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단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널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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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코넬리는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스릴러 작가다. 30년 가까이 범죄스릴러소설을 써왔다.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는 벌써 7편이 발표되었고, 살인전담반 형사인 해리 보슈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는 22편이 발표되었다. 두 개의 굵직한 시리즈물 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출간했다고 하니 마이클 코넬리의 정력적인 작품 발표에 감탄만 나온다.
 
 그렇게 발표된 작품들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그 상업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고 있다. 미키 할러 시리즈의 첫 편인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는 매튜 매커너히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고, 보슈 시리즈는 드라마로 제작 중이라고 한다.

 

 마이클 코넬리가 소설작가로 전향하기 전의 이력도 화려하다. 기자로 일했던 그는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단다.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한 수많은 범죄 사건들이 그가 쌓아온 작품 세계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을 그 전에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추리나 범죄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라 그렇다. 범죄스릴러나 수사물, 법정물은 드라마로 보는 게 박진감 최고라는 개인의 취향 탓이 크다. 인간 쓰레기라고 할만한 문제인물들의 변호를 주로 맡는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는 그래서 나에게 무척 생소했다. 그래서 경력이 그토록 화려한 작가의 이렇게 대단한 시리즈, 미키 할러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배심원단]은 읽기 전부터 낯섦과 설렘을 동시에 주는 묘한 소설이었다.

 

 

 

 

 [배심원단]은 미키 할러가 지방검찰청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1년이 지난 뒤다.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자존감과 자존심에 모두 상처를 입은 미키 할러는 일에 몰두한다. 인간쓰레기의 변호인으로 악명이 높은 미키 할러는, 그가 석방시킨 션 갤러거가 사람 둘을 치어 죽이면서 딸과의 사이도 완전히 틀어져 버린 상태다. 희생자 둘은 딸의 친구와 그 엄마였고 딸은 아빠의 삶의 방식, 악인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직업적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키는 어떻게든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심지어 한 시간 반 거리의 도시로 전처와 딸이 이사를 가게되는 등 관계 회복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를 괴롭히는 건 딸과의 관계 뿐 아니다. 그는 션 갤러거 사건으로 촉발된 깊은 죄의식에 시달린다. 자신의 직업적 활동이 낳은 희생자들, 피해자들은 그의 무의식 중에서 계속 그를 괴롭힌다. 열두 명의 배심원단 앞에서 그는 의뢰인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이 심판받는 듯 느낀다. 악인을 옹호해야 하는 변호사로서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의 제목이 [배심원단]이라는 사실이 작품 전체에 긴밀하게 깔려 있다.
 
“그 작자 이름은 갤러거예요, 션 갤러거. 제 할 일을 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요, 아저씨. 제가 석방시킨 사람 때문에 사거리에서 두 명이 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만 하면 책임이 없어지나요. 어찌 됐든 이만 가볼게요.”
32쪽

 

딸 헤일리가 나와 인연을 끊으면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 의뢰인 명단에는 약쟁이나 살인범 같은 ‘인간쓰레기들’이 우글거린다고 했다.
38쪽

 

“네가 항상 갖고 있는 죄책감 말이야. 그게 변호사로서의 네 역량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니까 문제다. 변호사로서, 피고인의 옹호자로서, 이 사건에는 부당하게 기소된 피고인의 옹호자로서 네가 보여줘야 할 업무능력에 악영향을 미치니까.”
231쪽

 

 미키 할러 시리즈는 법정 스릴러답게 범죄와 법, 재판에 관련한 공방이 촘촘하고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배심원단]은 특히 미키 할러가 법을 대하는 자세, 배심원단을 설득하는 과정, 정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저자의 전언이지 않을까 싶다.) [배심원단] 속에서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없다. 누굴 악인이라고 할지, 누굴 선인이라고 할지 모르겠는 모호함이 아니라 아예 ‘선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위 말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 지점이 미키 할러 시리즈가 갖는 냉엄한 현실성이다. 미키가 변호하는 의뢰인은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살인자는 아니다. 하지만 살인자가 아닐 뿐 선인은 아니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미키의 멘토 역할을 하는 리갈은 이렇게 말한다.
 
