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돌 - 라틴아메리카 현대대표시선 창비세계문학 15
옥타비오 파스 외 지음, 민용태 엮고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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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는 ‘위대한 시인들은 일체의 유파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 안에 존재한다. 위대한 시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다. 나와 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저 시인의 말을 꾸어다 여기에 벌여두어야겠다. 모든 시대 안에는 시인과 시어詩語가 존재하므로.
 시를 잘 모르는 나는 위대한 시인, 덜 위대한 시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 시, 진짜로 시, 제대로 시라는 결실을 짜낸 모든 시인은 다 위대하다고 여긴다. 한데 시인詩人이 위대하려면 시를 보는 시인視人이 있어야 한다. 시는 사람이 쓰고 사람이 읽는다. 위대한 시인이 존재하려면 위대한 시를 보는 위대한 시인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한철을 살다 지는 존재라, 위대한 시인(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은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결코 죽지 않는 것은 오직 시어 뿐이며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위대하다. 그러므로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말을 나는 이렇게 다시 써본다.
 시어詩語들은 모든 시대 안에 존재한다. 시어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사족이 분명하나 하나를 더 붙이자면 ‘시어는 모든 나라 안에 존재한다’라고도 하고 싶다. 시어가 없는 나라는 없다. 언어와 문화는 제각각이어도 어느 나라에나 문화에나 시어가 있다. 시어는 말(글)이라기 보다 차라리 공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미국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호흡만은 같은 공기로 한다. 여기 공기나 거기 공기나 똑같다. 시어는 공기다. 라틴아메리카의 시에서 들이마신 공기가 비슷한 시대의 우리나라 시에서 들이마시는 공기와 통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공용어는 시어, 하나뿐이리라.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무는 시어의 경이를, 그 멋진 무형의 세계를 체험하는 우리나라 독자가 많지 않다는 점은 안타깝다. 시를 잘 몰라서가 아니라, 여러 세계의 시를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립한림원 종신위원인 민용태 시인은 라틴아메리카 현대대표시들을 한 권으로 엮은 [태양의 돌]에서 ‘우리 예술에서 문학은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 연극보다 세계성이 약하다.(9쪽)’는 말로 이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외국의 시가 한국의 시보다 훌륭하니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에도 썼지만 위대한 시도, 덜 위대한 시도 없다. 거기엔 그저 시詩가 태어났을 뿐. 그 시는 태어난 토양과 거기의 햇살과 디딘 지경만큼의 기운을 흠뻑 품고 자기를 볼 존재를 찾아 나선다. 바다를 건너와 우리의 눈앞으로 다가온 라틴아메리카의 시들을 읽는 일은 쓴 자의 세상과 읽는 자의 세상이 만나 융화되는 일이다. 이 융화의 작용 속에서 우리 고유의 색은 더 날렵하게 벼려지고, 바다 건너의 읽는 자들에게 향하는 우리 시의 항로도 넓어진다. 세계의 문학을 읽는 일이란 이런 ‘세계성’의 토대를 닦는 일일 것이다.

 

 

 

 민용태 시인이 직접 엮고 번역한 [태양의 돌]은 라틴아메리카 대표시인 24인의 시선집이다. 옥따비오 빠스, 니까노르 빠라, 에르네스또 까르데날, 로베르또 후아로스, 호세 에밀리오 빠체꼬, 하이메 싸비네스, 오메로 아리드히스, 엘사 끄로스, 라울 아세베스, 비센떼 끼라르떼, 호세 후안 따블라다, 라몬 로빼스 벨라르데,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마리아노 브룰, 세사르 바예호, 비센떼 우이도브로, 리까르도 몰리나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니꼴라스 기옌, 하비에르 비야우루띠아,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빠블로 네루다, 루벤 다리오, 호세 마르띠. 이르게는 1800년대 후반에 태어나 1900년대 초중반을 활동하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빛나는 도약과 궤적을 그린 시인들이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니까라과,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국내외의 정치적 격변을 겪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민용태 시인과 창비 출판사는 이들의 시 150여 편을 엮어 [태양의 돌]로 출간하면서 독자들을 위하여 각 시인에 대한 소개를 각 꼭지 첫 장에 붙이고 시에 대한 해설을 각주로 달아 이해를 도왔다. 덕분에 낯선 시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읽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시어의 의미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후아로스는 말한다. “시인은 다른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들어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사람이다. 시는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창조한다. 나는 시가 참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능력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진실이다. 왜냐하면 시가 영원의 참다운 의식을 되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돌] 책 84쪽

