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과학'임을 내세우는 어느 침대 전문 업체의 광고 멘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출판기획은 과학(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일종의 격률이 부각된 적이 있었다. '출판기획은 과학'이라는 말은 출판기획이 그 동안 과학이 아니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보통 '감'(感)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뜬다, 뜨지 못한다' 따위를 판별하는 일종의 영안(靈眼) 같은 것.
'출판기획은 과학'이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예상 독자층 분석과 이에 따른 수요 예측, 사회문화적 흐름에 대한 충분한 고려(시의성 문제), 이미 나와 있는 비슷한 성격의 책에 대한 검토, 비슷한 종류의 해외 도서가 현지 도서 시장에서 어느 정도 반응이 있는지 검토, 출간 시기에 대한 고려, 제목의 적절성, 최근의 일반적인 독서 추세, 기타 다양한 사항을 체계적,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일을 뜻한다 하겠다. 요컨대, 도서 시장 내외적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여보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감이란? 감은 결국 앞서 언급한 과학으로서의 출판기획의 최정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요컨대, 출판기획에서 과학과 감을 엄격히 분리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어느 성실한 번역가/출판기획자 한 분은, 어느 출판사 대표에게 나름의 기획안을 말씀드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고마운 충고를 대답으로 들었다고 한다. "좋은 말 할 때 충고하는데, 기획 생각 집어치우고, 좋은 번역자나 될 생각하라." 그런 말씀을 하신 분 생각으로는, 출판기획이란 감각이 살아 있을 때까지의 한 철 장사일 뿐이며, 반면에 제대로 된 번역자가 되면 그것은 평생 장사인 셈이다. 출판계에서 쌓은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전도유망한 출판인의 미래를 걱정해주시는 취지의 말씀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 분의 그런 배려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도로, 기획이란 책 장사꾼의 '감'이고, 그런 것은 아무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획 및 기획자에 대한 그 분의 생각에는 분명 문제가 많다. 좋은 번역자는 꾸준히 노력하면 되지만, 뛰어난 기획자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동물적인 '감'을 타고나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기획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제법 성공적인 기획자로 평가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동물적 '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말하기를 좋아하는 듯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뜬다, 뜨지 못한다'는 판단이라 하겠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역술인들의 점괘에도 가깝고, KBS 대하 역사드라마 왕건에서 궁예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데 사용한다는 관심법에도 가깝다.
앞서 언급했던 출판기획자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렇다. "물론, 출판기획에서 '감'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출판의 색깔을 좌우하는 것일 뿐, 궁극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의 모든 것은 아니다. 책을 만드는 일에는 '감'외에 '궁리(窮理)'가 있어야 한다. '된다, 안된다' 따위의 판단으로서의 '감'보다, '이런 쪽으로, 혹은 저런 쪽으로'라는 방향으로서의 '감'이어야 하고, 거기에 덧붙여 '어떻게 되게 만들고, 어떻게 살릴 것인가'하는 '궁리'로의 작업이 뒤따라야, 책을 온전히 만드는 일의 과정이고 그것이 기획의 궁극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컨대 번역서의 경우, 어떤 책 한 권을 내느냐에 대한 결정으로 모든 것을 거는 기획(?)에는 문제가 있다. 관건은 어떻게 책에 더 많은 생명력을 부여할 것인가, 제아무리 잘나지 못하고 그냥 천덕꾸러기 신세일 것 같은 한 권의 번역 원고일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운동하는 생명이고, 그 운동성의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에 따라 생명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운동성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것이 기획의 참된 자리이고, 그러므로 기획에는 '감'과 '궁리'라는 양날개가 필요하다."
이상과 같은 말씀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물적 감도 지난한 궁리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면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감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지리산에서 수십년 도를 닦고...."를 외치는 떠돌이 약장수의 거짓 내공과 비슷할 것이다. 출판기획에서 관심법 따위는 없다.
발췌- http://www.kungr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