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잡기 -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
마크 헤이머 지음, 황유원 옮김 / 카라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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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하늘하늘한 물빛 설렘이 인다.
연한 파스텔톤의 바탕에 금장으로 수를 놓은 듯한 로즈골드 폰트는 고급스럽고, 한국어판에만 한해 수록되었다는 빈티지 삽화, 카키색 속지와 가름끈, 그리고 책등에 찍힌 출판사 로고 Caracal의 side profile 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이런 고퀄의 양장이라면 겉표지나 띠지로 가리지 않은 출판사의 자신감이 공연한 객기로 보이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때 갈라지는 소리가 나서 간담이 서늘해지는 체험을 몇번 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낙장의 낌새가 없고 잘 붙어 있다. (돈 몇 푼 아낀다고 중고 최상등급으로 산 댓가일까. 책은 깨끗하고 새 책 같은데 책장 넘기는 소리가 전설의 고향이다.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후두두둑 떨어지는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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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안쪽에 등장하는 작가의 프로필과 책의 말미에 나오는 옮긴이에 말에 따르면 작가는 열여섯에 집을 나와 2년 정도를 홈리스로 지내다가 부랑자 생활을 접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철도원에서 7년 정도 일을 한 뒤 예술대학을 가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정원사가 되었다고 한다. 정원 일과 두더지잡이를 병행하면서 시도 썼다. 결혼을 해서 아내와 두 아이가 있고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노년에 작가로 데뷔해 성공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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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묘사는 (작가가 노년을 보내고 있는) 웨일즈 근방의 계절, 기온, 공기 같은 것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책에서는 잉크냄새가 나지만 책덕후중에 적당한 양의 잉크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이것도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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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일 당시 숲에서 지낸 수많은 밤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잠깐만.. 숲에는 벌레가 많은데.. 😨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데 이사람은 개구리, 달팽이, 온갖 종류의 곤충들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고 평온하게 그때의 일들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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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일에 대한 설명도 나오고 - 정원 일이란 그저 식물들을 길러내기만 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일 (두더지, 민달팽이, 진딧물, 말벌, 쥐, 잡초 등의 처리)도 포함된다는 것. 그래서 두더지를 잡을 때는 가능한 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이기 위해 신경을 쓰고, 목초지의 풀을 벨 때도 야생동물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기 위해 예초기나 스트리머 대신 낫을 사용해 벤다는 것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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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더지와 두더지를 잡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은 좀 생소하기도 하고 (내가 두더지를 잡을 것도 아닌데) 좀 지루하기도 해서 대강의 내용만 훑었다. 다 그런건 아니고 군데군데 흥미로운 내용도 꽤 있다. 두더지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것이 빽빽한 토양이라는 것. 그래서 무거운 롤러로 정기적으로 밀어주는 운동경기장은 두더지로 인해 골머리를 싸맬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음. 손흥민의 토트넘 구장도 롤러로 한번씩 밀어주겠군. 🤔 순간 내 머리를 스친 쓸데없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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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충격적인(?) 사실은 먹이를 보관해두는 저장실인데 지렁이를 먹고 사는 두더지는, 꼬리 부분을 잃으면 꼬리가 재생하는데 걸리는 기간 (4주에서 6주) 동안 땅을 팔 수 없게 되는 지렁이의 핸디캡을 이용해 살아 있는 지렁이를 한데 모아 놓고 한쪽 끝을 물어뜯고는 저장해둔다고 한다. 가축을 사육하는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지 라고 두더지가 따질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뜨아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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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풍경, 우리의 신화, 시, 문학의 구석구석에서도 두더지가 발견된다. 두더지는, 러시아데스먼을 제외하면, 혼자서 생활하는 동물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 등장하는 몹시 유쾌한 두더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이 책 속에서 쥐, 두꺼비, 오소리와 친구가 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먹지않는 생명체들은 의인화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두더지는 혼자 생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등장한다. 《나니아 연대기》의 릴리글러브스는 훌륭한 정원사이자, 말하는 두더지들로 이루어진 전사 집단의 리더 두더지이다. 옥스퍼드셔의 선돌standing stone 을 숭배하는 두더지들의 고대 제국에 관한 낭만적 이야기인《덩튼 숲Duncton Wood》은 전투와 엉뚱한 장난으로 가득하다. 어떤 아동 도서에서는 두더지와 그 친구들은 다양한 모험을 벌인다. 어쩌면 인간은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힘들어하는지도 모른다. - P64

