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윤영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구입해서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바로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같이 공감하면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남보다 더 힘든 맏며느리 혹은 큰 며느리로 불리는 내 어머니도 이 책을 공감할 것이며 나 또한 장남인 아버지를 늘 지켜보면서 이 책을 읽으며 뭔가 동조를 하며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먼저 읽은 어머니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혹했다. 이 정도 가지고 장남으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실망이셨던 것 같다.

어머니가 읽은 후 내가 이 책을 손에 잡았다. 전반부는 기자출신인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장남으로 살아온 과정이 세세하게 추억을 더듬으며 진행이 되며, 후반부에는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고,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장남이라는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드리고 장남으로서 행동지침 같은, 한마디로 장남으로 살아가는 노하우를 말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먼저 읽은 어머니의 반응이 왜 그렇게 시큰둥 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책의 지은이는 집안에서 부모님으로부터 장남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장남인 자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급기야 시골의 집과 선생님이라는 보기좋고 안정된 직장을 등지고 도시로 와서 트럭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자식을 교육시키는 모습이라던가,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가 허름한 트럭 운전사가 되어 우연히 학교 제자를 만나면서의 어색한 만남은 눈을 찡긋하게 만드는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모든것이 부담스러웠고 장남으로서 해야 할 것들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힘들었음을 얘기한다. 본인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아버지가 장남인 아들이 집안에서 큰 기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삼고초려를 하면서 신경을 썼던 모습들이 무모해 보이기도 하지만, 세삼 위대하고 존경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낳기만 한다고 부모 노릇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집 얘기를 해야겠다. 아버지는 5남 2녀 중 장남이다. 연세 많으신 먼 친척분들에 의하면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즉, 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 젋음 시절부터 뚜렷한 직업도 없었고 열심히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매달 받는 월급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때 쯤 분가를 할 때 까지 고스란히 할머니께 같다 드리고 아래 쭉 늘어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했단다. 어머니는 지금 생각하면 '왜 내가 그렇게 보잘 것 없었던 네 아버지한테 시집을 왔는지" 참 어리숙했지.."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은 먼저 시작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보금자리인 내집을 마련한 것도 가장 늦었고, 직장 때문에 분가를 하면서도 한동안 가장 많은 생활비를 늘 붙여 드려야 했으며, 가장 못 배우고 가장 작은 체격, 현재까지도 형제들 중 유일하게 자가용이 없어 먼 시골 제사를 갈때면 동생 차를 얻어타거나 고속버스를 몇 차례나 갈아타고 다니시는게 지금 내 아버지의 서글픈 모습이다.

둘째 동생 집안 사정이 어려울때 갯돈을 털어서 보태주고, 셋째 동생 장가갈때 우리 어머니 적금 통장 깨서 결혼비용 마련해주고..... 가장 형편이 어렵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동생들이 손 벌리면 조금이라도 보태주고, 쥐뿔도 없는 집안 문중에 무슨 대소사가 그리도 많은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이런 저런 자리에 모두 참석을 해야 하고...그나마도 한번 잊어버리면 이곳 저곳 높은 친척분들이 전화해서 장남인데 그러면 되냐고 하고...그렇다고 누구 하나 진심으로 고맙다는 사람은 없다.... 형제간에 그렇게 돈독한 우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저마다 그 시절은 까마득이 잊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나는 부러운 것이다.

저자는 그래도 장남 노롯 잘 하라고 뒤에서 지지해주고 믿어준 든든한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는가....나는 이 책이 찬반양론이 갈린 책인지 몰랐는데 여러 사이트에서 서평도 읽어보고 지난해 KBS의 < TV 책을 말하다 > 에서 어떤 여성분이 정말 돈이 너무 아까웠던 불쾌한 책이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고 다소 놀라웠다. 이 책을 보고 동조하기가 어려웠다. 혹은 장남한테만 무슨 그런 예우가 필요하냐.. 혹은 요즘은 시대가 다르다. 혹은 장남이라고 해서 뭐가 그렇게 혼자 잘해야 하는냐...라고 불만이신 분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집안 내력이나 환경이 다소 보수적이고 문중 법도를 따르는 등 비 개방적 가족구조에서 자라신 분들, 혹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오신 분들, 혹은 장남으로 힘들게 살아온 분들, 혹은 그 주변 분들, 장남인 아버지를 둔 나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도 아버지, 어머니는 왜 그렇게 사세요...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장남이라고 해서 왜 그렇게 더 희생을 해야 하냐고... 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자주 드렸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그게 안되는 모양이다. 그게 바로 장남의 위치가 아닐까...그게 바로 장남이 운명이 아닐까...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같은 장남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 혹은 장남이지만 장남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 독자분들에게는 다소 도움이 될 것이지만 장남이나 차남이나 무슨 차이냐? 혹은 장남만 무슨 집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혜택을 받는 것은 불공평 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권해 드리고 싶지 않다. 또한 핵가족화로 장남이라는 위상의 표현이 모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묻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감사해야 할 분이 있다. 장남보다 몇 배나 더 힘들게 살아온 분, 그건 바로 맏며느리 혹은 큰 며느리로 불리는...우리 어머니를 비롯한 장남의 아내들이다. 명절이 되면 가장 힘든게 맏며느리다. 우리 어머니는 늘 명절때가 되시면 시계가 정시를 가르치듯이 입술끝이 불룩하게 부어서 고름이 생기고 나중에는 터진다. 병원에 같더니 명절증후군이란다....신경성. 이게 바로 큰 며느리의, 어머니의 안스러움이다. 혹시 이 서평을 읽는 20~30대 주부(장남이 아닌 남편을 둔...)분들,  설, 추석 음식 장만 할 때 음식 다 만들고 나서 나타나지 말고 조금 일찍 와서 큰 며느리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

이 책 자체에서 내가 원했던 책읽기의 즐거움이나 만족스러운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진정한, 믿어 의심하지 않는 장남정신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수고로움에 존경을 표하고 싶고, 장남이 아닌 이유로 미쳐 그런 부분은 잘 몰랐다는 분들로 이 책으로 다소 공감을 하고 장남 형님들에게 좀 더 잘 대해주시길 바란다. 더불어 좋은 부모님을 두셨던 이 책의 저자인 윤영무님도 앞으로도 계속 장남으로서 대한민국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인용: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에 트럭을 세워두었던 운전사 한 명이 성큼성큼 아버지에게 다가와 모자를 벗으며 반색을 했다.  "저 아무개 선생님 아니십니까?....!"

순간 아버지는 당황했다......중략....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갛게 물드는 것을. 온몸이 떨리면서  말을 더듬는 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당황해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점잖은 교편을 잡던 시골 마을의 유유자적한 선비가 아니었다. 10여 년 만에 만난 제자 앞에서 아버지는 ' 그림자도 밝지 못했던' 과거의 그 말쑥한 양복차림의 선생님이 아니라 허름한 작업복에 털털거리는 트럭을 운전하는 일용직 화물 노동자였던 것이다.

--------p. 37~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