법은 무른 납과 같아서, 구부려서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법은 유연한 거야. 구부릴 수도 늘일 수도 있지.” 리걸 시걸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27쪽

 

 이건 법이 느슨하고 안일해서가 아니다. 법이 심판하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기준, 하나의 잣대로 무 자르듯 분명하고 명료하게 재단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심원단]은 이런 인간의 한계와 특성을 ‘법’이라는 현미경을 통하여 들춰낸다. 미키 할러가 문제인물들을 어떻게 변호해서 결국 어떤 방법으로 승소하는지의 과정을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저자의 이런 시각을 읽는 것도 그 이상으로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법과 재판에 대하여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다. 저자가 굉장히 집요하고 철저한 취재와 검증으로 이 작품을 썼다는 사실은 책장을 넘기면서, 재판 과정과 법리에 대한 인물들의 대화를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된다. 단순히 흥미와 자극 위주로 쓴 작품이 아닌, 깊이 있는 취재와 해석 그리고 생생한 인물 창조로 빚어내는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출간할 때마다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배심원단] 덕에 마이클 코넬리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을 뿐 아니라 추리소설, 스릴러 장르에 대한 인식의 전환까지 되는 중. 진짜 재밌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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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강변
임미옥 지음 / 봄봄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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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강변]은 충북일보에 ‘임미옥의 산소편지’를 연재해 온 임미옥 수필가가 그간 발표했던 작품들을 엮어서 펴낸 수필집이다. 청주에서 1인1책 펴내기 교실에서 수필을 강의하고도 있다는 저자는 이번 [꿈꾸는 강변]이 세 번째로 펴낸 수필집이다. 


 카카오 브런치의 영향인지 재작년부터 여러 종류의 에세이서적 신간이 풍성하게 서점을 채우고 있다.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저자들이 쓴 파격적이고 날렵한 저작들이 포진하고 있는 에세이 시장에 중년의 수필가가 쓴 수필집이란 ‘호흡도 차분하고 문맥도 지루하게 읽히지 않을까’ 싶은 인상을 먼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임미옥 수필가의 내공은 만만치 않다. 신문에 수필을 연재하고 수필 작법을 강의하고 있다는 저자답게 구성과 문장,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나 느슨함 없이 잘 짜여있다.

 

 [꿈꾸는 강변]을 읽으면서 정말 이 글을 참 좋다, 싶은 내용들을 추려본다.

 

 올해도 흐드러진 꽃송이들이 하늘을 빽빽하게 덮어버린 무심한 꽃길을 걸었다. 그 아이 또래 남학생들이 꽃나무 아래서 툭탁 치고 받으며 장난을 친다. 아이야, 인생길을 가다 길을 잘못 들어서는 이가 어찌 너만 있었겠니. 다시 돌아 나오면 되는 것을 너는 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구나. 백두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어느 지점에 와서 이쪽 길이냐 저쪽 길이냐 택함에 따라 동해와 서해로 흘러가도, 언젠가는 한 바다에서 만나지기도 하거늘, 너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구나.
 26쪽 [꿈길에서 꽃길에서]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던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 훔친 오토바이로 달리다 새벽에 사고로 죽은 아이, “교회에서 밥 준다면서요?”라고 말하던 아이. 잘 알지도 못했던 그 아이를 불현 듯 추억하며 쓴 에세이. 세상에 그렇게 방황하다 덧없이 스러지는 안타까운 아이가 어디 그 아이 하나겠으며, 알고 보면 마음 짠해지는 사연이 어디 한둘이겠나. 그럼에도 이 에세이가 내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그 아이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저자의 마음이 살뜰해서다. 잠시의 인연으로 알게 되었던 그 아이를, 지금은 아마 그 아이의 피붙이조차 간직하고 있지 않을 그 아이의 한 때를, 저자만큼은 의식 깊은 곳에 고스란히 접어 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이렇게 펴 보는 일이 슬프고 고맙고 아름답다. 그래, 인생은 가다가 잘못 들어서면 돌아 나오면 되는 일인데 그렇지.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정 반대의 방향으로 갈라지더라도 언젠가 한 때 정도에는 너른 바다에서 마주치기도 하게 되니 뭐가 어떻든 그래도 계속 흘러가볼 일이다. 그때 그 아이가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린 그 안타까운 인생의 맥을 추모하는 저자의 글 마디마디는 살아오면서 우리가 아는 동안 그리고 모르는 동안 어긋나버린 인생의 많은 인연을 연상하게 만드는 마중물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주목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서로를 탐색하며 마음놀이를 하는 그 짜릿함이라니.... 마음에 흐르는 이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지 모른다. 좋은 감정이 사람사이에 흐르면 그 파급이 치달아 행복이라는 황홀을 창출하며 삶은 풍요로워진다. 우리 모두는 한 이성과 마음놀이를 하다 사랑의 못으로 뛰어들었고, 나오지 못하여 결혼하지 않았던가.
51쪽 [마음놀이]

 

 손녀와 마음놀이를 했다는 저자. 나도 마음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적어놨다, 다이어리에 마음놀이. 저자가 짚었듯이, 연애도 그렇다. 결국 마음놀이다. 서로의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을 들여다보아 주다가 같이 살게 되고, 같이 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그렇게 마음놀이를 할 수 있는 손녀도 만나게 되고, 그런 거구나.

