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말 나는 지방의 한 도시에서 도서정가제에 대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를 불러준 사람들은 어린이도서연구회 산하 '동화 읽는 어른'의 그 지방 모임이었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우리 아동출판이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축이다. 자식들에게 좋은 책만을 골라 읽히려는 그들의 열의가 좋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와 이를 유통시키는 전문서점의 수를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최근에는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는 쾌거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흐름을 부정적 방향으로 확 꺾은 것은 '할인경쟁'이었다. 대형할인점과 인터넷서점,홈쇼핑 등에서 '대한민국 최저가 할인경쟁'이 날로 도를 더해가자 대부분의 아동전문 소형출판사와 전문서점은 날개가 꺾여버렸다.
우리 아동출판이 한창 활기를 띨 때에 그림책과 창작동화는 각기 시장의 3분의 1 정도를 점유할 정도로 '강자'였다. 당연히 우리 작가들이 펴낸 화제작도 줄을 이었다. 그러나 약 5년간의 본격적인 할인경쟁 결과는 어떤가. 이제 그림책의 실제 유통량 중 95%가 외국서적이 차지하고 있다. 앤서니 브라운,존 버닝햄 등 '검증'된 외국 작가 그림책은 출간될 때마다 늘 상한가를 치지만 국내 작가 신간은 언제나 찬밥 신세다.
앙증맞은 캐릭터,입체와 평면의 독특한 조화,구름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멋진 판타지를 만들어 낸 백희나의 '구름빵'이 평단과 시장에서 동시에 좋은 평가를 얻은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에 속한다. 베스트셀러에 간간이 올라 있는 국내 그림책의 출간일자는 10년이 지난 것이 대부분이다.
창작동화 분야 또한 신진작가의 새 책이 성공적인 시장진입을 하기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것보다 힘들다. 물론 일부 평자는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해를 삼킨 아이들'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나의 아름다운 늪' '은어의 강' '내 사랑 사북' 등 신진작가의 매혹적 작품을 예로 들며 몇 년 안에 또 한번의 전성기를 기대해도 좋을 정도라고 내다본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실제 현실로 등장하려면 하루빨리 완전 도서정가제가 확립돼야 할 것이다. 그 지방도시 강의 후 쏟아진 애로사항은 신문의 북섹션이나 인터넷서점을 통해 신간소식을 접하더라도 직접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책을 직접 넘겨보며 평가하는 감식안을 발휘하려면 무조건 서울의 대형서점에 들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신간은 늘 찬밥 신세일 것이어서 유망작가 출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날 강의와 토론에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출판사와 서점 같은 이해당사자들이 책의 할인율을 놓고 밀고 당기는 행위를 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곤란하며,이제 소비자가 앞장서서 책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살아 숨쉬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부 출판사는 한 권으로도 족할 것을 10권으로 늘리거나 할인을 전제로 정가를 올려왔다. 또 늘 팔리는 책을 추구하다 보니 비슷비슷한 책만을 펴내 시장의 악화만을 불러왔다. 이 같은 현실을 방치한다면 책 읽는 사람의 삶은 늘 팍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 소도시의 일부 시민이 나선다고 '추악'한 현실이 당장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점차 거세질 때 우리 책문화도 분명 바람직한 방향으로 물꼬를 틀 것은 분명할 게다. 그날 모임에서 내가 우리 책문화의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읽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기사게재 : <국민일보> 2006.6.21출처: 한국 출판 마케팅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