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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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좋았던 어제,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다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잠시 신호대기 중이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보시던 엄마는 차가 멈춰 있는 동안은 말이 없으시더니 차가 출발하자 조용히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왜 전쟁기념관이라고 했을까? 나는 항상 저 말이 이상했어.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 건가? 무슨 좋은 날처럼?” 나는 대답으로 적당한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운전만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쟁은 기념해야할 게 아니니까.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쇠에 생긴 녹은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치운다. 자전거 어딘가에 작은 녹이 슬었을 때, 그걸 내버려두면 결국 자전거 전신이 다 녹이 슬어 버린다. 녹슬어 폐물이 된 자전거처럼 전쟁은 녹이 되어 우리를 먹어 치워왔다. 전쟁은 사람에게서 나서 사람을 먹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말 수만 마디로 전쟁의 포악함을 설명한들 그것을 직접 겪어보는 단 몇 초의 순간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세우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들을 꾸준히 쓰고 발표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과 기억 속에 전쟁의 이러저러함을 간직하려 한다. 우리는 저토록 무서운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전쟁이 정말 두려운 이유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후에 남겨지는 것들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남고 싶지만, 살아남은 이후에 겪어야 할 일들이 더욱 혹독한 게 전쟁 아닌가. 심하게 녹이 슨 자전거는 아무리 닦아도 녹슨 흉물로 남듯이, 전쟁이라는 녹이 삼킨 후에 남겨진 폐허란 어떻게 바라보아도 폐허일 뿐 새로운 시작이니 희망이니 평화니 하는 빛나는 것들로 감히 덧칠할 수 없다. 그 폐허는 하인리히 뵐이 [천사는 침묵했다] 속에서 묘사한 청소하는 장면과 같다.

 

 

 그녀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고투를 계속했고, 물 양동이를 부지런히 날랐다. 속으로는 무의미한 짓거리라는 걸 알았다. 청소를 할수록 지저분한 얼룩이 드러났고, 부스러기가 자꾸만 새로 떨어져내렸다. (중략)
 엄청나게 많은 먼지와 석회가루가 다시 떨어질 테고, 그렇게 바닥에 쌓인 석회가루가 물을 먹으면 다시 소생해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하얀 얼룩으로 변할 테고, 그런 얼룩은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터였다……
책 174-175쪽

 

 

 전쟁 중에 아기를 잃은 레기나는 전쟁의 포화로 석회먼지를 뒤집어쓴 침실을 청소하려 나섰다. 그러나 양동이로 끝없이 물을 퍼나르며 침실 바닥으로 떨어진 먼지와 쓰레기들을 치웠지만 깨끗한 물을 퍼서 들어올 때마다 기이함을 느꼈다. 청소하지 않은 바닥은 고르게 어두운 색으로, 청소한 바닥은 도리어 얼룩덜룩해져서 추레하고 볼썽 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이 고역을 끝낸 후에 남는 건 녹초가 된 몸과 무의미한 짓거리를 했다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폐허는 치우고 치우고 또 치워도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 오물이다. 폐허가 된 마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스 슈니츨러는 서점 관리인 자격증에 합격하고 휴가를 즐기던 중에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그와 어머니가 함께 살던 집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주택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한가한 휴일의 그 날, 한스의 인생은 한스와는 상의도 없이 전혀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었다. 학교와 책 밖에 몰랐던 한스는 참전 중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아내와는 제대로 된 신혼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열차 폭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도, 가족도, 그가 알던 풍경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너진 건물, 불타서 식은 재, 석회가루와 돌 부스러기, 축축한 오물 그리고 냄새였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한스의 마음 속에서 비극은 현재진행 중이었다. 아니, 한스의 마음 뿐 아니라 모두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비극이 진행 중이었다. 하인리히 뵐은 전쟁 자체의 폭력을 고발하는 대신 전쟁 후에 남겨진 폐허의 이면을 면밀히 묘사함으로써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하게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다. 보통 사람들의 비극을 묘사하는 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건 오물 냄새다. 하인리히 뵐은 눈으로 그려지는 풍경 속에 눈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냄새를 입혀 전쟁 후의 폐허를 전달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면 신을 찾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신을 부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소식 앞에 신은 대체 무얼하고 있냐고 원망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 신의 말은 죽었고 그 침묵의 크기만큼 전쟁은 소란하다. 어쩌면 사람을 먹어치우는 전쟁이 그토록 시끄러운 탓에 신은 그 자신조차도 원치 않는 침묵 속에 빠지는 건지도 모른다. [천사는 침묵했다]에는 신을 머리를 진창에 처박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치당에 들어가 부역한 피셔 박사는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안전 속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지식인이다. 전쟁 중에 ‘인생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던 인물이며 전쟁이 끝난 후로는 만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서 역겨울 정도라고 독백한다. 그러나 억세게 운수가 좋은 이 사람 역시 오물 냄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태를 통해 구축한 재물을 넣어둔 금고를 여닫을 때마다 그는 돈에서 냄새를 맡는다. 사창가라는 개념이 떠오르는 냄새, 피 냄새, 오물 냄새.

