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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나라 없는 나라]를 몇 년 전에 읽었다. 그때의 감상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좋은 소설이었다. 소설가 이광재의 수상소감까지도 너무나 멋졌다. 전봉준에 대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이렇게 깊은 설득력과 대단한 박진감, 무게감을 가진 소설을 또 볼 수 있을까. 이 작품 덕분에 ‘혼불문학상’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한국의 역사를 참신하고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재탄생시키는 소설. 그래서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뿌리의 계승이라는 아이러니를 조화롭게 이루는 작품들이 ‘혼불문학상’의 특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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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칼과 혀]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도 참 좋다.
혀는 피로 되어 있다. 혀는 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혀는 피를 맛보기 원하는지 모른다. 피는 그것을 대하는 자, 구하는 자의 심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피는 요리의 재료이기도 하고, 생명력 그 자체이기도 하고,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요리는 피를 다룬다. 모든 재료는 피가 있다. 어떤 재료에는 그것이 숨의 형태로, 어떤 재료 에는 그것이 눈의 형태로. 그래서 첸의 아버지 왕테판은 첸에게 요리를 가르칠 때 ‘재료의 눈을 보고 먼저 그것을 제압’해야 한다고, 그렇게 제압한 후에는 재료를 섬세하게 다루어 새롭게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요리가 피를 제압하는 일이라면 전쟁 역시 그렇다. 그러나 전쟁은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죽여버리기 위해서 제압한다. 생명을 되살리는 요리와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이렇게 부딪힌다. [칼과 혀]는 전쟁에 대항하는 요리, 권력에 맞서는 미학에 대하여 그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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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첸은 요리사다. 아버지 왕체판으로부터 물려 받은 거대한 도마를 사용하여 깊이 있는 요리를 만들어낸다. 이런 요리 실력을 무기로 첸은 관동군 사령관 오토조에게 접근하여 일본군인들을 독살하고 일본군 점령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 오토조는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자나깨나 문학과 요리에만 관심을 두고 다양한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미식가다. 하루라도 빨리 본토로 돌아가고 싶을 뿐, 일본의 승패는 그에게 중요치 않다. 오토조는 첸의 요리를 즐기기 위하여 그를 지배하려 하여, 첸은 오토조를 요리로 길들여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첸은 오토조를 비롯한 일본 군인을 대상으로 음식에 독을 타 독살을 시도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오토조는 첸을 죽이는 대신 혀 절반을 자르고 부엌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요리만 하는 노예로 삼는다.
첸에게는 길순이라는 아내가 있다. 조선 여인 길순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생존자다. 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첸의 아내가 되었다. 길순의 오빠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길순에게 오토조를 암살하고 그녀 자신도 순국하라고 강요한다. 길순은 오빠의 명령대로 오토조의 위안부가 되지만 오토조의 목을 찌르는 대신 그의 혀 절반을 깨물어 잘라내버리고 도망친다.
본토에 원폭을 당하고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자 관동군 전체가 흔들린다. 더구나 소비에트 군이 바로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오토조는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러나 만주에서 수집한 문화재들을 함께 옮기려던 욕심을 버리지 못한 오토조는 중국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첸은 그런 오토조와 같은 연민을 공유하게 되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첸은 오토조가 도망치도록 돕지만 오토조는 길순의 환상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투쟁했던 근대사를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이 책의 결말을 읽었다.
이 작품 속에서 도드라지는 건 첸과 오토조의 충돌이다. 첸의 도마는 육중하고 오토조의 혀는 날렵하다. 둘은 시종일관 ‘요리’를 매개로 부딪힌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립의 끝에 둘은 ‘삶의 고통’이라는 인류 공통의 연민을 공유하면서 놀라운 화해에 이른다. 오토조는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찌질한 인물인데 좀처럼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는 오토조가 가진 결핍을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첸과 오토조의 화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첸과 오토조의 화해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전의 다른 역사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관점이 새로운 역사소설로 말미암아 독자가 과거의 빚, 과거의 사연에서 벗어나 미래를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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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순의 등장과 영향력이 이 작품에서 첸과 오토조에 비해 약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길순은 칼과 혀 이 둘 중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다. 길순은 칼은 썩히고 혀는 잘라내는 인물이다. 대의라는 허울을 빌미로 전쟁을 감행하고, 약자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칼’을 거부하는 여성이며, 피를 탐하고 생명을 지배하려는 혀를 잘라내버리는 인물이다. 길순은 작품 속에서 고요한 폭풍의 눈으로 자리한다. 첸와 오토조의 극적인 화해의 배경에 길순이 있었고, 오토조의 죽음에도 길순이 있었다. 살육과 폭력의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풀꽃으로 계속 살아가고 부활하듯이.
요즘같이 동아시아 관계가 시끄럽고 위태로운 시절에 이런 작품이 건설적인 미래 설계를 시작하는 작은 벽돌이 되면 좋겠다.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때로 소설은 진짜 현실보다 강렬하게 현재를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