 폐기해버릴 테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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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섹시해지는 인문학 지도 - 막힘없는 상식을 위한 14개의 교양 노선도
뤼크 드 브라방데르.안 미콜라이자크 지음,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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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섹녀니 뇌섹남이니, 이젠 뇌까지 섹시해야 하는 세상이구나.

몸도, 얼굴도 섹시하지 못하면 머리라도 섹시해야 된다는 어떤 강요 같아서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나아가 몸도, 얼굴도 그리고 머리까지 섹시해야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씁쓸하다. 셋 중에 하나도 힘든 사람은 어쩌라는 말? 그래도 몸이건 얼굴이건 섹시해지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비해 뇌가 섹시해지는 데에 드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좀 다행이라 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건 단순히, 뇌가 섹시하다는 수준에 대한 내 기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뇌가 섹시해지는 데에 드는 비용은 몸이나 얼굴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섹시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일 수 있다. 내가 모를 뿐이겠지.)

 

'섹시'라는 단어에 사로 잡혀서 헛소리가 좀 길었는데. 이 책은 서양 철학사의 흐름과 계보를 지하철노선처럼 정리한, 참신한 시도를 했다. 두 명의 저자는 서울 지하도처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철학자들과 이론들을 열 네 개의 노선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이 책을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그런 서적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막힘없는 상식을 위한 14개의 교양 노선도'다. 상식과 교양이라는 수준에 철학의 계보를 정리했단 뜻이다.

노선명은 꽤 재미나다. 철학, 심리학, 인식론, 윤리학 등등 일반적으로 쉽게 연상 가능한 노선명도 있지만 기술, 미래학, 유머 같이 꽤 흥미로운 노선명도 있다. 두 저자는 지식열차에 독자를 태우고 그들의 경의와 유머를 가듬 담은 14개 호선을 따라 수많은 역을 지난다.

  여기서 역은 철학자다. 플라톤, 마르크스, 헤겔, 데카르트 등 낯익은 역들도 많지만 프레게, 카너먼, 앵포뒥 같이 생소한 역들도 많다. 나의 경우에는 생소한 역이 매우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좀더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 얕은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이 훨씬 재미있었으리라는 아쉬움에 내내 시달렸다. 저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다루려는 영역 외의 인물인 공자나 채플린 등의 인물까지도 철학계보 전반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위하여 역에 포함시켰다. 노선명 즉 주제에 따라 철학자들을 배열했기에, 이 주제와 저 주제가 접점을 이루거나 혹은 한 철학자가 여러 주제에 정통한 경우가 있기에 지식열차에는 환승역이 꽤 여러군데가 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베이컨 등은 많은 노선이 한 곳에서 만나는 유명한 환승역이고 러셀, 칸트, 헤겔 등의 환승역도 노선의 주요 위치에서 자주 만난다.

 

책 맨 뒤에 전체 노선도를 실어 두었는데, 여기서 두 저자가 이 책을 위하여 들인 노력이 정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철학사를 이렇게 집대성해보겠다는 집념이 없었다면 이렇게 못했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안타깝지만, 나는 뇌섹해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절학자들이나 이론가, 인물들의 절반 이상은 알아야 책이 재미있게 읽힐 것이다. 책 뒤에 부록처럼 인명 설명꼭지를 실어두긴 했지만 이 책에 낯선 인물들이 하나하나 등장할 때마다 따로 찾아보면서 읽어나가는 건 좀 흥이 깬다.

언젠가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막힘없는 상식과 교양 속에서 행복해하며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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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대문 : 사서 편 -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동양고전의 답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1
박재희 지음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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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기본경전을 사서삼경이라고 이른다.

삼경은 시경, 서경, 주역을, 사서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낫은 농사의 도구가 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녹슨 쇠붙이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듯이,

책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답을 찾는 이에게는 답을 주고, 비결을 찾는 이에게는 비결을 주는 것.

아무리 고전이 좋다, 고전을 읽자..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목적와 용도를 정확히 인지하고 책을 펴는 자에게라야 책은 속내를 보여주는 법이다.