 

 

 

 이런 오물 냄새 속에서 한스는 레기나를 만나 서로의 아픔을 동감하며 두 번째 사랑을 결심하는 한편 나치 부역자인 피셔 박사는 천사를 짓밟고 선채로 승승장구한다. 폐허가 된 사람들과 청산되지 못한 전쟁의 흔적, 건물의 잔해더미에서 돋은 풀포기 같은 사랑. [천사는 침묵했다]는 전쟁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 그 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미약한 뿌리를 간신히 내린 풀꽃 같은 희망도 있지만 천사를 진창에 틀어박고 자신들은 고고하고 역겨운 삶을 이어가는 적폐도 있다. 비애로 가득한 전쟁의 참담함보다 우리가 더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이상으로 파괴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천사를 침묵했다]를 통해 청산해야 할 것은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그의 작가적 양심은 무척이나 단호하고 날카로웠고 이는 그의 작품과 사회 활동에 잘 드러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천사는 침묵했다] 말미에 실린 임홍배 교수의 작품해설은 작가 하인리히 뵐의 활동과 그의 작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 초반에 전후의 폐허문학을 돌이켜보면서 하인리히 뵐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언명한바 있다. 전후 냉전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았던 뵐은 독일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뵐의 문학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탐색은 그만큼 더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249쪽 

 

 

 뵐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평생에 걸쳐 탐색하는 데에 빌린 도구는 문학이었다. 사람의 존재는 언어라는 형체를 입고, 이 언어가 직조되어 완성된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살아있다. 생물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생물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과 유형의 생물이 공존하여 생태계가 더욱 건강하고 보다 오래 존속된다는 개념이다. 문학의 생태계에도 생물 다양성이 적용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류의 문학이 공존하는 세계는 보다 건강한 언어들의 세상이지 않을까. 전세계의 다양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굴, 재평가하여 한국 문학계에 공급하고,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다시 그리려는 창비세계문학의 시도는 바로 이 생물 다양성의 개념과 통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려 했던 뵐의 작가적 지향점 역시 이러한 시도와 통한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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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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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사설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최근작이다. 이름이 장르소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야베 미유키가 수년간 애정을 담아 이어가고 있는 시리즈다. 스기무라는 야마나시 현의 평범한 출신으로 출판사를 다니던 중 재벌가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한 신데렐라다. 그러나 대기업 총수인 장인이라는 후광을 마음놓고 즐기는 성정이 못되는 인물이 이 스기무라 시부로다. 장인의 운전기사 사망 사건을 조사하며 어설픈 탐정 역할을 하던 그가 이혼 후 본격적으로 사설 탐정 새내기가 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평범하고 다소 유약해보이기까지 한 인물이 자기 인생의 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자기와 비슷하게 평범한 주변 인간들의 사건 사고를 추적해가는 이야기들이다.