 

 그 무렵 수필을 만났다. 수필은 찬란한 무지갯빛 옷을 입고 다가왔다. 변심해버린 연인의 마음이 이럴까? 온 마음이 수필에게 옮겨졌다. 수필의 늪에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다. 수필은 내게 거대한 물결과도 같았다. 큰 물결이 작은 물결을 덮어버리듯, 큰 감정이 작은 감정을 덮어버리듯, 수필은 내 모든 삶을 일시에 덮어버렸다. 좋은 글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쓰는 게 좋아 글을 쓰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니, 기본자세 익히느라고 한 달 내내 활만 긋에 하는 첼로가 뒤로 밀린 건 자연스런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어느 덧 십년을 보냈다.
 무슨 일이든 열정을 다하여 십년을 몰두하면 전문가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도 있건만, 나의 글 세계는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나의 졸작을 여기저기서 달라는 것이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여기저기 지면에 내보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책을 두 권이나 엮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만 불리던 나를 사람들이 수필가 누구로 내 이름을 불러준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며 써댔던 결과로 얻은 이름이라 생각하며 뿌듯해 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얼마나 야성적인 글들이었던가. 나의 행동들은 겁을 상실한 행동이었다.
 136-137쪽 [첼로 줄을 갈며]

  
 최근에 1인1책 내기가 열풍이다. 무슨 전국민 캠페인 같다. 내 유튜브 채널 하나 정도 있어야 하고, 내가 쓴 책 한 권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게 요즘의 시절이다. 이런 트렌드에 대하여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라는 최근에 읽은 책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원고쓰기나 글쓰기는 단순히 책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임미옥 수필가가 ‘수필쓰기’를 만나게 된 순간을 적은 이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글쓰기는 삶의 고통이나 고민들, 지금 이 순간에는 너무 크지만 인생 전체의 시야에서 보면 별 것 아닐 게 분명한 여러 가지 것들을 덮어버릴 수 있다. 큰 물결이 작은 물결을 덮고 큰 감정이 작은 감정을 덮듯이. 그런 글쓰기의 힘을 느꼈던 저자가 10년 간 몰두해온 수필의 세계가 바로 이 책에 담겼다. 그래서 이 책 [꿈꾸는 강변]은 아주 진중하고 진지하고 견고하다. 

누군가의 마음에 주목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서로를 탐색하며 마음놀이를 하는 그 짜릿함이라니.... 마음에 흐르는 이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지 모른다. 좋은 감정이 사람사이에 흐르면 그 파급이 치달아 행복이라는 황홀을 창출하며 삶은 풍요로워진다. 우리 모두는 한 이성과 마음놀이를 하다 사랑의 못으로 뛰어들었고, 나오지 못하여 결혼하지 않았던가.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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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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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전염 사태가 길어지고 있다. 미국의 확진자 수는 조만간 2만 명을 돌파할 듯 보이며 이탈리아의 사망자 수는 1만 2천명을 넘어섰다. 각국이 전염병 관리를 위해 외국인들의 유입을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그동안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었던 지구촌 시민들은 순식간에 각방을 쓰는 소원한 사이가 됐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공포에 질린 시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면서 정작 음식과 생필품이 간절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해 SNS에 눈물의 호소를 올리는 풍경도 빚어졌다. 마치 지구별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가 되어가는 것 같은 요즘이다.

 

누군가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 이 시기에 비로소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고 그동안 사는 일에 바빠 놓쳤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 참다운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도 한다. 코로나 19가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의미에서의 쉼표를 선사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슬로우 라이프, 힐링의 시간,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는 쉼표의 기회는 먹고 사는 형편이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 정부가 긴급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고 소상공인 대상으로 초저금리 대출을 열겠다는 발표가 나오자마자 각 지역의 주민센터와 은행 등에는 문의가 빗발친다. 어디 문의 뿐인가. 어느 은행에는 대출을 상담 혹은 신청하기 위하여 한걸음에 달려온 상인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줄을 섰음에도 상담의 기회조차 없었다고 토로하는 상인들이 적지 않다. 지금 대출을 받아야 가게가 견디는데 대출이 2달 후에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 쉬는 상인들도 있다. 코로나19가 쉼표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치 법원에서 날아온 차압 딱지처럼 원치 않는 마침표를 받게 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난데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기약 없는 절망의 생활을 견뎌야 했던 저자의 기록이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로 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 3년 동안의 수용소 생활 후 기적적으로 생존한 그는 수용소에서 그가 발견했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이룬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빅터 프랭클 박사가 '로고테라피' 기법에 가장 중요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쓴 책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수용소 생활의 기록, 로고테라피 설명, '비극 속에서의 낙관'의 실제 의미와 역할.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생존기 정도로만 이 책이 읽힐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책이다. 1984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가 쓴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 9-10쪽