 

동양고전이든 서양철학서든 어쨌건 현재의 삶이 궁한 자가 답을 구하는 마음으로 혹은 비결에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편다면 답이든 비결이든 책도 응답한다.

<고전의 대문> 이 책도 그렇다.

 

올해 여러 고전 입문서와 철학서들을 읽어온 터라, 나는 좀 지쳐있었나보다.

고전의 대문이라고 지은 책 제목도,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카피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간신히 책을 펴서 몇 글자 읽었지만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닫혀 있었던 내 마음의 대문을 연 것은 한 글자였다. ''

 

독서에 흥이 떨어진지 오래였던 나에게 다시 흥을 채워준 건, 저 마법의 한 글자였다.

그래, 뭐든지 흥이 나야 잘 되고 오래 한다.

 

이 책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 고전을 해설한다. 각 고전에 수록된 내용을 해설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 책들이 지어진 배경과 저자의 일대기까지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각 고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준다. 그러면서 서양 학자의 책이나 견해들까지 곁들여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을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저자는 ''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흥은 하늘이 부여한 덕이며 인간에게 내재된 성이라고,

'자본주의에서 자본은 한계가 있는 자원이지만 흥본주의 사회에서 흥은 한계가 없는 자원'이기에 흥을 통한 개인의 혁명, 우리 사회 전체의 나아가 세계의 혁명을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이토록 강조한 흥을 독자에게 불어넣기 위해 저자는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해설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종교서와 같은 느낌까지 주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은 내가 지금껏 읽어왔던 사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해설 속에서 사서는, 그 옛날 머리에 상투 튼 선비들이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앉아서 읽었던 케케묵은 책이 아니라 혼란했던 세상 속에서 빛을 구했던 선진들의 전언으로 부활한다.

 

고전은 잠시 유행하였다 사라지는 베스트셀러와는 다릅니다. 베스트셀러는 트렌드를 반영하여 그 시기가 지나면 바로 잊혀지지만 고전은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습니다. 이것이 요즘처럼 지속 가능 경영, 지속 가능 기업, 지속적인 건강, 지속적인 승리, 이런 것들을 원하는 시대에 고전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고전에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보편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77

 

인간은 바닥을 쳐야 자기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안락과 평화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이룰 수 없습니다. ‘궁즉변窮卽變’, 주역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서지고 망가지고 궁해져야 변합니다. 저는 공자의 이말이 참 좋습니다.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해주려고 하는 전환점이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가서 그동안 못 봤던 그 천하를 보았습니다. 노나라 궁정에서 안주하며 로컬 지식인으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다가 유랑을 통해 태산에 올라가는 순간 자기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지식인으로 부활하였던 것입니다. <장자>에는 시각과 관점의 높이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해주는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모두라고 생각하여 더 큰 하늘을 보지 못하고, 여름에만 살다 가는 벌레는 자신이 사는 여름이란 시간에 갇혀 겨울과 얼음이라는 계절과 물질을 상상하지 못하고, 시골 동네 지식인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그물에 걸려 더 큰 지식과 만나지 못한다.’ 엘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강조한 일명 시간, 공간, 지식, 기반의 그물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부의 혁명의 시대에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의 속도와 공간, 지식의 기반을 부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82

 

무엇을 구하며 책을 읽는가에 따라, 책은 모습을 바꾼다.

저자가 서문에서 나에게 ''을 던지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이제껏 읽어왔던 다른 동양고전서와 별 다름없는 책으로 읽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흥의 전구를 켠 덕에 나는 고전의 문 하나 하나를 다시 열어 내 안의 흥을 완전히 깨울 선진들의 흥을 찾으며 책을 읽었다.

 

고전은 역시 재미있는 것이고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며 때로 마음이 지칠 때 그것을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고전에 대한 애정의 부활은 어쩌면 마중물이 되어 일상에 대한 (삶에 대한) 애정의 부활도 불러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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