 

 미야베 미유키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다. 보통 사람의 지극히 보통의 악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그 양반은 법 없이도 살 착한 양반’이라거나 ‘걔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순진한 아이’라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나? 아직도? 사람은 누구나 특수한 환경에 처하거나 어떤 파격적인 계기 등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선택이나 행동을 한다. 그게 사람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촘촘한 사건과 계기를 깔아두고 그 위에 이러한 사람의 특수성을 끌어올려 보여준다. 수년 째 그의 작품은 실패한 적이 없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미야베 미유키의 장점이 무척 도드라지는 이야기들이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시리즈다. 편집자 후기에 실린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세상에는 00탐정 시리즈가 무척이나 많다. 탐정들의 대부분은 모두 명석하거나 특별한 이력이 있거나 돈이 많거나 뭐 그렇다. 스펙이 대단한 양반들이다. 그런데 이런 양반들이 다룰만한 일이 있고 이런 양반들이 다루기에는 뭔가 조합이 어색한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딸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사위가 면회를 못하게 하네요. 무슨 일일까요?’ 라든가 ‘사이가 껄끄러운 사촌이 결혼을 하는데 동행이 필요해요’라든가. 심부름센터와 번듯한 변호사 사무실 혹은 공무집행을 하는 경찰서, 이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 있는 이런 일들을 다루는 건 어딘가 좀 어설프고 경력도 많지 않은, 사람도 정중하고 적당히 인간미 있는 스기무라 사부로 같은 탐정의 몫이다.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재미있다. 스펙타클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건이 아니라 당장 나에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 보통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간에 벌어지는 미묘한 일들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주요 사건이다.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는 [절대 영도], [화촉],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3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절대 영도]는 어느 하키 동아리의 폭력적인 관행에서 불거지는 비극을 다뤘는데 흡인력이 상당하면서도 가슴이 편치 않은 엔딩까지 더해져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라는 말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어제 바늘도둑이었던 놈은 내일 소도둑이 된다. 빌런이 분명한 인물들의 악행과 함께 악인지 선인지 뭔지 모를 인간들의 애매모호한 연약함을 위선이라고 꼬집은 점도 무척 공감간다. 강건너 불구경한 사람은 불을 지른 사람 만큼이나 나쁘다. 왜 구경만 하나? 불이 났으면 뭔가를 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물의 탁월한 악함을 정말 짜증나게 잘 그려내었다. 표제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뒷맛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내일로 나아가기 위하여 어제를 수용해야 하는 게 교과서다운 생각이겠지만 삶은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론만 충실한 교과서는 그래서 언제나 삶과 동떨어져 현실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내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어제를 긍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만든 어제가 없었던 사람은 내가 만든 내일도 가질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 다가온 운명적인 비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 파국을 피할 길이 없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괴로운 과거라도 그건 당신의 역사예요. 어제의 당신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당신이 있고, 당신의 내일이 있는 거예요.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행복한 미래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아요.
 “그런 거, 저한테는 불가능해요.”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제 무리예요. 더 이상 못 하겠어.”
 이제 충분하다. 지긋지긋하다. 힘이 다하고 말았다.
 “저를 몰아세우는 ‘어제’는 전부 언니가 저지른 일이에요. 저는 한 번도 제 어제를 선택할 수 없었는데.”
461-462쪽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중에서

 

 누구의 말이었을까. 나는 떠올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의 강을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301쪽 [화촉] 중에서

 

 