 

 

생의 어떤 순간에라도 나의 삶은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삶의 주체가 되는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심지에 따라 지옥의 한가운데에서조차 희망의 빛을 볼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체험기를 통하여, 자신과 자신 주변의 수용소 사람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증명해낸다. 삶을 움직이는 것은 모호한 행복이나 가치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라는 사실을.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발간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 조명 받아야 한다. '실존적 공허' 다른 말로 하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권태와 허무를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세대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 실존적 공허의 문제와 해법을 아주 명확하게 짚어낸다. 코로나19 블루를 호소하는 시민들을 위하여 여러 문화예술 기관에서는 집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문화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는데, 간서치의 입장에서는 이 책이야말로 코로나19 블루를 개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보인다.

 

단순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19 블루 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 여러 문화를 통하여 자리 잡은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경종을 울린다. 유발 하라리니 칼 세이건이니 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모두 틀렸다는 것은 아니나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우연에 의하여 나타난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은 너무나 위험하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 인식이 가지고있는 치명적인 신경증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책 209-210쪽

 

 

우리나라에서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추앙받는 것에 비해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이 된 듯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로고테라피'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때가 아닐까.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타계했지만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책 211쪽)"는 그의 전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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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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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나라 없는 나라]를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때의 감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이광재의 수상소감까지도 너무나 멋졌다. 전봉준에 대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이렇게 깊은 설득력과 대단한 박진감, 무게감을 가진 소설을 또 볼 수 있을까. 이 작품 덕분에 ‘혼불문학상’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한국의 역사를 참신하고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재탄생시키는 소설. 그래서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뿌리의 계승이라는 아이러니를 조화롭게 이루는 작품들이 ‘혼불문학상’의 특징이라는 것.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칼과 혀]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도 참 좋다.

 혀는 피로 되어 있다. 혀는 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혀는 피를 맛보기 원하는지 모른다. 피는 그것을 대하는 자, 구하는 자의 심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는 요리의 재료이기도 하고, 생명력 그 자체이기도 하고,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리는 피를 다룬다. 모든 재료는 피가 있다. 어떤 재료에는 그것이 숨의 형태로, 어떤 재료 에는 그것이 눈의 형태로. 그래서 첸의 아버지 왕테판은 첸에게 요리를 가르칠 때 ‘재료의 눈을 보고 먼저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고, 그렇게 제압한 후에는 재료를 섬세하게 다루어 새롭게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요리가 피를 제압하는 일이라면 전쟁 역시 그렇다. 그러나 전쟁은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서 제압한다. 생명을 되살리는 요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이렇게 부딪힌다. [칼과 혀]는 전쟁에 대항하는 요리, 권력에 맞서는 미학에 대하여 그린 소설이다.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첸은 요리사다. 아버지 왕체판으로부터 물려 받은 거대한 도마를 사용하여 깊이 있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요리 실력을 무기로 첸은 관동군 사령관 오토조에게 접근하여 일본군인들을 독살하고 일본군 점령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오토조는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자나깨나 문학과 요리에만 관심을 두고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미식가다. 하루라도 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을 뿐, 일본의 승패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오토조는 첸의 요리를 즐기기 위하여 그를 지배하려 하여, 첸은 오토조를 요리로 길들여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첸은 오토조를 비롯한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음식에 독을 타 독살을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오토조는 첸을 죽이는 대신 혀 절반을 자르고 부엌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요리만 하는 노예로 삼는다.
 첸에게는 길순이라는 아내가 있다. 조선 여인 길순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생존자다. 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첸의 아내가 되었다. 길순의 오빠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길순에게 오토조를 암살하고 그녀 자신도 순국하라고 강요한다. 길순은 오빠의 명령대로 오토조의 위안부가 되지만 오토조의 목을 찌르는 대신 그의 혀 절반을 깨물어 잘라내버리고 도망친다.
 본토에 원폭을 당하고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자 관동군 전체가 흔들린다. 더구나 소비에트 군이 바로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오토조는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수집한 문화재들을 함께 옮기려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오토조는 중국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첸은 그런 오토조와 같은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첸은 오토조가 도망치도록 돕지만 오토조는 길순의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투쟁했던 근대사를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이 책의 결말을 읽었다.
 이 작품 속에서 도드라지는 건 첸과 오토조의 충돌이다. 첸의 도마는 육중하고 오토조의 혀는 날렵하다. 둘은 시종일관 ‘요리’를 매개로 부딪힌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립의 끝에 둘은 ‘삶의 고통’이라는 인류 공통의 연민을 공유하면서 놀라운 화해에 이른다. 오토조는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찌질한 인물인데 좀처럼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는 오토조가 가진 결핍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첸과 오토조의 화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첸과 오토조의 화해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전의 다른 역사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관점이 새로운 역사소설로 말미암아 독자가 과거의 빚, 과거의 사연에서 벗어나 미래를 보게 만든다. 