 

 그(하비에르 비야우루띠아)는 “시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이라는 드라마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진실해야 한다. 모든 시는 인간에 대한 앎의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비야우루띠아에게도 시는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불가피한 필요성의 산물이었다.
[태양의 돌] 책 275쪽

 

 

‘나에게 주어진 능력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진실’이라 시를 쓰는 시인도 있고, ‘인간에 대한 앎의 시도’로서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와 겹치는 시대에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의 시 역시 절박하고 치열했음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시기에 쓰인 우리의 시와 정서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많다.
 [태양의 돌]을 읽으면서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점은 라틴아메리카의 대표 시인 중에 노자, 이백이나 하이쿠에 심취하여 동양적인 정서나 구상으로 시를 남긴 작가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힌두교 사상에도 큰 영향을 받은 라틴아메리카의 시들을 읽는 건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죽음’이나 ‘성’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쓴 세계 각국의 시인들은 많겠으나, 라틴아메리카의 정서로 노자나 불교의 철학을 담아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쓴 시는 여기에만 있다.

 


<확실한 것> - 옥따비오 빠스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태양의 돌] 책 19쪽)

 

 

사랑한다는 것은 이름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는 것([태양의 돌]), 비가 오는 소리를 듣듯이 내 소리를 들어다오([비가 오는 소리를 듣듯이]) 라고 인생의 본질을 품은 사랑을 속삭이는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돌아올 적마다 맨 처음 하는 짓이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묻는 일이다([의식들])라고 쓴 나까노르 빠라, (진실을 담은) 시는 깨어진다 해가 돌아오도록([제7의 수직의 시 5])이라고 쓴 로베르또 후아로스의 시들은 나의 시 역시 깨어져 또 다른 통일성의 회복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사람 역시 바뀐다.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여 관념 밖으로 건져내는 시인들의 작업이란 대단하구나, 감탄에 감탄이 더한다. 

 

 


 이런 시인의 시쓰기를 [곰의 이론1]으로 풀어낸 비센때 끼라르떼의 시는, 곰이 말없음표를 트림처럼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접스럽기는커녕 너무나 우아하다. 시대를 초월해 지금 우리들에게도 분명한 한 방을 안기는 시인은 세사르 바에호였는데, [검은 사자들]은 내가 절망의 진창에 그러니까 추락에 추락에 더한 추락을 하고 있을 때에 꺼내보아야 할 작품이다. 혼자 먹는 밥의 분위기를 그린 [시28]은 혼밥시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그 무엇을 탁월하게 그려두었다.

 [태양의 돌] 역자 후기에서 민용태 시인은 “여기 번역한 시들 혹은 시인들은 내가 반세기 동안 읽고 또 읽고 사랑해온 시들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원시의 맛과 여운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번역이라도 우리말로 시가 아니면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책 357쪽)”라고 했다. 원작에 대한 뜨거운 애정, 원시의 맛과 여운을 살려 시를 시로서 번역하기 위하여 들인 노력이 이 몇 줄에 드러나 있다. 이런 역자의 혼이 원작 시인들이 남긴 위대한 시어를, 그 호흡 하나마저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시를 공들여 빚듯이, 책도 공들여 만들면 이런 품격이 있다는 걸, 15번째 창비세계문학 [태양의 돌]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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