 올해는 연초부터 정말 잘 쓴 소설들을 많이 만나서 즐겁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다시 버닝하게 만든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혹시 스기무라 탐정 시리즈가 낯설다거나 미야베 미유키를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뒤에 실린 편집자 후기부터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정독하기를 권한다. 편집자 후기에는 이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설명들이 실려 있다. 저자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편집자가 만든 책은 언제나 옳다. 편집자 후기를 먼저 읽고 작품들을 읽는다면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들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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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 - 급변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케팅 10
박기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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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선이 없어지고 있다. 모든 일에 대해서 그렇다. 국적과 국경이라는 선이 그렇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세계의 선이 그렇다. 소유의 선이 허물어져 공유경제가 보편화되고 있으며 본업과 취미의 경계가 없어져 투잡 이상을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기업과 소비자의 경계, 교수와 학생의 경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 선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내가 설 자리는 어딜까?
 경계의 와해를 두고 이 책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비정형’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비정형은 비단 산업 경계가 없어지는 현상만 일컫는 것은 아니다. 경계의 해체는 예기치 못한 특이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에서는 공동생산이나 크라우드소싱 등 기업과 소비자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교수의 역할이 지식 전달에서 학생들의 주도적 학습을 가이드하는 조력자나 촉진자 역할로 바뀌고 있다. 역진행 학습의 등장은 수동적 학생이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제 누가 교수이고, 누가 학생인지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도 그리 의미 있지도 않다. 그저 같이 협력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는 동료일 뿐이다.
책 26-27쪽

 

 

 선이 희미해진 시대의 바람 속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사실은 모든 선이 붕괴된 나머지 살아가는 모든 터전이 시장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디지털 기술과 글로벌화라는 두 가지 요소는 직접 화폐가 유통되는 시장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바꿔버렸다. 덕분에 디지털에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상, 모든 사람들은 매순간 시장 논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수시로 들여다보는 SNS 채널 하나의 운영 이유조차 본질적으로 ‘나를 팔기 위하여’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럼 면에서 조금 많이 과장하자면, 우리가 글자를 읽을 수 있고 숫자 개념을 깨우친 이후에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분야는 ‘마케팅’이 아닌가 싶다.

 

 

마케팅은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고, 인생 역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의미 없는 삶만큼 비참한 삶은 없고, 의미 있는 새로움을 창출하는 혁신이 없으면 기업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책 6쪽

 

 

 쏘가리는 몸체의 무늬와 지느러미가 진하고 화려하다. 쏘가리의 무늬는 자신을 특정하는 개성이며 이 때문에 비단물고기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쏘가리 중에 이 무늬를 갖지 못하고 태어나는 돌연변이가 있다. 돌연변이 쏘가리는 진한 무늬도 없고 지느러미도 특별한 색이 없이 밋밋하다. 그래서 보통의 쏘가리에 비하면 열등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무늬도, 색도 없는 돌연변이 쏘가리의 다른 이름은 황쏘가리, 천연기념물이다. 기존의 쏘가리에게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쏘가리는 시선을 달리 하면 밋밋한 쏘가리가 아니라 금빛 몸체를 자랑하는  황쏘가리가 된다.

 

 마케팅은 황쏘가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쏘가리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것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황쏘가리의 가치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의미는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 창출한다.

