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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63
다니엘 디포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만난 로빈슨 크루소를 이번에 열린책들의 완역본으로 다시 만났다. (참고로 우리집에는 금성출판사의 소년소녀 세계문학 64권 전집이 있었다.) 완역본으로 다시 만난 로빈슨 크루소는 엄청 심각하고, 또 엄청 심각하게 기독교적이었다. 아마도 어렸을 적엔 그냥 흥미진진한 모험담쯤으로 읽지 않았을까. 나만의 요새를 짓고, 빵, 비스킷, 치즈, 말린 고기, 술 등 난파선에서 가져온 식량을 비축하고, 염소 고기와 럼주는 어떤 맛일까 상상하면서.
사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완역본 로빈슨 크루소는 일단.. 가독성이 제로다. 한번에 쭉쭉 읽히지가 않아서 어림잡아 대략, 하루에 삼십분씩, 몇주에 걸쳐 나누어 읽어야만 했다. 속도가 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나중에 어차피 할 이야기를 번번히 ‘이 이야기는 차차 하겠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보면 알겠지만‘ 하며 앞에서 이중 삼중으로 언급하고, 또 그렇게 꺼내다 만 뒷얘기에 정신팔리게 해놓고는 다시 앞얘기를 이어가 이야기를 장황하게 만들고 흐름을 깨는데에 있었다. 말주변없는 사람이 남한테 재밌는 이야기를 전달하고는 싶은데 도무지 하려는 이야기의 맥을 못 잡고 중간에 삼천포로 빠져 필요없는 설명만 잔뜩 늘어놓은 그런 느낌. (사실 내가 바로 이 말주변없는 사람이다.) 아무튼 이게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의 설정인지 아니면 저자인 다니엘 디포가 썰을 푸는 스타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몰입을 깨고 글을 지루하게 만드는데 한몫 단단히 한 것은 분명하다. 진짜 나중에는 혹시 저자가 같은 사건을 여러 사람이 써서 여러 각도에서 보여지는 신약성서의 효과를 노리나 싶을 정도로 계속 앞에 꺼냈던 뒷얘기에다 살을 더 붙여서 뒤에 다시 쓰고 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어느 정도 선에서 축약된 번역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사실 글이 지루한 것 보다도 나는 로빈슨 크루소가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이 더 불편했는데 (저자인 다니엘 디포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를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게끔 만드려는 의도를 숨긴 책은 피곤하다.)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해 무인도에 갇히게 되자 자신이 죄를 지어 벌을 받아 이 지경에 이르렀고 다행히 그 벌을 받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남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비를 베푸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섬에서 지내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서 나는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에게 닥친 일이 자신이 잘못하여 받는 신의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영 맘에 안 들었다. 무인도에 갇힌 것 = 평탄한 생활을 내던지고 모험을 감행한 개인적인 판단 미스로 인한 자업자득. 이런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불행이니 하나님의 벌이니 하는 표현들을 갖다붙이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그런 마인드로 그가 살던 시대를 바라보자면 삶이 팍팍했던 노예계층의 사람들은 신의 벌을 받아 그런 것이고 삶이 풍요로왔던 지배계층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말인가. 지배계층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교리로 벌이니 어쩌니 하며 각각에게 주어진 지위나 처한 상황의 당위성을 세뇌시키는 것 같아 상당히 불쾌했다. 대관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며 불린 재산이 무슨 신의 축복? 그래서 그런가 이웃 섬의 원주민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에게 자신을 주인님이라 부르게 하는 것도 좀 웃겼는데 아마도 이런게 다 시대가 달라져서 이상하게 보이는 듯 하다.
그리고 원주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현대사회의 선교활동과 식민지 개척 당시의 선교활동은 구원의 목적이 많이 달랐던게 아닐까. 로빈슨 크루소는 그에게 구출되기 전까지 식인행위를 해온 프라이데이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선과 악을 깨닫게 하는데, 그렇게 거창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운운하며 사람답게 만들어서는 결국 그를 하인 삼으니 말이다. 화자인 로빈슨 크루소를 구원하는 위치에 세우고 원주민은 구원받는 위치에 세워, 그가 원주민의 목숨을 구해준 뒤 원주민이 얼마나 그에게 감사하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진실되게 그를 위해서는 뭐든 하겠다고 맹세하는지를 묘사하는걸 봐도 그렇고, 어째 구원으로 인심 쓰는 척하면서 그저 다루기 편한 노예를 늘리기 위한 도구로 종교를 이용한 것 같아 난 좀 그랬다. ‘그러니 이 가엾고 불쌍한 야만인이 나로 인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는지 (p. 298)‘ ‘잘은 모르지만 아마 내가 그의 영혼을 구해 주고, 그가 종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관한 참 지식을 깨닫게 만들고, 그래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을 아는 일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도구까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p. 298-299)‘ ‘그가 말했다. ˝주인님은 야만인들을 착하고 얌전하고 온순한 사람들로 가르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에게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저런!˝ 내가 말했다. ˝프라이데이,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는 거냐? 나는 사실 무식한 사람에 불과하다.˝ ˝됩니다. 됩니다.˝ 그가 말했다. ˝주인님은 나를 착한 사람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니 그들도 착한 사람들로 가르칩니다. p. 307)‘ 식인행위는 나쁘니까 원주민들을 계몽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까지야 좋다 이거야, 하지만 결국엔 데려가 하인 삼는다는게 영 구리다는 거다. 물론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지금의 내가 보기에 좀 불편하다 뿐이지 그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작품임은 알고 있다. 다만 동심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없다는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