나는 밤을 보낼 작은 텐트를 떠올리고
잔가지를 태운 자욱한 연기 속에
아침에 마실 차를 끓이며
반짝이는 추위를 깨울 순간을 상상하네 - P94

어릴 적 나는 모든 걸 알고 싶어 했지
이제 나는 늙었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 P161

이것은 소소한 삶이고, 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만다. 나는 그게 좋다. 소소함이라는 개념이 좋고, 인간의 기본적인 것들이 주는 경이로움이 좋다. - P174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버렸다. 캠프용 휴대 난로, 냄비와 팬, 텐트 같은 물건들을 버리자 짐이 가벼워졌고, 나는 내게 필요한 다른 것들을 모았다. 물병, 담요, 방수포 같은 것들을, 나의 모든 세상을 배낭 하나에 넣고 다니는 일은 내게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사이의 차이를 금세 가르쳐줬다. 나는 책이 그리웠다.
나는 양말을 신던 게 그리웠다. 나는 닳은 부츠를 버리고 테니스화를 신고 걸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 거추장스러운 짐은 모두 버렸고, 오직 필요한 것들만 들고 다녔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마음이 여려지면서, 나는 원하는 것에 조금은 굴복해버렸다. 나는 옷과 책을 너무 많이 산다. - P182

연민은 기쁨과 슬픔의 상호 작용 가운데서 생겨난다.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연민, 당신 스스로의 실수에 대한 용서가 그것의 토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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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것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다른 무언가가 될 수는 있다. 그것들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모든 것들은 일시적이고, 모든 것들은 닳아서 먼지가 된다. 모든 것에는 그 끝이 있으며, 모든 것은 다음 것의 시작을 품고 있다. 치유의 감정이란 그것들을 예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용서와 사랑과 성장과 재출발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다. 흉터는 삶의 불가피한 요소이다. - P200

나는 늘 아래를 내려다보지

풀 속에 숨어 있는 두꺼비와 꿩을 보고
눈으로 보기도 전에 이미
내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여우 한 마리가 있음을 알아

나는 미궁에서도 길을 잃지 않지만
걸으면서 나 자신을 잃을 순 있고
내면의 짐승을 만날 수도 있네 - P214

오늘 아침 물집이 잡힌 두 손
오랜 세월 내내 삽을 들어서 집게발처럼 굳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손잡이를 다시 꼭 붙드네
약간의 고통
하지만 비 냄새를 머금은 바람의 기쁨을
앗아 갈 만큼은 아니지.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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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7 19: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깨미님 표지묘사만으로 막 사고싶어집니다 ㅎㅎㅎ

북깨비 2022-03-28 01:29   좋아요 2 | URL
표지도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정말 맘에 들어요. 녹색광선 출판사처럼 카라칼 출판사에서도 계속 요 스타일의 장정으로 여러가지 작품들이 나오면 좋겠다 하고 바래봅니다.

서니데이 2022-03-27 2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에서는 정원에 두더지가 자주 나오는 게 아니라서 낯선 느낌일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북깨비님, 좋은 하루 되세요.^^

북깨비 2022-03-28 01:40   좋아요 3 | URL
그래서 그런지 저도 두더지 잡는 일이 직업이 될 정도로 두더지가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작가가 해충같은 걸 죽이는 것과 포유류를 죽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제라 갈등을 느꼈다는 말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동화책 같은데서 귀엽게 나와서 더 그런 것 같아요.

scott 2022-03-28 0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더지!(엄마와 새끼들)
오래전 제가 초딩시절
저희집 정원에서 가장 큰 나무(땅 속)에 살았는데

정원에 쥐가 사라져서
은근히 이뻐하고 귀여워(대낮에는 잠만 줄창 잠)
했던 적이 ^ㅅ^

북깨비 2022-03-28 01:36   좋아요 3 | URL
사실 실제로 두더지를 본 적도 없어요. 두더지의 생김새도 알듯 말듯 생각이 안나서 구글에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눈이 안보이고 후각이 아주 발달했다고 하는데 정말 딱 그렇게 생겼더라고요. 그게 좀 귀엽게 보이기도 한데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보면 저는 기절할 것 같아요. 😅

라로 2022-03-30 0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 맘에 들어요! 두더지 여기도(제가 사는 사막) 두더지는 잘 들어보지도 못한 것 같아요. 여기는 카요테와 곰, 그리고 마운틴 라이온. ㅠㅠ 두더지는 귀엽기라도 할 것 같은데,, 암튼 이 책 보관함으로. 😅

2022-03-30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30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30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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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0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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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31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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