 현재는 물론 앞으로의 시장이란 ‘의미’를 팔고 사는 세계일 것이다. 의미를 창출하는 마케팅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질 것이며, 마케팅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기업 경영자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마케터가 되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 마케팅을 배워야 할까?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것은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독자적 눈, 즉 프레임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경영학에서 중시하는 시장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경영자의 프레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프레임에 정답은 없지만 좀 더 좋은 프레임은 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담은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내가 지난 10년 이상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에 기반해 시장을 바라보는 세 가지 프레임(수평, 비정형, 불안정)을 제시한다. 그 프레임에 기반해 새로운 전략을 열 가지로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을 읽는다고 시장 트렌드와 마케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궁극적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한 출발점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책 5쪽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박기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가 낸 신간이다. 마케팅 교과서는 너무 이론에 충실한 나머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트렌디한 현상을 분석하고 반영한 책들은 논리가 부실하다는 단점이 있다.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이론과 현상을 균형감 있게 엮으려 최선의 노력을 다한 책이다. 저자가 쓴 대로 이 책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마케팅의 본질적 원리와 개념에 근거해 다양한 현상과 사례를 분석한 내용들은 매우 흥미롭고 믿을만한다. 트렌드에만 기대지 않고 그 속에서 쉼없이 변형되고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식과 더불어 탁월한 경영자가 지녀야 할 덕목은 감수성이다. 세상, 그중에서도 사람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최근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졸이거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메말라간다. 기술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없으면 그 기술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를 모른다.
책 159쪽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마케팅의 현란한 기법이나 기술을 안내하려고 낸 책은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책은 마케팅의 본질 즉, 사람에 대한 감수성을 짚어내는 책이다. 이 감수성 없이는 아무리 진정성이니 정성이니 하는 단어들을 들먹인다고 해도 그 어떤 마케팅이든 전략이 아닌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현재의 시장 변화의 특징을 수평, 비정형, 불안정이라는 세 가지 현상으로 특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공감과 연결, 와해와 재정의, 신뢰와 영감을 그리고 이에 관련한 10가지 전략을 제시한 [트렌드를 넘는 마케팅이 온다]는 마케팅 에센스라고 불러도 손색 없는 마케팅 책이다. 사기나 기망이 아닌 진짜 마케팅을 하고 싶은 마케터와 그런 마케팅을 알아보고 이해하고 싶은 소비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마케팅하지 못하는 사람 즉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는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 속에서 유튜브나 여타의 sns가 알려주기 어려운 삶의 전략을 똑똑하게 짚어준다.

 

마케팅은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고, 인생 역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의미 없는 삶만큼 비참한 삶은 없고, 의미 있는 새로움을 창출하는 혁신이 없으면 기업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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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돌 - 라틴아메리카 현대대표시선 창비세계문학 15
옥타비오 파스 외 지음, 민용태 엮고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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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는 ‘위대한 시인들은 일체의 유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 안에 존재한다. 위대한 시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다. 나와 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저 시인의 말을 꾸어다 여기에 벌여두어야겠다. 모든 시대 안에는 시인과 시어詩語가 존재하므로.
 시를 잘 모르는 나는 위대한 시인, 덜 위대한 시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 시, 진짜로 시, 제대로 시라는 결실을 짜낸 모든 시인은 다 위대하다고 여긴다. 한데 시인詩人이 위대하려면 시를 보는 시인視人이 있어야 한다. 시는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다. 위대한 시인이 존재하려면 위대한 시를 보는 위대한 시인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한철을 살다 지는 존재라, 위대한 시인(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은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결코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시어 뿐이며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위대하다. 그러므로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말을 나는 이렇게 다시 써본다.
 시어詩語들은 모든 시대 안에 존재한다. 시어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사족이 분명하나 하나를 더 붙이자면 ‘시어는 모든 나라 안에 존재한다’라고도 하고 싶다. 시어가 없는 나라는 없다. 언어와 문화는 제각각이어도 어느 나라에나 문화에나 시어가 있다. 시어는 말(글)이라기 보다 차라리 공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호흡만은 같은 공기로 한다. 여기 공기나 거기 공기나 똑같다. 시어는 공기다. 라틴아메리카의 시에서 들이마신 공기가 비슷한 시대의 우리나라 시에서 들이마시는 공기와 통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공용어는 시어, 하나뿐이리라.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무는 시어의 경이를, 그 멋진 무형의 세계를 체험하는 우리나라 독자가 많지 않다는 점은 안타깝다. 시를 잘 몰라서가 아니라, 여러 세계의 시를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립한림원 종신위원인 민용태 시인은 라틴아메리카 현대대표시들을 한 권으로 엮은 [태양의 돌]에서 ‘우리 예술에서 문학은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 연극보다 세계성이 약하다.(9쪽)’는 말로 이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외국의 시가 한국의 시보다 훌륭하니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에도 썼지만 위대한 시도, 덜 위대한 시도 없다. 거기엔 그저 시詩가 태어났을 뿐. 그 시는 태어난 토양과 거기의 햇살과 디딘 지경만큼의 기운을 흠뻑 품고 자기를 볼 존재를 찾아 나선다. 바다를 건너와 우리의 눈앞으로 다가온 라틴아메리카의 시들을 읽는 일은 쓴 자의 세상과 읽는 자의 세상이 만나 융화되는 일이다. 이 융화의 작용 속에서 우리 고유의 색은 더 날렵하게 벼려지고, 바다 건너의 읽는 자들에게 향하는 우리 시의 항로도 넓어진다. 세계의 문학을 읽는 일이란 이런 ‘세계성’의 토대를 닦는 일일 것이다.

