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방인, 알베르 카뮈>

 

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고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지우는 것은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때를 떠

올리면 <폭풍의 언덕> <주홍글씨> <변신> 카프카, 이렇게 4개이 작품과 작가가 순서대로 떠오

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폭풍의 언덕>과 어느 청년의 자살이다.

<폭풍의 언덕>은 황량한 들판, 폭풍이 몰아치는 외딴 저택에서 괴물같지만 그게 은근한 매력이

었던 히스클리프가 떠오르고,  어느 청년의 자살은 단지 햇빛이 너무 뜨거워 자살한 것인데,  작

와 작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과 기록도 희미한 그 시절 독서는, 쨍하게 맑디 맑은 푸르른 하늘을 보며  '아, 죽고 싶다'고

나지막이 외치게 하는 겉멋이었다. 책을 통해 사색하고 성장하기보다 소설 속 분위기에 혼자 취

하곤 했으니.

 

최근, 무시해도 좋을만한 작은 필요에 의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보게 됐다. <이방인>

이 바로 그 '단지 햇빛이 너무 뜨거워 자살한' 청년인듯 하다. 내 기억은 햇살이 뜨거운 해변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겨누어 자살한 청년인데,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느 해변, 햇빛의 칼날이 너무

고통스러워 권총으로 누군가를 죽인 청년이다.

수많은 책 중 하필 이 책을 다시 보게 됐을까.

별,일 아닌 작은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뫼르소, 어느 날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듣는다. 찾아간 어머니의 장

례식, 한 문장, 한 단락씩 그가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고 조문객 질문에 굳이 대답한다.

슬퍼 하거나 울지도 않는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 옻 냄새, 향 냄새, 자지 못한

하룻밤의 피로에 지쳐, 이제는 드러누워 실컷 잠을 잘 수 있겠다며 작은 기쁨을 느낀다.

 

'어머니 장례식을 끝났고 내일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뫼르소가 연

인과 검사의 질문에 대답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그녀가 응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으나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조금

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사실을 이러하지만 의미가 없는 것 투성이다.  그 날 역시 마찬가지다.  이마 위

태양이 심벌즈 소리를 내고, 번쩍이는 단도로부터 튕겨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이 그의 속눈썹을

고통스럽게 했기에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언젠가 책에서 읽

은 적이 있었던, 모두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이다.

 

도대체 뫼르소에게 주요한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사형을 선고받은 재판장에서조차 "나는 나의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발대발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웠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나로서는 참말로 무엇을 후회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되뇌는 뫼

소, 그는 왜 이렇단 말인가.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를 구하지도 않는 그의 말과 행동은 시종일관 계속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야 드러난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에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 올라와,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그가 이해됐다.

항상 미래의 구렁에서 어두운 바람이 현재로 불어온다. 지금이나 미래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

게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일들은 결국 아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다한들 저

렇다한들 어떠하리. 미래는 지금처럼 어두운 바람이 가득할테니.

뫼르소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미래가 바뀌지 않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 모두 의미가 없다고 했으나 뫼르소는 죽음 가까이에 이르

러서야 깨닫는다.

자신의 어머니가 생명이 꺼져 가는 양로원에서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이를 했는지를 말이다.

어머니처럼, 그도 어쩌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것도.

그는 다시 살기 위해 세상의 무관심을 원한다. 증오의 함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다정한 세상의 무관심 속에 온전히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최고의 카타르시스 폭발이다.

 

분명 과거 십대의 내게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다. 뫼르소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푸른 하늘을 보며

죽고싶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이 어떻게 청소년 권장도서였을까.

더군다나 학교 권장도서 목록이 아니었다면 정보를 구할 곳이 여의치 않던 그 시절이니 더욱 그

러하다.

 

인터넷에서 지금의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찾아봤다.

다행히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목록에 <이방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각자마다 이해의 폭이 다르고, 지금의 청소년은 과거와 다르겠지만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이 신중

하면 좋을거 같다.

 

다시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마, 지금처럼 최고의 카타르시스 작품으로 기억하겠지.

