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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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좋았던 어제,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하다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잠시 신호대기 중이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보시던 엄마는 차가 멈춰 있는 동안은 말이 없으시더니 차가 출발하자 조용히 혼잣말을 하셨다. “그런데 왜 전쟁기념관이라고 했을까? 나는 항상 저 말이 이상했어. 전쟁을 기념해야 하는 건가? 무슨 좋은 날처럼?” 나는 대답으로 적당한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운전만 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쟁은 기념해야할 게 아니니까.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쇠에 생긴 녹은 쇠에서 나서 쇠를 먹어치운다. 자전거 어딘가에 작은 녹이 슬었을 때, 그걸 내버려두면 결국 자전거 전신이 다 녹이 슬어 버린다. 녹슬어 폐물이 된 자전거처럼 전쟁은 녹이 되어 우리를 먹어 치워왔다. 전쟁은 사람에게서 나서 사람을 먹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말 수만 마디로 전쟁의 포악함을 설명한들 그것을 직접 겪어보는 단 몇 초의 순간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전쟁기념관을 세우고,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들을 꾸준히 쓰고 발표하고 읽고 토론하면서 생각과 기억 속에 전쟁의 이러저러함을 간직하려 한다. 우리는 저토록 무서운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탓이다.

 

 

 


 

 

 전쟁이 정말 두려운 이유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살육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 후에 남겨지는 것들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남고 싶지만, 살아남은 이후에 겪어야 할 일들이 더욱 혹독한 게 전쟁 아닌가. 심하게 녹이 슨 자전거는 아무리 닦아도 녹슨 흉물로 남듯이, 전쟁이라는 녹이 삼킨 후에 남겨진 폐허란 어떻게 바라보아도 폐허일 뿐 새로운 시작이니 희망이니 평화니 하는 빛나는 것들로 감히 덧칠할 수 없다. 그 폐허는 하인리히 뵐이 [천사는 침묵했다] 속에서 묘사한 청소하는 장면과 같다.

 

 

 그녀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고투를 계속했고, 물 양동이를 부지런히 날랐다. 속으로는 무의미한 짓거리라는 걸 알았다. 청소를 할수록 지저분한 얼룩이 드러났고, 부스러기가 자꾸만 새로 떨어져내렸다. (중략)
 엄청나게 많은 먼지와 석회가루가 다시 떨어질 테고, 그렇게 바닥에 쌓인 석회가루가 물을 먹으면 다시 소생해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하얀 얼룩으로 변할 테고, 그런 얼룩은 악성 발진처럼 자꾸만 돋아날 터였다……
책 174-175쪽

 

 

