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OF 2005] 올해의 책|‘해리 포터와 혼혈왕자’
16개국서 동시발매 첫날부터 돌풍, 미국서만 1초에 80권꼴로 하루 동안 690만부 팔려
국내서도 발매 시작 후 6주째 베스트셀러 1위... 우리 시대 최고의 문화상품 브랜드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여섯 번째 이야기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Harry Potter and the Half-Blood Prince·이하 ‘혼혈왕자’로 약칭)가 2005년의 지구촌을 강타했다.
지난 7월 16일 중세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에서 저자 조앤 K. 롤링과 전세계에서 초청된 어린이 70명이 참석한 가운데 ‘혼혈왕자’ 출간 축하행사가 열렸다. 현지 시간으로 0시1분 롤링이 ‘혼혈왕자’의 첫 페이지를 낭독한 것을 신호로 미국, 영국, 캐나다, 홍콩 등 세계 16개국에서 동시 발매가 시작됐다.
책은 발매 첫날부터 전세계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켰다. 발매 첫날 미국에서만 1초에 80권꼴로 하루 동안 690만부가 팔렸고, 영국에서도 200만부 이상이 팔리는 등 종전까지의 각종 출판기록을 경신했다. 첫날 하루에만 세계에서 1000만부가 넘게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대히트를 기록 중이다. 10월 28일 번역출판해 배포한 초판용으로 100만부를 인쇄했다. 아동물에서 초판 100만부 인쇄는 신기록이다.






이 책을 번역해 펴낸 문학수첩 김병호 편집장은 “12월 10일 현재 130만부가 팔렸다”고 말했다. 한국출판인회의가 교보문고 등의 집계를 참고해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2월 14일 현재 ‘혼혈왕자’는 6주째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다. MBC 인기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자주 언급된 데 힘입어 17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지켜왔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혼혈왕자’가 출간되자마자 왕좌를 내줘야 했다.
해리 포터 신작이 나올 때마다 벌어지는 현상이었지만 이번에 ‘혼혈왕자’가 발매개시되던 때도 미국에서만 5000여개의 서점 앞에서 사람들은 책을 조금이라도 빨리 받기 위해 전날 아침부터 장사진(長蛇陣)을 쳤다. 뉴욕에서는 타임스퀘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발매시간 카운트다운을 중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해리 포터가 발매되는 날은 지구촌 축제일을 방불케 했다. 가히 광풍(狂風) 수준인 ‘해리 포터 신드롬’의 열성팬을 가리키는 ‘포터 매니아(Potter Mania)’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나라만 해도 10만명을 넘는 팬클럽이 결성돼 있다.
‘혼혈왕자’의 폭발적 호응에 힘입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이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기록을 세워나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63개 언어로 번역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지난 10월 14일로 판매부수 3억부를 돌파했다. 1997년 해리 포터 시리즈가 첫선을 보인 지 8년 만에 ‘3억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이쯤되면 해리 포터 시리즈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말을 듣는 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해리 포터 열풍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 한글판은 1999년 11월 첫선을 보인 이래 아동물 출판사상 처음으로 판매부수 1000만부를 넘어섰다.
해리 포터 발매일은 지구촌 축제일?
‘혼혈왕자’가 출판 최고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조짐은 진작부터 예고돼 있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서점 아마존닷컴의 ‘혼혈왕자’ 영문판 사전 주문량이 140만부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종전 기록은 해리 포터 시리즈 제5탄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130만부였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전작(前作)들이 세운 기록을 해리 포터 신작(新作)이 깨는 것이다. ‘혼혈왕자’의 미국 초판 인쇄부수는 1080만부로, 이 역시 출판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혼혈왕자’는 각종 최고기록을 갈아치운 작품답게 해프닝에 있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난 6월 영국에서는 ‘혼혈왕자’가 발간되기 전에 그 내용을 대중지 두 곳에 팔아넘기려 한 용의자 2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혼혈왕자’는 발매 개시로부터 12시간도 안돼 607쪽에 달하는 책이 스캐닝돼 인터넷에서 불법 유통되기도 했다. 또 저자 롤링이 ‘혼혈왕자’에서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죽게 된다”고 언급하자, 이 책이 발매되기 전에 세계의 도박사들은 이 인물이 누구인지를 놓고 거액의 도박까지 벌였다. 캐나다에서는 서점의 실수로 발매 개시일보다 사전에 ‘혼혈왕자’가 판매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법원까지 나서서 ‘해리 포터 내용 사전 유출 금지’ 명령을 내렸다.
