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죽었는가. 한때 문화의 맹주였던 소설이 통 팔리지 않는다. 영화 한 편에 1천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 동안 소설책은 1만부 이상 팔리는 작품을 찾기 어렵다. 웬만한 신간소설은 대대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초판 3,000부를 넘기기 힘들다.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한국소설의 위치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터넷서점 ‘예스24’가 6월14일 집계한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30위 안에 든 한국소설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12위)과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25위)뿐이다. 교보문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10위, ‘아내가 결혼했다’가 23위에 랭크됐을 뿐이다. 오히려 외국소설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제작진이 선택한 책이라고 홍보하고 있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비롯해 ‘다빈치 코드 1, 2’,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등이 영화 개봉에 힘입어 상위권에 랭크돼 있다.

이를 두고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가들의 역량 부족부터,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란 분석까지 다양한 진단들이 쏟아져 나온다. 2006년, 지금의 한국소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 소설의 회생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소설은 분명 위기에 서 있다. 지난해 출판 물량 중에서 한국소설이 차지한 비율은 5%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설을 찾는 독자가 줄고 있다. 지난해에는 문화예술위원회가 복권기금으로 마련한 돈으로 ‘힘내라, 한국문학’이라는 문학회생 프로그램도 시행했다. 우리 소설이 벼랑끝에 몰렸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소설이 팔리지 않는 것은 맞지만 소설의 위기까지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정확히 바로잡자면 ‘독서의 위기’라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 즉, 책 읽는 사람의 숫자가 줄었다. 영화의 인기가 높고 24시간 TV방송이 끊이지 않으며 인터넷을 즐기는 세상이다.

작가 김연수씨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무용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렸다”면서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출판산업 또는 마케팅 측면에서의 위기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소설의 판매 부수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소설의 창작 가치나 문학성까지 위협받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문학과지성사 채호기 대표는 “시장에서의 위기가 창작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문학의 역할은 더 첨예해지고 날카로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소설의 판매 부진은 우리나라만의 상황도 아니다.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실제 뉴욕타임스는 서평란을 픽션보다는 논픽션에 주력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독자들이 지식이나 교양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소설보다 한층 재밌다. 정보와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 자체가 박진감 있게 변화한다. 세계의 변화 자체가 허구보다 더 짜릿하기에 굳이 소설을 찾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흡입력 강하고 재미있는 소설은 여전히 많다. 작가들의 글쓰기에도 새로운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는 “좋은 소설이 여전히 문예지 등을 통해서 대량 생산되고 있다”면서 “문제는 독자의 수준이 떨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작가의 역량이 모자란 게 아니라 독자들의 수준이 예전같지 않아 좋은 소설을 찾아 읽지 못하는 게 위기론의 진실이란 얘기다. 실제로 인터넷, 영화 등의 뉴미디어에 익숙해진 10~20대는 소설을 외면한다. 대학의 문예창작학과나 국문학과 학생들도 제대로 된 소설을 찾아 읽지 않는다는 게 교수들의 전언이다.

소설은 모든 문화 콘텐츠의 출발점이다. 소설을 읽지 않으면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자고 얘기하는 것은 코미디다. 기초과학의 토대가 부실한 상황에서 첨단공학을 육성하자고 떠드는 것과 같다. 실제로 ‘해리포터’ 등을 비롯, 외국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은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이렇듯 문화의 중심, 책읽기의 기본이 되는 소설이 왜 점점 더 변방으로 내쫓기고 있는가.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도정일 대표는 “문학이란 인간을 형성시키는 가장 요긴한 절차이지만 교육당국은 이를 망각하고 있다”면서 “중·고등학교에서부터 독서습관이 망가져 독서문화 자체와 새로운 독자층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입시위주의 교육이 문제란 얘기다.

한국소설이 쫓겨난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일본소설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일본소설의 문학적 가치가 우리 소설보다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응백씨는 “지금 언급되고 있는 일본 소설은 쉽고 편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라면서 “이 소설들의 문학적 가치는 우리보다 못하다”고 잘라 말했다. 정과리 교수는 “지금 대중이 손에 들고 있는 일본 소설은 일본의 전통적인 소설이나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 같은 삶의 성찰이 녹아 있는 문학이 결코 아니다”라면서 “감각적 소비를 위한 상품이 인기를 얻고 있을 뿐”이라고 분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로 대표되는 ‘잘 팔리는’ 일본소설에는 자본주의의 소비 패턴이 일상적으로 녹아있다. 대중의 소비적 취향을 만족시켜준다. 그래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무라키미 하루키 이후의 일본 문학을 순문학의 상실로 여기면서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일본소설과 함께 급부상한 것이 ‘판타지’라고 부르는 소설이다. 하지만 문단(文壇)은 이를 철저히 무시한다.(대부분의 판타지 작가들도 순수문학을 동경하지 않는다.) 검유혼의 ‘비뢰도’, 전동조의 ‘묵향’ 등 시리즈 누적 1백만권 가까이 팔린 작품이 많지만 평론가들은 이것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본격문학이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대중의 욕구를 채워줬다는 점을 애써 못본 척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문학의 다양성과 잠재력을 제대로 펼칠 계기를 출판계와 작가가 만들어가는 게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소설가 김연수씨는 “출판계에서는 작가에게 인기있는 외국소설을 예로 들면서 험한 세상에 마음을 달래줄 코엘료 유(類)의 소설쓰기를 강요한다”면서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지 못하고 출판사가 요구하는 소설을 생산해낸다면 이미 소설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글 박재현·사진 정지윤기자〉 경향신문 200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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