 

다시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을 또 읽는다면 감상은 어떻게 될까.

그대로일까? 변할까.

변한다면 어떻게....?

 

 

다시 읽은 날  2012. 7. 20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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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팬클럽 홍대지부 - 젊음을 위한 열혈 공자 탐색
명로진 지음 / 푸른지식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공자팬클럽 홍대지부, 명로진>

 

일찍이 송나라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논어>를 읽지 않았을 때도 그저 그런 사람이요, 읽은 후에도 그저 그런 사람이면 곧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이 책의 저자 명로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은 <논어>를 읽고 나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한다.

어떤 사람은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읽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손발을 흔들며 춤추고 기뻐한다."

 

이 책의 저자, 명로진은 <논어>를 읽고 자기도 모르게 손발 흔들며 춤추고 기뻤나 보다. 그리

하여 탄생한 책, <공자 팬클럽 홍대지부>이다.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는 우리나라에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조선시대까지 많이

읽혔다. 어쩌면 공자가 직접 지은 <춘추>보다 더 유명할텐데, 공자와 유교에 대한 해석을  두

고  오랜시간 많은 유학자가 매달린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때로는 원본보다 주석을 더

숭배하도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논어>는 시대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힌다.

이 책 <공자 팬클럽 홍대지부>에는 명로진에게 읽혀진 공자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 명로진, 그는 연예인이다. 연예인의 책을 잘 읽지 않지만 우연히 이웃블로그에서

이 책을 보고 '언젠가 읽어보리라' 다짐만 하던 <논어>와 관련이 있어 읽게 됐다.

또한, 그는 '인디라이터'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Independent writer의 준말인 인디라

이터로써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저자라는 의미라 한다.

 

그가 자신을 말한다.

 

"화려한 연예계를 버리고 사양 산업(?)인 출판계로 들어선 내가 여전히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는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후진 기어는 없다고.

'지금까지 하던 일이 잘 안되는데 장사나 해볼까?'

'지금까지 만났던 인간들 다 시시한데 새 인맥을 구축해볼까?'

'지금까지 살아온 마누라 지긋지긋한데 새 여자나 만나볼까?'

인생을 좀 되돌아보면서 중심을 잡으라고,

다른 사람 유혹할 생각 말고, 유혹당하지도 말라고."

 

그의 나이 1966년생, 인생 사십대에 들어선 이라면 한번쯤 공감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리를

잡은 이는 잡은 대로, 아직 불안한 이는 불안한 대로 공감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그가 바라본

공자는 어떠했을까.

 

'공자는 루저다.

공자는 유머 넘치는 사람이다.

공자는 욕쟁이다.

공자는 음악의 대가이다.

공자는 술고래에 패셔니스타이다."

 

이 중에서 그가 바라본 공자는 '인과 예라는 카드를 들었으나 여기저기 배척당하고 쫓겨나 굶

어 죽을뻔하고 벼슬에 오르지 못했으나, 오랜 세대를 거쳐 존경 받은 사람'인가 보다.

진실과 다르다 할 수 없으나, 그가 바라본 공자 모습에 명로진이 투영된다.

음악의 대가, 패셔니스타라는 단어에 연예인인 그가 보이고, 루저에는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버린' 그가 보이니 말이다.

<논어>를 읽고  손발 흔들어 춤추며  '여기 홍대에 공자 팬클럽 대대모집해요~~'라고 신나게

외치는 그가 말이다.

 

나는 과연 <논어>를 읽고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

그냥 그렇다고 느낄까.

인생을 깨우치게 될까.

어쩌면 <논어>를 읽는 그 순간의 내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만고의 고전 <논어>.

명로진은 이렇게 깨우쳤다 한다. 인생의 비밀, 선사후득 先事後得

 

"번지가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덕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참 좋은 질문이구나!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 이것이 덕을 높이는 것

아니겠느냐?'

