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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이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험버트란 소아성애자가 궁리에 몰린 어린 소녀를 1년 넘게 데리고 다니며 아이 영혼에 상처를 주고, 훗날 소녀가 좋아했던 남자를 질투에 눈이 멀어 살해한다는, 매우 불쾌한 내용입니다.
소아성애자가 좋아하는 소녀는 '님펫'으로 불리는데, 님펫이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 중에서 마성을 보이는,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과 야릇한 기품을 갖고 있는, 선택된 소녀라 합니다.
님펫에 매력당하는 남자와 소녀와의 나이 차이는 필수인데, 일반적으로 30~40년 나야 한다는군요.
불쾌한 설정이지만, 마성을 지닌 어린 소녀....라, 뭔가 있을 것 같고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말대로 '불쾌하다'라는 말이 '독특하다'란 뜻일지도 몰라 읽어보게 됐습니다.
소설의 줄거리(소아성애자의 님펫에 대한 사랑...이란.....)에 비해 쓸데없이(?) 두꺼운 500쪽을 읽어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완독했는데요, 그만한 매력이 있었어요.
우선, 문장이 괜찮습니다.
'심장 대신 푸르스름한 얼음 한 덩어리를 품고' 와 같은 문장이나 등장인물이 계단 내려오는 것을 '샌들, 밤색 슬랙스, 노란색 실크 블라우스, 각진 얼굴의 순서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라 표현한다든지...하는 것들이 좋았어요.
또한 문장이 한 편의 시처럼 읽힙니다. '따다다다 따따, 또르르 똑똑' 하는 리듬감이 귀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그리고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너스레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신화 속 인물이 은유의 제물이 되는 건 당연하고, 언어의 어감이나 발음, 뜻을 뒤틀려 사용하는 게 200쪽은 되지 않을까.....(과장입니다~) 생각이 들더군요.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프로이트를 활용한 우스갯 소리였어요.
'그는 빈의 도움을 빌려 거시기가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다가'란 표현은 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프로이트가 거세불안 언급한 것을 놀리기 위한 것이고, '지그문트 2세 전하께서'란 표현도 그를 조롱하기 위해 쓴 표현입니다.
작가가 유난히 프로이트를 조롱한 것은 문학에 대한 생각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작가는 상징과 비유를 싫어합니다.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는군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이 책의 작가죠)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 예술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답니다. 어떤 국가나 사회계층 또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며, 작품은 집을 감싸는 안개 낀 여름날이나 안개 너머에 빛나고 있을 태양처럼 즐거움을 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힘써 말합니다.
시처럼 음율감 가득한 문장과 비호감 내용에도 불구 끝까지 읽게 하는 <롤리타>를 읽고 나니 얼떨결에 작가 생각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다소 유쾌하지 않은 소설의 내용에도 불구 독자로 하여금 읽게 하는 힘은 작가가 말한 심미적 희열 덕이며, 그것이 없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거 같아요.
아름다운 언어의 행렬은 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며, 언어의 잔치를 관통하는 여운이면 족하지 않을까(그런 내용에도 불구).....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작품의 여운이 가시니...생각이 달라지더군요.
이 책의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출신입니다.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으나,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1919년에 서유럽으로 망명했어요. 그 후 20년간 독일.프랑스 등지에 살면서 러시아어와 영어로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다 1945년에 미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탓에 작가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한없이 다루기 편한 러시아어를 포기하고 내게는 두번째 언어에 불과한 영어로 갈아타야 했'답니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닌 제2의 언어로 문학작품을 쓰면 여러가지 제약이 많았을 거에요.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속속들이 친근한 어감이 아니다보니, 함축적인 연상이나 효율적인 도구가 아니라 느꼈을 겁니다.
작가의 이력이 이렇다보니, 님펫을 어린 소녀가 아닌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린 10대란 나이에 많은 유산을 받았으나, 혁명으로 모든 걸 잃어버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웬지 '잃어버린 시간'이 느껴집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 작가는 발끈하겠죠. '나는 비유와 은유를 싫어하고, 소설은 심미적 희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듯 하네요.
그의 말대로 소설이 심미적 희열의 결정체지만, 문학작품은 국가, 사회, 시대, 작가와 동떨어질 수 없다 생각합니다. 이 말은 문학이 시대와 사회를 논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문학에는 그 작품을 써야 했던, 혹은 썼던 작가의 개인적인 처지와 시대 사회적 상황이 투영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즉, 심미적 희열을 추구하는 작가의 성향에는 그(시대를 포함한)만의 고유 이력이 있을거 같아요.
참, 그런데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둔 작가가 제 몸같지 않은 영어로 작품을 쓰고, 저는 김진준이란 분이 번역한 것으로 이 작품을 만났습니다. 작가가 러시아어로 쓴 다른 작품도, 이 책의 영어 원작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시적인 산문, 산문같은 시'를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김진준 씨는 20년 동안 번역가로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숙제라 했는데요, 모든 문장이 가진 고유의 진폭을 원작대로 살려준(충분히 그런 것 같아요) 역자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읽은 날 2013. 11. 21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