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성희] 바보들

야콥 아르주니 지음
안소현 옮김, 이레
어렸을 적에 천사나 요정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들을 더러 읽었을 겁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해피엔딩하는 그런 달콤한 이야기 말입니다. 이제 세상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 요즈음,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아니 만일 전능한 존재를 만난다면 뭘 빌까요?
독일 신진작가의 이 소설은 잠시라도 그런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해줍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장과 불편한 관계인 광고회사 직원, 자신감을 잃어버린 유망 영화감독, 유명 가수가 된 아들과의 사랑을 되찾고 싶은 노모, 걸작을 남기고 싶은 삼류 대중소설 작가, 유명 피아니스트 아내와 천재 아들 곁에서 홀로 서고 싶은 전업남편이 각각의 주인공입니다.
삶의 무게에 시달리는 이들 앞에 요정이 나타납니다. 서양 동화에 등장하는 그 귀엽고 깜찍하며 장난치기 좋아하는 그 요정입니다. 여기서는 맨발에 팔랑거리는 하늘색 옷차림의 소녀 모습으로 등장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요정은 지극히 현대적입니다. 출퇴근 시간에 매여 있고, 부서간 전근도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장 요정에게 시달리기도 하니 샐러리맨과 다름없습니다.
능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생(永生).건강.금전.사랑에 관한 소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엉뚱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북한 주민을 위해 고기를 보내주라고 빌자 유럽에 병든 소가 생기면 그 고기를 보낼 거라며 광우병이 돌게 한 적도 있다는군요.
그래서 책은 '환상 동화'라 자처하지만 풍자의 냄새를 짙게 풍깁니다. 가장 많은 소원이 '유명해지기'라서 TV 토크쇼가 범람하게 했답니다. 식기세척기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많은 소원이라고도 합니다.
어쨌거나 다섯 주인공들은 소원이 이뤄진 다음에도 진정 행복한 듯 보이지는 않습니다. 소원에 따른 변화의 폭이 넓고 다양해 뜻밖의 반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우리의 평소 소원이 이뤄지든 못 이뤄지든 삶은 여전히 쓸쓸하거나 우스꽝스럽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것도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냉담한 요정과 삶에 지친 주인공들이 빚어내는 서글픈 농담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 이런 요정이 찾아오면 어떤 소원을 빌겠습니까? 소원을 떠올리기 전에 책 속의 요정이 전하는 이야기를 새겨 둘 것을 권합니다.
"소원에 관한 일은 흡사 삶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아요. 더 높은 데 있는 것을 잡으려 하면 그만큼 더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날씨나 기분에 따라 혹 달콤 쌉싸래한 책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합니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중앙일보 2006-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