이게 <논어>를 읽고 나서 내가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후득이라고 했지, 무득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남을 위해 좋은 일 해주고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 좋은 일만 하고 떡고물도 챙기지 못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고, 일을 잘한 다음에는 반드시 대가를 받아내라...' 이런 뜻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만약 공자께서 나 같은 제자를 뒀다면 뭐라고 하셨을까나?"

 

나는 과연 <논어>를 읽고 무엇을 얻게 될까.

만약 나 같은 제자를 뒀다면 공자는 뭐라고 하셨을까.

아, 그러고보니 공자 앞에서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군...

 

 

읽은 날   2012. 1.18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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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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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반대개념인 수많은 조합들을 가르는 차이

는 종이 한장일지 모른다.

너무 얇아 무시되곤 하는 작은 것들이 종내에는 거대한 차이를 빚어낸다.

이 책 <즐거운 나의 집>은 은밀한 자기 고백과 문학으로의 승화, 그 미세한 차이가 어떻게 감동

을 자아내는지를 볼 수 있다.

 

공지영작가는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성이 각각 다른 세 명의

자녀가 있다.

평범하지 않은 그녀에게, 평범하지 않은 가족 얘기가 가득할 것이다.

 

그녀의 딸 위녕, 이 책에 등장하는 18살짜리 주인공이다. 위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공지영 작가의 가족얘기다. 위녕은 새로운 가족(생모의 외가 식구들과 형제)를 만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고양이 코코와 동생의 생부 죽음을 맞기도 한다. 엄마의 새 남자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또래 친구를 통해 평범해 보이는 가족에 대한 환상을 깨기도 한다.

 

분명, 동생의 생부 죽음을 보는 일이나, 자신의 생부와 계모를 만나러 가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

이다.  그 속에서 가족 각각이 겪었을 자신의 정체성 혼란이나 가족의 의미, 과연 평범한 우리가

짐작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이혼, 그로 말미암아 파급되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은 경우의 수와 태어난

성품에 따라 각각 다른 무늬를 그려낼 것이다.   때로는 쉽게 지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지워지기

힘들게 말이다.

그래도 그들 역시 같이 밥 먹고, 가끔 외식하고, 같이 TV보고,  가끔 싸우고, 더러 지긋지긋해하

다가 또 화해하고, 그렇게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쌓아간다.

밖에서 힘들고 지치더라도, 돌아오면 편안하고 휴식이 되는 우리네 일상사처럼 그들 역시 그러

하다.

 

세 번의 결혼, 세 번의 이혼 속에 자랐다 해서, "다른 애들이 부러워요. 날마다 집에서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아아, 나는 저 아이와 성이 같아! 그래서 너무 행복해! 어떻게 하면 좋지, 이 행복을!"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져 보여도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

한 가족이다. 왜냐하면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다. 내 소설과 내 마음이 모두 사랑이기를 바라고 살면 설사 실수

투성이 삶일지라도 소중해진다. 그 소중한 마음들이 모이는 곳이 우리 집, '즐거운 나의 집'이다."

 

그녀의 개인사는 결코 내세울만한 이력이 아닐 것이다. 개인사가 은밀한 고백으로 그칠지, 문학

으로 승화되어 독자에게 전해질지 그것은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린 일인데, 그녀는 이 작업을 매

우 훌륭하게 수행했다.

 

처음에는 그녀 개인사를 보는 호기심과 은밀함에 빠져 읽었지만, 읽을수록 개인 공지영과 위녕은

사라지고 아웅다웅 가족의 일상사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족의 의미를 훌륭히 찾아가는 우리

이웃의 가족 이야기로 읽혀졌다.

평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평범한 우리네 가족 이야기였던 것이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보여지는 고백과 문학의 차이, 그 위대함이 이 책에 있다.

 

음...부족한 이 느낌은 뭐지?

음...이 책 너무 재미있는데, 표현에 서툰 이 필력을 어떻게 한담?

