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성희] 뿌리들의 이야기

강화고등학교 엮음

어르신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만 엮어도 소설 하나는 거뜬할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걸 종종 듣습니다. 사실 그럴 만합니다. 환갑을 넘게 살았다면 가슴이 고동 치던 기쁨, 애끊는 듯한 슬픔, 주먹이 부르르 떨리던 분노 등 곡진한 사연 한 자락 없는 분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일제 치하, 해방 정국, 한국 전쟁, 혁명 등 굵직한 사건을 몸으로 겪고, 압축성장이라 일컬어지는 근대화의 흐름을 숨가쁘게 헤쳐온 세대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이 책은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그런 사연들을 묶은 것입니다. 일종의 전기(傳記)집입니다. 지난해 초 인천시 강화군의 강화고등학교(교장 이일섭)에선 학생들 인성교육을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전기를 써오라는 과제를 냈답니다. 연말이 되니 200여 편의 글이 모였는데 그냥 묵히기가 아까워 그중 32편을 고르고 추려 묶은 것이 이 책입니다.

작가나 기자 등 글쟁이들이 쓴 것이 아닌 만큼 글은 매끄럽지 않습니다. 디자인 역시 전문 출판사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어서 투박합니다. 그러나 이 책엔 그런 모자람을 뛰어넘는 장점이 돋보입니다. 무엇보다 진솔합니다. 생활에서 우러난 지혜나 인간의 도리가 꾸미지 않은 채 담겼습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남들 보라고 쓴 것도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아, 나도…"할 구절,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강원도 최연소 교장을 지낸 외할아버지 김진태 옹의 이야기를 정리한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교원평가 때 민원에 시달리던 김 옹은 "사람은 정도(正道)를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사람이 아닌 거다"란 집안의 가르침이 떠올라 여관을 전전하며 공정한 평가를 했답니다. 그런 외할아버지는 퇴임 후 외손자에게 "인간은 겸손해야 하는 거다. 최(最)나 장(長)이 붙은 자리에 있으면 거기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나는 평생 이 두 글자에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라고 일러줍니다.

글을 쓰기 위해 한 구절을 집어냈지만 이 책은 생활사로도 읽히고,'밥상머리 교육'이 사라진 오늘날 생생한 교재 구실도 할 수 있습니다. 대화는커녕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 뵙기도 썩 내켜하지 않는 세태입니다. 이런 식으로 집안 어르신의 전기를 직접 만들어본다면 가족 두루두루 잊지 못할 가정의 달 선물이 되지 싶습니다. 굳이 일반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비매품'을 소개한 까닭입니다. 참, 책을 엮은 강화고등학교로 연락하면 여분의 책을 보내줄 수도 있답니다. 아니면 학교 홈페이지(www.ganghwa.hs.kr)에 책 내용을 압축파일 형태로 올려놓을 예정이라니 읽어 보실 수는 있을 겁니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중앙일보 200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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