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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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사설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최근작이다. 이름이 장르소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야베 미유키가 수년간 애정을 담아 이어가고 있는 시리즈다. 스기무라는 야마나시 현의 평범한 출신으로 출판사를 다니던 중 재벌가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한 신데렐라다. 그러나 대기업 총수인 장인이라는 후광을 마음놓고 즐기는 성정이 못되는 인물이 이 스기무라 시부로다. 장인의 운전기사 사망 사건을 조사하며 어설픈 탐정 역할을 하던 그가 이혼 후 본격적으로 사설 탐정 새내기가 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평범하고 다소 유약해보이기까지 한 인물이 자기 인생의 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자기와 비슷하게 평범한 주변 인간들의 사건 사고를 추적해가는 이야기들이다.

 

 미야베 미유키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렇다. 보통 사람의 지극히 보통의 악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그 양반은 법 없이도 살 착한 양반’이라거나 ‘걔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순진한 아이’라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나? 아직도? 사람은 누구나 특수한 환경에 처하거나 어떤 파격적인 계기 등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선택이나 행동을 한다. 그게 사람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촘촘한 사건과 계기를 깔아두고 그 위에 이러한 사람의 특수성을 끌어올려 보여준다. 수년 째 그의 작품은 실패한 적이 없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미야베 미유키의 장점이 무척 도드라지는 이야기들이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시리즈다. 편집자 후기에 실린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세상에는 00탐정 시리즈가 무척이나 많다. 탐정들의 대부분은 모두 명석하거나 특별한 이력이 있거나 돈이 많거나 뭐 그렇다. 스펙이 대단한 양반들이다. 그런데 이런 양반들이 다룰만한 일이 있고 이런 양반들이 다루기에는 뭔가 조합이 어색한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딸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사위가 면회를 못하게 하네요. 무슨 일일까요?’ 라든가 ‘사이가 껄끄러운 사촌이 결혼을 하는데 동행이 필요해요’라든가. 심부름센터와 번듯한 변호사 사무실 혹은 공무집행을 하는 경찰서, 이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 있는 이런 일들을 다루는 건 어딘가 좀 어설프고 경력도 많지 않은, 사람도 정중하고 적당히 인간미 있는 스기무라 사부로 같은 탐정의 몫이다.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는 재미있다. 스펙타클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건이 아니라 당장 나에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 보통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 간에 벌어지는 미묘한 일들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주요 사건이다.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는 [절대 영도], [화촉],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3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절대 영도]는 어느 하키 동아리의 폭력적인 관행에서 불거지는 비극을 다뤘는데 흡인력이 상당하면서도 가슴이 편치 않은 엔딩까지 더해져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라는 말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야기다. 어제 바늘도둑이었던 놈은 내일 소도둑이 된다. 빌런이 분명한 인물들의 악행과 함께 악인지 선인지 뭔지 모를 인간들의 애매모호한 연약함을 위선이라고 꼬집은 점도 무척 공감간다. 강건너 불구경한 사람은 불을 지른 사람 만큼이나 나쁘다. 왜 구경만 하나? 불이 났으면 뭔가를 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물의 탁월한 악함을 정말 짜증나게 잘 그려내었다. 표제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뒷맛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내일로 나아가기 위하여 어제를 수용해야 하는 게 교과서다운 생각이겠지만 삶은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론만 충실한 교과서는 그래서 언제나 삶과 동떨어져 현실을 외면하는 것 아닌가. 내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어제를 긍정할 필요도 없다. 내가 만든 어제가 없었던 사람은 내가 만든 내일도 가질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 다가온 운명적인 비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 파국을 피할 길이 없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슬펐다.

 

 

-아무리 괴로운 과거라도 그건 당신의 역사예요. 어제의 당신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당신이 있고, 당신의 내일이 있는 거예요.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행복한 미래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아요.
 “그런 거, 저한테는 불가능해요.”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제 무리예요. 더 이상 못 하겠어.”
 이제 충분하다. 지긋지긋하다. 힘이 다하고 말았다.
 “저를 몰아세우는 ‘어제’는 전부 언니가 저지른 일이에요. 저는 한 번도 제 어제를 선택할 수 없었는데.”
461-462쪽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중에서

 

 누구의 말이었을까. 나는 떠올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의 강을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301쪽 [화촉] 중에서

 

 

 올해는 연초부터 정말 잘 쓴 소설들을 많이 만나서 즐겁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다시 버닝하게 만든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혹시 스기무라 탐정 시리즈가 낯설다거나 미야베 미유키를 잘 모르는 독자라면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의 뒤에 실린 편집자 후기부터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정독하기를 권한다. 편집자 후기에는 이 작품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설명들이 실려 있다. 저자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편집자가 만든 책은 언제나 옳다. 편집자 후기를 먼저 읽고 작품들을 읽는다면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들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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