 

 

읽은 날   2008. 9. 5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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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 배국원, 유지황 옮김 / 동연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신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이 책 제목을 보고 걱정했다. 이 책 <신의 역사>를 읽어야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나는 세상 지식나무 가지에 달린 열매를 종류별로 가득 담고 싶어하는 채집가인데, 열매가 매달

려 있는 가지, 줄기, 뿌리까지  탐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골치 아픈 건 질색해

하는데, 탐스러운 열매에 대한 호기심이 간혹 이를 넘어서게 할 때가 있다.

 

유달승의 <중동은 불타고 있다>를 읽은 후  시온주의 주장의 근거와 서구가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의 기원이 궁금해졌다.

근원적인 대답은 근원이 대답해줄 터, '골치 아파도 어쩔 수 없군' 하는 자포자기 마음으로 이 책

을 읽어나갔다.

 

이 책은 명제로 정리된 종교적 '신념'과   그 명제들을 신뢰하게 만드는 '신앙'과는 구분되어야 한

다며 선을 긋고 시작한다. 시대와 변화를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표현 불가능한 신의 실재 그 자체

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인류가 아브라함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

가에 대한 내용을 알려준다. 즉, 기원전 4천년전 문명의 발상지였던 유프테라스강 유역을 중심으

로 한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의 역사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 어렸을 때 가끔 가졌던 신에 대한 의문이 유치원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음을 세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어릴 때 친구 손 잡고 다녔던 교회, 그 수준 말이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도록 종교가 유치원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건 종교와 생활과의 간격이 멀

어졌기 때문이다. 갈수록 우리의 대다수는 더 이상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에 둘러쌓여 살아가

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발달된 과학과 소비시대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물질적, 육

체적 세계에만 관심의 촛점을 맞추라 한다.

내 수준이 이렇다보니, 이 책에서 알려주는 내용, 구절은 모두 몰랐던 내용이다.

 

가령,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한 뿌리라는 점, 기축시대 여러 사상들은 서로에게 영향

을 주고 받으며 생성, 발전되었는데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 그러했고, 종교를 둘러싼 쉼

없는 논의와 대립이 그러했다.

인간과 교류하지 않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신과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의 이야기, 반인격신과 인격

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쓴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17살 때,  옥스퍼드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7년 동안

수녀가 되기 위해 엄격한 수도회의 규칙과 수련을 견디기도 했다. 비록 25세 경에 수녀원을 완전

히 떠나긴 했지만,  살만 루슈디와 함께 마호메트에 관한 전기를 펴내기도 한 그녀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편견 없는 자세가 으뜸이다.

 

그녀가 전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관념의 역사를 보자.

 

초기 종교적 신앙은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필수적이면서 자연적

으로 시작됐다.

태초에 신들은  거룩한 무형질의 질퍽질퍽한 황무지로부터 둘씩 출현했으며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은 애초에 없었다. 그리고 신의 실체에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했다.

 

'성서'에 보면, 유일신 종교의 시작은 기원전 20~19세기, 가나안에 정착했던 아브라함에서 연유

됐는데, 초기 인간과 친근했던 신과 달리 야웨는 이스라엘인에게 자신의 특별한 백성이 되어 특별

한 효율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음을 약속했다.  신과 인간의 계약이 시작됐고  신과 인간의 간극

이 벌어졌다.

 

그 후 기축시대의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야웨는 '유일한' 신으로 등극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새로

운 세계관 출현 속에서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을 견디고 최초의 유일신, 유대교로 탄생한 것이다.

유대교 탄생에서 보여지는 키워드는 다른 신들에 대한 적개심과 기존 사고방식과의 단절이다.

선지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태도 즉, 다른 신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스라엘인에게 중동

의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당시 주류적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유일신 종교 이전, 고대 다신교가 가진 관용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리잡았건만, 그 후 다신교를 배

척했다니, 현재 기독교 모습이 세삼스럽다. 그들이 말하는 '우상 숭배'의 들키고 싶지 않은 한면을

본 거 같다.

반면, '주류적 흐름과 다른 방향'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념, 철학으로서의 순기능으로 읽을 수 있

겠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졌다. 초기 기독교인은 예수를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여호

수아,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시자로 받아들였다.  붓다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그 시대 많은 사람의

가장 깊은 열망을 포착했고,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꿈꾸었던 것을 실체화했던 것 같다.