‘혼혈왕자’에 대해 유력 매체들의 호의적인 반응도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롤링이 완벽한 상상력으로 현실 아닌 현실 속에 매혹의 판타지를 다시 한번 창조해냈다. 이 책은 ‘반지의 제왕’과 같은 고전에 필적하는 책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완전히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평했다. AP통신은 “이 책은 대다수의 언론에서 비평가들조차 눈물을 흘리게 하는 롤링의 가장 심오하고 완성도 높은 책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해리 포터는 이제 우리 시대의 일상(日常)이 됐다. 전세계의 어린이들은 해리 포터를 읽고 영화로 보고 캐릭터를 만지면서 자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현재 4편까지 영화로도 제작됐으며 개봉될 때마다 전세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리 포터는 책의 영역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 최고의 문화상품 브랜드로 등극한 것이다. 포브스지(誌)는 해리 포터의 브랜드 가치가 10억달러(약 1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혼혈왕자’ 한글판은 번역 판권을 가진 출판사 문학수첩이 지난 6월 금강산에서 북측 출판사 관계자와 만나 초판 100만부를 북한에서 임가공 형태로 인쇄하려고 시도해 화제가 됐었다.
그러면 ‘혼혈왕자’는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볼드모트의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마법사 세계와 머글(보통사람) 세계는 경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말포이의 아버지가 아즈카반의 감옥에 갇히고, 말포이는 볼드모트의 명령을 받으며, 스네이프는 말포이를 도와주고, 만일의 경우 그를 대신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호그와트의 보안이 강화되는 가운데 해리는 덤블도어의 개인지도를 받게 된다. 그 수업에서 볼드모트의 과거를 보게 된 해리는 볼드모트가 자신의 영혼을 7개의 호크룩스에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리와 덤블도어는 볼드모트의 영혼이 깃든 호크룩스를 찾기 위하여 볼드모트가 어린 시절을 지낸 동굴을 찾아가지만, 누군가 이미 호크룩스를 가져갔다는 사실만을 밝혀내는데….’
다채로운 마법의 향연으로 시작된 ‘혼혈왕자’의 주무대는 음산하고 암울한 전쟁터다. 이미 제4탄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제5탄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죽었는가 하면, 어린 학생들도 치열한 전투에 참여해왔기 때문에 ‘혼혈왕자’의 이러한 배경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편들보다 훨씬 암울해진 분위기 속에서 유머와 로맨스, 재기발랄한 대사로 그 내용이 더욱 흥미진진해졌다는 평이다. 또 늠름한 청소년이 된 해리는 덤블도어의 정통 제자로서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존재론적 고민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면서 자아성숙의 과정을 보여준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국적과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린이만 좋아하는 작품이었다면 해리 포터가 이렇게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해리 포터가 이처럼 인기 높은 이유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동화
우선 스토리 자체가 재미있다는 분석에 대부분 공감한다. 김성곤 서울대 교수는 “해리 포터가 재미와 감각과 구성 면에서 컴퓨터 게임 같은 소설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즐겨 읽는다”며 “고아인 해리가 겪는 역경과 모험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고 박수를 보내며 마법학교에서 일어나는 환상적인 사건들은 엄청난 즐거움과 대리만족을 준다”고 분석했다. 손향숙 서울대 초빙교수는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옛 이야기, 학교소설, 모험소설, 판타지 등 영국 아동문학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고 사회가 요구하는 코드에 대체로 부합한다”고 분석했다.
판타지 소설의 대작(大作)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니아 연대기’의 해설서인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를 쓴 번역가 홍종락씨는 “작가가 재미난 스토리를 뛰어난 필력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면서도 “분석만으로 ‘해리 포터 신드롬’을 설명하긴 역부족이며 해리 포터에는 분석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이다. 해리 포터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해리 포터 시리즈가 어린 영혼을 유혹하고 이들의 기독교 정신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독일 작가 가브리엘 쿠비는 “해리 포터는 기독교인을 타락시킬 수 있는 교묘한 유혹물”이라며 반(反)해리 포터의 선봉에 섰다. 레바논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국가에서는 해리 포터를 금서 목록에 올려놓고 있다.
‘혼혈왕자’ 등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품성을 둘러싼 논란도 치열하다. 손향숙 서울대 초빙교수는 “해리 포터 시리즈가 폭발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동문학 고전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에 실린 평론에서 “해리 포터가 누리는 인기는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에 기원한다기보다는 기술과 소비에 익숙한 독자의 감성을 파악하고 자극한 데서 얻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책이 대중성을 회복하는 데 해리 포터가 기여했다”는 옹호의 목소리도 높다. USA투데이는 “혼혈왕자는 아직 책이라는 형식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대중 사이에서 화두이자 열광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선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은 “사회적 현실이 마법사회라는 허구적 상상과 결합해 일궈낸 공존의 세계는 이제 사람들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흥미를 일으키고 있다. 이제 해리 포터는 아이를 위한 동화일 뿐만 아니라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로서 찬사를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영철 주간조선 기자(yc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