 

 

 

 민용태 시인이 직접 엮고 번역한 [태양의 돌]은 라틴아메리카 대표시인 24인의 시선집이다. 옥따비오 빠스, 니까노르 빠라, 에르네스또 까르데날, 로베르또 후아로스, 호세 에밀리오 빠체꼬, 하이메 싸비네스, 오메로 아리드히스, 엘사 끄로스, 라울 아세베스, 비센떼 끼라르떼, 호세 후안 따블라다, 라몬 로빼스 벨라르데,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마리아노 브룰, 세사르 바예호, 비센떼 우이도브로, 리까르도 몰리나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니꼴라스 기옌, 하비에르 비야우루띠아,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빠블로 네루다, 루벤 다리오, 호세 마르띠. 이르게는 1800년대 후반에 태어나 1900년대 초중반을 활동하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빛나는 도약과 궤적을 그린 시인들이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니까라과,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국내외의 정치적 격변을 겪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민용태 시인과 창비 출판사는 이들의 시 150여 편을 엮어 [태양의 돌]로 출간하면서 독자들을 위하여 각 시인에 대한 소개를 각 꼭지 첫 장에 붙이고 시에 대한 해설을 각주로 달아 이해를 도왔다. 덕분에 낯선 시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읽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시어의 의미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후아로스는 말한다. “시인은 다른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들어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사람이다. 시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창조한다. 나는 시가 참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능력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진실이다. 왜냐하면 시가 영원의 참다운 의식을 되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돌] 책 84쪽

 

 그(하비에르 비야우루띠아)는 “시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이라는 드라마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진실해야 한다. 모든 시는 인간에 대한 앎의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비야우루띠아에게도 시는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불가피한 필요성의 산물이었다.
[태양의 돌] 책 275쪽

 

 

‘나에게 주어진 능력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진실’이라 시를 쓰는 시인도 있고, ‘인간에 대한 앎의 시도’로서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와 겹치는 시대에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의 시 역시 절박하고 치열했음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시기에 쓰인 우리의 시와 정서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많다.
 [태양의 돌]을 읽으면서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점은 라틴아메리카의 대표 시인 중에 노자, 이백이나 하이쿠에 심취하여 동양적인 정서나 구상으로 시를 남긴 작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힌두교 사상에도 큰 영향을 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시들을 읽는 건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죽음’이나 ‘성’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쓴 세계 각국의 시인들은 많겠으나, 라틴아메리카의 정서로 노자나 불교의 철학을 담아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쓴 시는 여기에만 있다.