예수가 죽은 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신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분명히 예수는 자신을 신이

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기원전 6세기 붓다의 죽음은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쳐 4세기 경 '원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됐고,

예수 안에 신이 성육했다는 삼위일체론이 만들어졌다.  성육신론은 언제나 유대인에게 경악스러

운 일이었다. 보수적인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조상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한 불경건의 극악한 죄를

범한 광신자의 종교로 비쳐졌다.

 

기독교는 성육신을 믿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배타적 개념을 지켜 왔다.  그러던 중 7세기경 새

로운 신 계시를 주장하고  경전을 만든 아랍인 예언자의 등장에  유대인처럼 경악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이 성육신한 유일한 구원자임을 주장하는 기독교 세력이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랍 예언자에 의해 창시된 유일신교 '이슬람'은 놀라운 속도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

역으로 확산되었다.

신의 언어라 일컬어지는 경전, 꾸란 the qur'an(낭송)과  무함마드의 힘은 유대인이 다신교적 고

대 신앙과의 단절을 위해 700여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을 단지 23년 만에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인을 신의 계시를 받지 못한 야만인이라고 조롱했는데,

그런 그들이 단기안에 이룩한 놀라운 업적에 대한 경외감, 두려움, 아마도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

지는 게 아닐까 싶다.

야만인이라 여겼던 이한테 받은 굴욕감과 두려움이 두고두고 그 원흉이 된 것이리라.

 

이슬람교는 경제적인 성공 속에서 공동체 이기주의와 탐욕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을 중시

하는데서 시작했다. 어느 종교보다 정치적인 탄생이며, 그러한 경향은 지금까지 어이지고 있다.

 

9세기,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종교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종교에 덧붙여

있는 원시적이고 편협한 요소를 제거하여 종교를 정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은 알라의 존재를 자

명한 것으로 믿었으며, 알라의 존재가 합리주의 철학 이념과 양립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일 동자'의 존재 증명을 수용해 세계 모든 존재는 발생 원인이 있으며, 그 발

생의 근원인 부동의 동자가 영원불멸의 완전한 존재 자체라 했고,

 

플라톤은,  세계는 신성한 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정화하는 것에

의해 신성한 것에 참여하고, 일자 一者에게 돌아갈 수 있다며 유출의 논리에 집착했다.

 

이븐시나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신 이해와 <꾸란>의 계시적 신 이해 사이의 절충이 시

도되기도 했지만 결국,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철학적 신 이해는 신비주의적 종교

경험의 신 이해로 급격히 대체되었다.

알 가잘리가 말한   "종교 경험만이 인간의 이성과 지적 능력을 초월해 존재하는 신을 입증할 수

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다."로.

 

또는, 신이 '존재'한다기보다는 '비존재'하며, '현명하기'보다는 '무지하지 않다'는 식으로.

또는, 신은 '무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카렌 암스트롱이 전하는 책 한권으로 오랜 세월 인간이 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모든 흐름을 파

악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제법 굵직 굵직한 줄기를 볼 수 있다.

거대한 흐름을 관장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아마도 이 문구가 아닐까.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

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캐워 주었을 것이다.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실재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불가지론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파이이야기>의 얀 마텔이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라고 했을 때, 뜨끔했다.

내가 불가지론자인가. 아닌가. 얀 마텔에게 참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데.

 

나는 어쩌면 불가지론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카렌 암스트롱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휴머니즘은 그 자체로서 신 없는 종교인 셈이다. - 물론 모든 종교가 유신론적인 것은 아니다.

현대의 윤리적이며 세속적인 이상은 지성과 감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어서

보다 전통적인 종교들이 한때 가르쳐 주었던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관한 믿음을 찾는 방법을

현대인에게 보여 주고 있다."