 전쟁 중에 아기를 잃은 레기나는 전쟁의 포화로 석회먼지를 뒤집어쓴 침실을 청소하려 나섰다. 그러나 양동이로 끝없이 물을 퍼나르며 침실 바닥으로 떨어진 먼지와 쓰레기들을 치웠지만 깨끗한 물을 퍼서 들어올 때마다 기이함을 느꼈다. 청소하지 않은 바닥은 고르게 어두운 색으로, 청소한 바닥은 도리어 얼룩덜룩해져서 추레하고 볼썽 사나운 모습이 되었다. 이 고역을 끝낸 후에 남는 건 녹초가 된 몸과 무의미한 짓거리를 했다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폐허는 치우고 치우고 또 치워도 쉽게 깨끗해지지 않는 오물이다. 폐허가 된 마음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스 슈니츨러는 서점 관리인 자격증에 합격하고 휴가를 즐기던 중에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그와 어머니가 함께 살던 집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주택이었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한가한 휴일의 그 날, 한스의 인생은 한스와는 상의도 없이 전혀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었다. 학교와 책 밖에 몰랐던 한스는 참전 중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아내와는 제대로 된 신혼 생활도 하지 못한 채 열차 폭격으로 아내를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도, 가족도, 그가 알던 풍경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너진 건물, 불타서 식은 재, 석회가루와 돌 부스러기, 축축한 오물 그리고 냄새였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한스의 마음 속에서 비극은 현재진행 중이었다. 아니, 한스의 마음 뿐 아니라 모두의 마음 속에서 저마다의 비극이 진행 중이었다. 하인리히 뵐은 전쟁 자체의 폭력을 고발하는 대신 전쟁 후에 남겨진 폐허의 이면을 면밀히 묘사함으로써 그 어떤 소설보다도 강렬하게 전쟁의 비극을 그려냈다. 보통 사람들의 비극을 묘사하는 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건 오물 냄새다. 하인리히 뵐은 눈으로 그려지는 풍경 속에 눈으로는 그려지지 않는 냄새를 입혀 전쟁 후의 폐허를 전달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당하면 신을 찾는 게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신을 부르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소식 앞에 신은 대체 무얼하고 있냐고 원망한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 신의 말은 죽었고 그 침묵의 크기만큼 전쟁은 소란하다. 어쩌면 사람을 먹어치우는 전쟁이 그토록 시끄러운 탓에 신은 그 자신조차도 원치 않는 침묵 속에 빠지는 건지도 모른다. [천사는 침묵했다]에는 신을 머리를 진창에 처박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종교적 임무를 띠고 나치당에 들어가 부역한 피셔 박사는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안전 속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지식인이다. 전쟁 중에 ‘인생이 근사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던 인물이며 전쟁이 끝난 후로는 만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서 역겨울 정도라고 독백한다. 그러나 억세게 운수가 좋은 이 사람 역시 오물 냄새를 벗어나지 못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행태를 통해 구축한 재물을 넣어둔 금고를 여닫을 때마다 그는 돈에서 냄새를 맡는다. 사창가라는 개념이 떠오르는 냄새, 피 냄새, 오물 냄새.

 

 

 

 이런 오물 냄새 속에서 한스는 레기나를 만나 서로의 아픔을 동감하며 두 번째 사랑을 결심하는 한편 나치 부역자인 피셔 박사는 천사를 짓밟고 선채로 승승장구한다. 폐허가 된 사람들과 청산되지 못한 전쟁의 흔적, 건물의 잔해더미에서 돋은 풀포기 같은 사랑. [천사는 침묵했다]는 전쟁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 그 이면의 고통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미약한 뿌리를 간신히 내린 풀꽃 같은 희망도 있지만 천사를 진창에 틀어박고 자신들은 고고하고 역겨운 삶을 이어가는 적폐도 있다. 비애로 가득한 전쟁의 참담함보다 우리가 더 면밀하게 바라보아야 할 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이상으로 파괴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천사를 침묵했다]를 통해 청산해야 할 것은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인리히 뵐은 전후 독일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그의 작가적 양심은 무척이나 단호하고 날카로웠고 이는 그의 작품과 사회 활동에 잘 드러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 하나인 [천사는 침묵했다] 말미에 실린 임홍배 교수의 작품해설은 작가 하인리히 뵐의 활동과 그의 작품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대 초반에 전후의 폐허문학을 돌이켜보면서 하인리히 뵐은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언명한바 있다. 전후 냉전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았던 뵐은 독일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뵐의 문학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에 대한 탐색은 그만큼 더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249쪽 

 

 

 뵐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평생에 걸쳐 탐색하는 데에 빌린 도구는 문학이었다. 사람의 존재는 언어라는 형체를 입고, 이 언어가 직조되어 완성된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살아있다. 생물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생물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과 유형의 생물이 공존하여 생태계가 더욱 건강하고 보다 오래 존속된다는 개념이다. 문학의 생태계에도 생물 다양성이 적용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형질을 가진 여러 종류의 문학이 공존하는 세계는 보다 건강한 언어들의 세상이지 않을까. 전세계의 다양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굴, 재평가하여 한국 문학계에 공급하고,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다시 그리려는 창비세계문학의 시도는 바로 이 생물 다양성의 개념과 통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려 했던 뵐의 작가적 지향점 역시 이러한 시도와 통한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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