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중앙박물관 새 도록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약 70만 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한국인의 에센스가 들어있다. 28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에 맞춰 발간되는 박물관 종합 도록(圖錄)이다. 총넓이 4만6000평, 세계 여섯 번째로 큰 박물관에 덤으로 끼워넣은 구색 맞추기가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처럼 완전한 밭갈이를 했다. 그 안에 담긴 한국문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여행을 떠난다.
싹 달라진 내용과 편집
시쳇말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꿨다. 2000년 도록과 새 도록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내용과 형식 모두 달라졌다. 텍스트와 함께 사진.편집도 100% 뒤집었다. 물론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록다워졌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짚어보는 교과서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다.
조선 중기 화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보자. 가로 8m가 넘는 대작이다. 2000년 도록에는 그림의 일부가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로 실려 있다. 가을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농사 짓는 모습, 도르래로 짐을 올리는 장면 등 당대 생활상을 일일이 옮겨놓은 원작의 파노라마를 느끼기 어렵다. 이번에는 전체 그림을 3등분하고, 이를 두 쪽 분량으로 펼쳐 한 장 안에 접어놓았다(사진). 조선시대 산수화의 활달한 기운을 살려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뿐만 아니다. 도록에는 비슷한 형식의 대형 사진이 여섯 개 실려 있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홀본산성(오녀산성), 신라의 뛰어난 금속공예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의 고분군 등등. '기와올리기''씨름''대장간''서당' 등 정감 넘치는 김홍도의 풍속화 25편도 세 쪽 분량에 모아놓았다. 우리 문화에 대한 당당한 자신감이다. 2단 편집의 깔끔한 지면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유물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단아한 정취를 뿜어낸다. 전체 사진 600여 컷 가운데 250여 컷을 새로 찍었다.
책임편집을 맡은 임우기(솔출판사 대표)씨는 "종이.인쇄.편집.제본 등 국내 출판계의 역량을 집약했다"고 말했다. 중앙박물관 도록은 곧 우리 문화를 상징하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중앙박물관 신광섭 역사부장도 "장정.사진.글 등 문화 생활의 기본서가 되도록 욕심을 냈다"고 밝혔다.
한자 이름을 쉬운 한글로
종이묶음인 책은 말을 못한다. 하지만 활자와 사진은 말을 걸어온다. 문화재의 가치가 시기에 따라 재해석되듯 도록 또한 시대에 따라 '방점'이 달라진다. 새 도록은 내용상 크게 두 가지가 변화했다. 첫째, 한자 위주의 작품명을 되도록 한글로 풀어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중국.북한의 자료를 덧붙여 고구려의 비중을 늘렸다.
예컨대 '강산무진도'는 '끝없는 강산'으로 표현했다. 15세기 중엽 활동했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물을 바라보는 선비'로, 은은한 비취색이 일품인 '청자과형병'은 '청자참외모양병'으로 풀어썼다. 전문가와 관객의 거리를 좁힌 셈이다.
특히 백제.신라 등에서 도깨비 얼굴을 새겨 사용했던 기와를 가리키는 '귀면와'(도깨비기와)는 이번에 '용면와'(용얼굴무늬기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용면와'는 이화여대 강우방 초빙교수가 처음 제기했던 용어로, 귀신 형상이 뚜렷한 일본 기와와 달리 한국의 기와에는 용 모양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용의 형태가 모호한 유물에는 '짐승얼굴무늬기와'를 붙였다. 임우기씨는 "우리 미술계가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 식민지 미술사관을 극복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또한 중국에 직접 가서 고구려 문화의 진수인 각종 산성의 사진을 새로 찍어 시원하게 편집했다. 한국미의 절정으로 자주 꼽히는 신라의 '반가사유상', 조선시대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함께 고구려 강서중묘의 '사신도'를 도록 표지에 앞당겨 배치한 것도 고구려의 기상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다.
작품을 담는 '작품'
박물관 도록은 국내 출판계의 사각지대였다. 돈과 품은 많이 들지만 시장에선 '찬밥'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도록을 자체 제작했던 중앙박물관 측이 일반 출판사를 상대로 처음 공모를 했다. 별도의 심사위원회를 꾸려 각 출판사의 편집.기획력을 평가했다. 시장경제의 경쟁원리를 도입, 제작의 전문성을 높인 것이다.
낙점은 솔출판사에 떨어졌다. 솔출판사는 '한국 미의 재발견'시리즈(전14권),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등을 내며 우리 문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이번에도 제작비 3억원을 직접 들여 지난 6개월간 공을 들였다. 임우기씨는 "소수의 박물관 관계자들이 만들었던 기존의 도록은 독자들의 높아진 안목을 따라가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돈 문제를 떠나 민족문화의 꽃인 중앙박물관 유물을 제대로 보여주고, 나아가 문화적 자부심을 키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작은 의욕만큼 쉽지 않았다. 예컨대 회화의 경우 원작의 색상과 농담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컴퓨터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고, 청자나 백자의 정취를 재연하기 위해 배경색 하나를 고르는 데도 수정에 수정을 가했다. 임씨는 "21세기 문화시대를 열어가려면 무엇보다 전통에 대한 자신감이 중요하다"며 "중앙박물관이란 이름값을 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일례로 2000년판에는 도록의 '생기초'인 색인이 생략됐으나 이번 도록에는 11쪽 가량의 상세한 찾아보기가 실려 있다.
새 용산박물관은 PDA.MP3.내비게이터 등 첨단 디지털 시스템을 완비했다. 하지만 관람의 감흥은 아날로그 도록과 함께 깊게 남을 것. 한국문화의 재도약으로 연결되길 바랄 뿐이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중앙일보 2005-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