 


<확실한 것> - 옥따비오 빠스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태양의 돌] 책 19쪽)

 

 

사랑한다는 것은 이름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는 것([태양의 돌]), 비가 오는 소리를 듣듯이 내 소리를 들어다오([비가 오는 소리를 듣듯이]) 라고 인생의 본질을 품은 사랑을 속삭이는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돌아올 적마다 맨 처음 하는 짓이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묻는 일이다([의식들])라고 쓴 나까노르 빠라, (진실을 담은) 시는 깨어진다 해가 돌아오도록([제7의 수직의 시 5])이라고 쓴 로베르또 후아로스의 시들은 나의 시 역시 깨어져 또 다른 통일성의 회복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사람 역시 바뀐다.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여 관념 밖으로 건져내는 시인들의 작업이란 대단하구나, 감탄에 감탄이 더한다. 

 

 


 이런 시인의 시쓰기를 [곰의 이론1]으로 풀어낸 비센때 끼라르떼의 시는, 곰이 말없음표를 트림처럼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접스럽기는커녕 너무나 우아하다. 시대를 초월해 지금 우리들에게도 분명한 한 방을 안기는 시인은 세사르 바에호였는데, [검은 사자들]은 내가 절망의 진창에 그러니까 추락에 추락에 더한 추락을 하고 있을 때에 꺼내보아야 할 작품이다. 혼자 먹는 밥의 분위기를 그린 [시28]은 혼밥시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그 무엇을 탁월하게 그려두었다.

 [태양의 돌] 역자 후기에서 민용태 시인은 “여기 번역한 시들 혹은 시인들은 내가 반세기 동안 읽고 또 읽고 사랑해온 시들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원시의 맛과 여운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번역이라도 우리말로 시가 아니면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책 357쪽)”라고 했다. 원작에 대한 뜨거운 애정, 원시의 맛과 여운을 살려 시를 시로서 번역하기 위하여 들인 노력이 이 몇 줄에 드러나 있다. 이런 역자의 혼이 원작 시인들이 남긴 위대한 시어를, 그 호흡 하나마저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시를 공들여 빚듯이, 책도 공들여 만들면 이런 품격이 있다는 걸, 15번째 창비세계문학 [태양의 돌]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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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윌슨 창비세계문학 31
마크 트웨인 지음, 김명환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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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간이 윌슨]은 1894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작품 발표 후 100년이 넘게 흘러오면서 그간 [얼간이 윌슨, 이야기]라든가 [얼간이 윌슨의 비극]이라든가 이런저런 제목들이 붙어 왔지만 창비는 세계문학 시리즈를 내면서 [얼간이 윌슨]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출간했다. 


 작품 속에서 타이틀롤인 ‘윌슨’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축이긴 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하다. 캐릭터 면에서 윌슨을 압도하는 록시도 있고, 작품의 위기와 그 결말에서 뺄 수 없는 시선강탈자인 톰도 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추리소설 등을 읽다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너무 많아 따로 노트를 하면서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소설도 독자에게 그런 정성을 요구한다. 인물이 무척 많으므로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부제가 필요하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윌슨을 위풍당당하게 얼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노예 아가와 백인 아가의 신분을 바꿔치기 하는 대범한 여자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동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에 담자면 바로 작품의 장소 ‘도슨스랜딩’이 되리라. [얼간이 윌슨]에는 ‘얼간이들의 도시, 도슨스랜딩’이라는 부제가 붙어야 한다.

 

 