 


 길순의 등장과 영향력이 이 작품에서 첸과 오토조에 비해 약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길순은 칼과 혀 이 둘 중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다. 길순은 칼은 썩히고 혀는 잘라내는 인물이다. 대의라는 허울을 빌미로 전쟁을 감행하고, 약자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칼’을 거부하는 여성이며, 피를 탐하고 생명을 지배하려는 혀를 잘라내버리는 인물이다. 길순은 작품 속에서 고요한 폭풍의 눈으로 자리한다. 첸와 오토조의 극적인 화해의 배경에 길순이 있었고, 오토조의 죽음에도 길순이 있었다. 살육과 폭력의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풀꽃으로 계속 살아가고 부활하듯이.

 요즘같이 동아시아 관계가 시끄럽고 위태로운 시절에 이런 작품이 건설적인 미래 설계를 시작하는 작은 벽돌이 되면 좋겠다.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때로 소설은 진짜 현실보다 강렬하게 현재를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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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비망록 - 독일통일 주역들의 증언, 개정판
양창석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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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로이센 제국 시절에 세워졌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겼을 때는 승리의 개선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대결의 문이자 서독과 동독의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저자는 전쟁과 이념의 갈등의 역사를 지나 화해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를 이 책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1989년 5월 2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자세히 기술한 책이다.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독일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공산정권의 붕괴, 최초의 자유총선거, 통일조약 등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공산정권과 민주정권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은 통일에 이르렀다. 독일 자국민들조차 대단한 역사였다고 회상하는 이 사건은 타국인 내가 보기에, 더구나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의 한 사람이 보기에 ‘기적’ 그 자체다. 지금의 한반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분단 70년, 이미 북한과 남한의 시민 정서가 이렇게나 다른데 과연 통일이 가능할까? 단절된 두 개의 사회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이런 우문에 대한 현답이라고 할만하다. 이 책을 쓴 양창석 저자는 28년 동안 통일부에서 근무했다. 특히 2년 반 동안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통일연구관으로, 그 후에는 독일통일연구단장으로 일했다. 이런 경험을 집대성하여 저자는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으로 나온 것이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 원고를 다듬으면서 저자는 독일 통일 주역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증언들과 통일 과정에 참여한 국가 수반들의 회고담을 함께 원고에 반영했다고 한다.

 

 증언, 회고담과 함께 현장의 생생한 사진들이 실려 있는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통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나라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인 모두에게 ‘통일’은 현실이다. 현재의 모든 순간이 한반도 통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가 2020년인 올해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에게 ‘통일’은 과거도, 영영 오지 않을 미래도 아닌 현재상황이라는 것.

 

 

  이 책의 주인공은 동독 주민들이다.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흡수통일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동독 주민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다. 통일의 주체를 서독으로 보는 것이다.
7쪽

 

 그는 통제와 감시가 있었지만 100% 절대적인 통제는 불가능했다면서 조직 활동은 통제했지만 개인의 사고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비록 정치집단을 조직할 수는 없었으나 친구들끼리 토론 모임은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모임이 1989년 데모 확산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45쪽 

 

 

 독일 통일이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이 책이 짚어준다. 통일의 주역은 정부나,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아니라 시민사회라는 점이다. 물론 통일이 이루어지려면 정부와 국제사회의 분위기, 주변국의 상황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소위 말해 ‘때’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대로 이 때 즉, 기회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절대 오지 않는다.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대박적 통일을 이루려면 국민 개개인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독일 통일이라는 우수한 선례를 배우고, 현재의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읽고 개개인이 ‘통일’에 가장 적합한 사고가 무엇인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 대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정치나 국제 관계를 공부하는 대학생뿐 아니라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통일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이 형성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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