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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고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지우는 것은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때를 떠
올리면 <폭풍의 언덕> <주홍글씨> <변신> 카프카, 이렇게 4개이 작품과 작가가 순서대로 떠오
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폭풍의 언덕>과 어느 청년의 자살이다.
<폭풍의 언덕>은 황량한 들판, 폭풍이 몰아치는 외딴 저택에서 괴물같지만 그게 은근한 매력이
었던 히스클리프가 떠오르고, 어느 청년의 자살은 단지 햇빛이 너무 뜨거워 자살한 것인데, 작
가와 작품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과 기록도 희미한 그 시절 독서는, 쨍하게 맑디 맑은 푸르른 하늘을 보며 '아, 죽고 싶다'고
나지막이 외치게 하는 겉멋이었다. 책을 통해 사색하고 성장하기보다 소설 속 분위기에 혼자 취
하곤 했으니.
최근, 무시해도 좋을만한 작은 필요에 의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보게 됐다. <이방인>
이 바로 그 '단지 햇빛이 너무 뜨거워 자살한' 청년인듯 하다. 내 기억은 햇살이 뜨거운 해변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겨누어 자살한 청년인데,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느 해변, 햇빛의 칼날이 너무
고통스러워 권총으로 누군가를 죽인 청년이다.
수많은 책 중 하필 이 책을 다시 보게 됐을까.
별,일 아닌 작은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뫼르소, 어느 날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듣는다. 찾아간 어머니의 장
례식, 한 문장, 한 단락씩 그가 낯설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고 조문객 질문에 굳이 대답한다.
슬퍼 하거나 울지도 않는다.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 햇빛, 가죽 냄새, 영구차의 말똥 냄새, 옻 냄새, 향 냄새, 자지 못한
하룻밤의 피로에 지쳐, 이제는 드러누워 실컷 잠을 잘 수 있겠다며 작은 기쁨을 느낀다.
'어머니 장례식을 끝났고 내일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뫼르소가 연
인과 검사의 질문에 대답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그녀가 응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였으나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조금
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에게 모든 것은 사실을 이러하지만 의미가 없는 것 투성이다. 그 날 역시 마찬가지다. 이마 위
태양이 심벌즈 소리를 내고, 번쩍이는 단도로부터 튕겨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이 그의 속눈썹을
고통스럽게 했기에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언젠가 책에서 읽
은 적이 있었던, 모두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일이다.
도대체 뫼르소에게 주요한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사형을 선고받은 재판장에서조차 "나는 나의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발대발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웠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나로서는 참말로 무엇을 후회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되뇌는 뫼
르소, 그는 왜 이렇단 말인가.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를 구하지도 않는 그의 말과 행동은 시종일관 계속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야 드러난다.
"내가 살아온 이 허망한 생애에선 미래의 구렁 속에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해들을 거쳐서 거슬러 올라와, 그 바람이 도중에 내가 살고 있던 때, 미래나 다름없이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그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그가 이해됐다.
항상 미래의 구렁에서 어두운 바람이 현재로 불어온다. 지금이나 미래나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
게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일들은 결국 아무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다한들 저
렇다한들 어떠하리. 미래는 지금처럼 어두운 바람이 가득할테니.
뫼르소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미래가 바뀌지 않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 모두 의미가 없다고 했으나 뫼르소는 죽음 가까이에 이르
러서야 깨닫는다.
자신의 어머니가 생명이 꺼져 가는 양로원에서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이를 했는지를 말이다.
어머니처럼, 그도 어쩌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것도.
그는 다시 살기 위해 세상의 무관심을 원한다. 증오의 함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다정한 세상의 무관심 속에 온전히 죽을 수 있으니 말이다.
최고의 카타르시스 폭발이다.
분명 과거 십대의 내게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다. 뫼르소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푸른 하늘을 보며
죽고싶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이 어떻게 청소년 권장도서였을까.
더군다나 학교 권장도서 목록이 아니었다면 정보를 구할 곳이 여의치 않던 그 시절이니 더욱 그
러하다.
인터넷에서 지금의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찾아봤다.
다행히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목록에 <이방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각자마다 이해의 폭이 다르고, 지금의 청소년은 과거와 다르겠지만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이 신중
하면 좋을거 같다.
다시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마, 지금처럼 최고의 카타르시스 작품으로 기억하겠지.
다시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을 또 읽는다면 감상은 어떻게 될까.
그대로일까? 변할까.
변한다면 어떻게....?

다시 읽은 날 2012. 7. 20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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