 마크 트웨인이 인종차별 자체만을 두고 이 작품을 썼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얼간이 윌슨]의 작품해설에도 실려 있지만, 링컨 대통령만 해도 인간 존엄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에서 노예제 폐지에 선 인물이었고 남북전쟁 후 미국사회는 노예제가 폐지되고 인종에 대한 국민 의식이 양화되는 방향으로는 결코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에 하나인 [미국의 아들]이 발표된 1940년까지도 아주 집요하고 완고한 인종차별 의식이 미국의 뿌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얼간이 윌슨]이 발표된 1894년의 상황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그런 상황에서 인종분리에 대한 진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은 적어도 백인들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헬프]가 영화화되었을 때 어느 흑인 비평가가 노예제의 참상을 백인의 시선으로 그린 망작이라고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기보다 피해자의 심정을 가해자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한계의 측면에서 저 비판에 일부 공감했다. 노예제를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이 아무리 민첩해도 그 아이러니를 고발하는 날렵함은 흑인 작가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건 [빌러비드]나 [미국의 아들] 같은 작품까지 예로 들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얼간이 윌슨]은 더구나 그 속에서 흑인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논란의 소지까지 있었다고 하니(작품 해설 참조) 마크 트웨인이 인종문제만을 주제로 [얼간이 윌슨]을 썼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이 작품은 아주 순전히 당대 미국 사회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묘사한 소설이다. ‘도슨스랜딩’은 미국이 가진 모순들을 축약한 도시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순이 바로 인종에 대한 문제다. 노예인 록시는 십육분의 일이 흑인 혈통인 백인이다. 그러니까 신체는 백인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노예인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삼십이분의 일만이 흑인이다. 같은 날에 태어난 주인집 아들과 다른 점은 외형상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록시는 좋은 옷을 입은 주인집 아들 옆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자기 아들이 훗날 다른 곳으로 팔려가게 될, 가슴 치는 슬픔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마크 트웨인은 인종분리 의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당대에 과감하게 백인이지만 흑인 노예인 ‘록시’를 중심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다. 마크 트웨인이니까 가능했던 작품 발표였다. 이름 없는 작가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

 

 록시 그리고 그녀의 아들 톰(록시가 바꿔치기 해서 백인이 되었다가 윌슨의 증명으로 다시 노예 신분이 되는 비운의 사나이)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종 아이러니의 핵심은 ‘돈과 체면’이다. 현재도 천민 자본주의가 ‘생각의 정전停電’을 불러오고 덕분에 (창비 출판사가 쓴대로) 문학은 날로 날로 변방으로 밀려가는 중이다. 행복하게 혹은 의미 있게 살고 싶다고 입을 모으면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의 탄생은 아마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을 집필하던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에 그린 도슨스랜딩을 비롯한 미국의 도시들은 품위, 명예, 재산 등으로부터 비롯된 블랙코미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이다.

 

 

 문학은 사료로서 읽힐 수 없다. 문학은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때로 역사 기록보다 치밀하고 본질적으로 시대를 기록한다.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 생각과 동감의 확장이라는 수확을 거두는 게 문학의 기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학은 지나간 시대를 생생히 고발하는 목소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짧게는 수십 년 전에 발표된 소설들을 찾아 읽는다. 사료가 채 담지 못한 그때의 공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은 소설의 다른 이름이다.

 

 초중반부는 막장극, 중후반부는 추리극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어나간 [얼간이 윌슨]은 어떻게 보면 참 시시한 작품이다. 중간 중간, 이야기의 맥이 끊어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최첨단 과학 수사니 심리 수사니 하는 추리물, 수사물이 드라마와 영화로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지문으로 범인을 증명하는 윌슨의 변호는 퍽 유치하게도 보인다. 도슨스랜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서 읽어나가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인물들의 특징과 선택을 따라 읽어나가면 무대 극본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 뭐 하나라도 괜찮게 볼만한 그런 인물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저마다의 약점과 악점을 적당히 감추거나 드러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있는데 이걸 패러디해서 도슨스랜딩을 표현하자면 ‘약한 놈, 나쁜 놈, 비열한 놈’이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이십년 이상을 얼간이라고 불러온 사람이야. 그는 이제 그 지위를 사직했네, 친구들.”
 “그래, 그렇지만 얼간이 자리는 공석이 아니야 – 우리가 선출되지 않았나.”
 책 249쪽

 

 [얼간이 윌슨]은 참 희한한 소설이다. 아, 풍자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이지.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이십년 이상을 얼간이라고 불러온 사람이야. 그는 이제 그 지위를 사직했네, 친구들."
"그래, 그렇지만 얼간이 자리는 공석이 아니야 – 우리가 선출되지 않았나."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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