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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윌슨 ㅣ 창비세계문학 31
마크 트웨인 지음, 김명환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얼간이 윌슨]은 1894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작품 발표 후 100년이 넘게 흘러오면서 그간 [얼간이 윌슨, 이야기]라든가 [얼간이 윌슨의 비극]이라든가 이런저런 제목들이 붙어 왔지만 창비는 세계문학 시리즈를 내면서 [얼간이 윌슨]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출간했다.
작품 속에서 타이틀롤인 ‘윌슨’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축이긴 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하다. 캐릭터 면에서 윌슨을 압도하는 록시도 있고, 작품의 위기와 그 결말에서 뺄 수 없는 시선강탈자인 톰도 있다. 판타지 소설이나 추리소설 등을 읽다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너무 많아 따로 노트를 하면서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 소설도 독자에게 그런 정성을 요구한다. 인물이 무척 많으므로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부제가 필요하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윌슨을 위풍당당하게 얼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노예 아가와 백인 아가의 신분을 바꿔치기 하는 대범한 여자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동네. 이 모든 것을 한 단어에 담자면 바로 작품의 장소 ‘도슨스랜딩’이 되리라. [얼간이 윌슨]에는 ‘얼간이들의 도시, 도슨스랜딩’이라는 부제가 붙어야 한다.
마크 트웨인이 인종차별 자체만을 두고 이 작품을 썼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얼간이 윌슨]의 작품해설에도 실려 있지만, 링컨 대통령만 해도 인간 존엄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에서 노예제 폐지에 선 인물이었고 남북전쟁 후 미국사회는 노예제가 폐지되고 인종에 대한 국민 의식이 양화되는 방향으로는 결코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 중에 하나인 [미국의 아들]이 발표된 1940년까지도 아주 집요하고 완고한 인종차별 의식이 미국의 뿌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얼간이 윌슨]이 발표된 1894년의 상황이야 말해서 무엇하리. 그런 상황에서 인종분리에 대한 진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은 적어도 백인들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헬프]가 영화화되었을 때 어느 흑인 비평가가 노예제의 참상을 백인의 시선으로 그린 망작이라고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기보다 피해자의 심정을 가해자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한계의 측면에서 저 비판에 일부 공감했다. 노예제를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이 아무리 민첩해도 그 아이러니를 고발하는 날렵함은 흑인 작가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건 [빌러비드]나 [미국의 아들] 같은 작품까지 예로 들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얼간이 윌슨]은 더구나 그 속에서 흑인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논란의 소지까지 있었다고 하니(작품 해설 참조) 마크 트웨인이 인종문제만을 주제로 [얼간이 윌슨]을 썼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이 작품은 아주 순전히 당대 미국 사회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묘사한 소설이다. ‘도슨스랜딩’은 미국이 가진 모순들을 축약한 도시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순이 바로 인종에 대한 문제다. 노예인 록시는 십육분의 일이 흑인 혈통인 백인이다. 그러니까 신체는 백인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노예인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삼십이분의 일만이 흑인이다. 같은 날에 태어난 주인집 아들과 다른 점은 외형상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록시는 좋은 옷을 입은 주인집 아들 옆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자기 아들이 훗날 다른 곳으로 팔려가게 될, 가슴 치는 슬픔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마크 트웨인은 인종분리 의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당대에 과감하게 백인이지만 흑인 노예인 ‘록시’를 중심으로 한 소설을 발표했다. 마크 트웨인이니까 가능했던 작품 발표였다. 이름 없는 작가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
록시 그리고 그녀의 아들 톰(록시가 바꿔치기 해서 백인이 되었다가 윌슨의 증명으로 다시 노예 신분이 되는 비운의 사나이)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종 아이러니의 핵심은 ‘돈과 체면’이다. 현재도 천민 자본주의가 ‘생각의 정전停電’을 불러오고 덕분에 (창비 출판사가 쓴대로) 문학은 날로 날로 변방으로 밀려가는 중이다. 행복하게 혹은 의미 있게 살고 싶다고 입을 모으면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의 탄생은 아마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을 집필하던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마크 트웨인이 [얼간이 윌슨]에 그린 도슨스랜딩을 비롯한 미국의 도시들은 품위, 명예, 재산 등으로부터 비롯된 블랙코미디의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이다.
문학은 사료로서 읽힐 수 없다. 문학은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때로 역사 기록보다 치밀하고 본질적으로 시대를 기록한다.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 생각과 동감의 확장이라는 수확을 거두는 게 문학의 기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학은 지나간 시대를 생생히 고발하는 목소리로 작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짧게는 수십 년 전에 발표된 소설들을 찾아 읽는다. 사료가 채 담지 못한 그때의 공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은 소설의 다른 이름이다.
초중반부는 막장극, 중후반부는 추리극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뻗어나간 [얼간이 윌슨]은 어떻게 보면 참 시시한 작품이다. 중간 중간, 이야기의 맥이 끊어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최첨단 과학 수사니 심리 수사니 하는 추리물, 수사물이 드라마와 영화로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지문으로 범인을 증명하는 윌슨의 변호는 퍽 유치하게도 보인다. 도슨스랜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서 읽어나가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인물들의 특징과 선택을 따라 읽어나가면 무대 극본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 뭐 하나라도 괜찮게 볼만한 그런 인물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저마다의 약점과 악점을 적당히 감추거나 드러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있는데 이걸 패러디해서 도슨스랜딩을 표현하자면 ‘약한 놈, 나쁜 놈, 비열한 놈’이라고 하고 싶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이십년 이상을 얼간이라고 불러온 사람이야. 그는 이제 그 지위를 사직했네, 친구들.”
“그래, 그렇지만 얼간이 자리는 공석이 아니야 – 우리가 선출되지 않았나.”
책 249쪽
[얼간이 윌슨]은 참 희한한 소설이다. 아, 풍자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이지.
"그런데 이 사람은 우리가 이십년 이상을 얼간이라고 불러온 사람이야. 그는 이제 그 지위를 사직했네, 친구들." "그래, 그렇지만 얼간이 자리는 공석이 아니야 – 우리가 선출되지 않았나."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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