 

 

휴머니즘,인문주의,인본주의 그 위대한 시작인 르네상스

 

읽은 날  2012. 3. 19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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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학원비! - 대한민국 최초로 밝힌 사교육 진실 10가지. 그리고 명쾌한 해법!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엮음 / 비아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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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학원비,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선행 '현재 과정 착실히'는 자녀 학습방향의 커다란 두 개의 축이다.

두 개의 축은 부모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에 의거해 서로 자기가 옳다 주장을 하는데, 한번 주장

되어진 의견은 비슷한 이유거리를 찾아다니며 점점 강화되어간다.

내 의견은 아이가 감내하기 어려운 사교육을 지양하자는 것인데, 이 또한 주기적으로 비슷한 책

을 찾아 읽으며 의견을 강화시킨다.

그래도 가끔 불안이 생긴다.

이러다 정말, 내가 틀린거면 어떻게 할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데.

 

주위에서 들어온 학원신뢰 이야기는 이렇다.

1.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들을 때 선행, 즉 저축을 해 놓으면, 나중에 반항할 때 찾아쓸 수 있다.

2. 선행한 아이들이 중학생때 나뉘는데, 모두 반항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작품이 될

     수 있다.

3. 대치동 학원은 확실히 다르다. 지방에 있는 아이가 대치동으로 주말원정을 다녔는데, 지방

     과는 확실히 다르다 했고, 실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기타. 냉정한 사회구조, 현실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당장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나는 아이가 내 작품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어른,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음.... 아이의 반항을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정.말. 많이 해놔야 한다....)

부모와 자녀, 둘 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대치동 학원. 정말 그럴까.

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주위를 통해 많이 듣는 이야기이다.

<아깝다 학원비> 혹은 비슷한 책에 나오는 학원이야기는 이렇다.

 

학원은 스스로 혼자 공부하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예상문제를 풀고 강사가

요약해 준 자료를 달달 외워서 100점을 맞는 게 학원의 공부방법이라 한다. 학원은 내 아이의

학습능력을 세심히 올려줄 수 없다. 왜냐하면 학원의 관심은 마케팅, 수익, 성과에 절대적으로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학원도 이젠, 달달 100점의 지도방식을 벗어나지 않았을까.

대치동 유명한 학원에 가면 가능할까.

가능성의 답을 찾기보다 자녀에게 필요한 학원을 선별해서 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녀가 학원에 가고 싶어 하더라도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왜 가고 싶어 하는지를 먼저 확인

해야 한다. 만약, 혼자 공부하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생기는 불편함 때문이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 다음 성의있는 학원을 한시적으로 이용한다. 자녀가 복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고, 학원

이 약속한 것을 잘 이행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도 '수학'은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한번 벌어진 수학 격차는 정말 넘볼 수 없다하는데.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 수리, 외국어 가운데 학원의 영향이 가장 없는 것이 수리입니다. 고3 정도 되면 의미가 없

어지죠. 교사들은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살아남는 것이 수리라고 말해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이해하는 방법으로 접근했던 아이들이 살아남습니다. 중학교 때는 서너

시간 암기해서 문제를 풀기도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아니라는 거죠.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 이상

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념 이해 중심으로 접근한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집니다."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책을 읽고, 그래, 내가 옳아 하며 '다시 현재 과정 착실히'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아이에게 학습보다 더 중요한게 무엇인지 잊지않는 부모라 위안한다.

비록, '무분별한 사교육 지양' 책만 나오고, 대치동 학원 칭송은 책으로 나오지 않지만,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를 믿는다.

 

그러다 퍼뜩 떠오른 아이들 말,

"우리 엄마는 잠을 자거나, 너무 자서 허리 아프다고 해. 아니면 너무 피곤하다고 하든가."

아이들한테 이 말, 안 듣게 하는게 더 급한 일이다.

 

아이 학습에만 관심두지 말고, 부모 스스로도 반성, 해야한다.

 

아. 근데 토요일 낮잠.

어떻게 포기한담?

일요일엔 낮잠 안 자는데.

어떻게...좀....안될까? 얘들아?

 

 

읽은 날   2010.12.13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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