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과학자의 서재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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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갖고 계신가요? 

그 꿈이 자신의 현실과 맞지 않아 힘드신가요? 

그렇다면, 이 책 <과학자의 서재>를 추천합니다. 

 

최재천 교수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어요. 그러나 육군장교였던 엄한 아버지와 장남으로서의 위치에서 '시인'은 언감생심이었죠. 이래저래 방황을 많이 했답니다. 

그러나, 최교수는 시인이라는 꿈을 내쫓지 않고 가슴 한 켠에 자리잡도록 했어요. 꿈이 도망가버리면 '자기답지 않은 자신'만 남기 때문이었죠. 

현실이 어떻든 가슴 속에 남아있던 꿈은 최재천 교수를 '시인의 마음을 가진 과학자'가 되게 해주었다죠.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시인의 꿈이 과학자와 결합할 수 있게 한건 한 권의 책 덕분이랍니다. 

바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에요. 

이 책은 최교수에게 생물학이 그저 흰 가운을 입고 세포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학문이란 걸 알려줬답니다. 이 책으로 최교수는 생물학에 몸바쳐도 되겠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저도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세포 단위의 난해한 이야기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그건 필연이다'란 인상을 강하게 남겨주었죠. 세월이 지나 불교의 연기론 (하나는 전체에 연루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침투하고 있다 /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인연 가운데 결정적 하나로 기여함을 아는 것)을 보며 이 책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낯선 과학과 불교의 얘기가 이질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교수를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훌쩍 유명인사가 되버린 그에게 인기욕이나 명예욕이 있을것만 같았거든요. 근거없이 말입니다. (그런 작가 중 한명이 이지성이기도 하구요) 

그런 오해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다음의 문장은 제 마음을 울렸어요. 

 

"내가 가야 할 길을 담담히,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가면 세상도 나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무엇을 해보겠다고 욕심부리며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은 어떻게 보면 내 유전자가 나한테 허락한 범주 내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 내가 하고자 한 일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시인의 꿈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진 과학자'가 된 최교수 이야기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좌표가 될 거 같습니다. 최교수는 책을 통해 꿈을 이어 나갔지만, (그래서 과학자의 서재로 제목을 지었나 봐요) 방법은 다양할 수 있겠지요. 꿈이 현실과 맞지 않더라도 내쫓지 말고 가슴 한 켠에 머무르게 한다면 언제고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그 믿음을 갖기엔 우리의 현실이 빈곤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자체가 '할 수 있다' 란 가능성의 반증일 테니까요. 

 

             

 

 

 

읽은 날  2013. 5.  3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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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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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를 읽은 후 실망했었습니다. 한 권의 책이 그를 대표할 수 없기에 이 책, <근대를 말하다>를 읽어봤습니다. 

 

이덕일은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만큼 이 책에 남다른 애착과 열정을 쏟아부었답니다. 우리 역사 중 유독 외면당한 근대를 통찰한 것인데요, 이 책은 <중앙 SUNDAY>에 연재하고 있는 코너를 묶은 것입니다. 

 

이 책은 순서대로 나열된 신문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헤드라인만 봐도 되고, 내용이 궁금하면 기사를 봐도 되는 신문 같았어요. 이런 구조를 통해 고종의 오만 등 당시 정치상황의 상세한 기술, 익숙한 식민통치 구조 등을 알려주고 있는데,  '만주의 삼부' 편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일제시절 독립운동에 대한 제 지식은 '상해임시정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독립 운동단체와 방향이 있었어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공화주의자들,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주의자들, 그리고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이들. 

이들은 독립이라는 큰 뜻은 같지만 건설하려는 나라에 대한 그림이 각기 달랐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 각종 기념관에서 봐왔던 독립운동가는 그저 비슷한 독립운동가라 생각했는데, 그들 사이의 이념갈등과 반목이 상당했습니다. 

그들의 흐름을 잠시 보자면, 

 

 

 

 

이렇게 분열되던 독립운동은 다음 그림처럼 통합하자는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독립운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은 매우 불행하게도! 그 당시 상황이 도와주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거 같습니다. 각 세력의 지도부가 체포되고 일제가 만주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만주사변'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이 책이 끝나거든요. 

 

유난히 외면받는 일제시대 역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그저 느닷없이 맞이한 독립이니까 많은 것이 묻힐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라고만 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닌, 독립이라는 큰 목표에서조차 이념갈등과 분열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요. 예나 지금이나 과거.현재에 대한 정확한 직시와 반성이 없다면, 미래는 도돌이표처럼 과거와 같을 수밖에 없을 거에요. 

 

공화주의자나 복벽주의자, 그들 모두는 스스로 옳다 생각해 일어난 것이니 가치관 대립은 당연한 것일테지요. 그러나 언제고 대의를 잊지 말아야 했는데, 사람이란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민족과 그 당시 상황이 그랬던 것일까요. 

짧은 시기에 근대화를 겪느라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도 함.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부대가 군권을 탐내느라 독립군과 러시아와 교전을 벌인 사건), 

백광운 살인사건 (1924년 문학빈[리영희의 외할아버지를 죽인 머슴, 훗날 고문에 못이겨 전향함] 일파가  참의장 백광운을 살해함. '돼지 족발을 뼈째 씹어 먹는 장사'로 일제를 공포에 빠뜨렸던 백광운이 내부 공격으로 사망), 

고마령 참변 (독립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의 회의 정보가 일제에 들어가 죽도 밥도 아니게 된 사건) 

사건들은 절망스럽기만 합니다. 

 

재미있는 신문 같지만, 신문이 아닌 이 책을 통해 이덕일은 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의 상당 부분들은 지난 세기에 벌어졌던 일들의 재현 임을요. 

대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작은 이해로 반목하는, 전혀 새롭지 않은 현실 말입니다. 

그럼에도 되풀이되고 있다니요.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은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해줄겁니다. 

자신과 미래를 위한 첫 시작에 역사의식은 꼭 필요한 일 일거에요. 

소탐대실하지 않게도 해줄테구요.           

 

        

 

읽은 날  2013. 2. 16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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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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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종교 간 전쟁, 종교 밖 전쟁, 그리고 종교 내 전쟁이라는 안내와 함께 따뜻한 전쟁이라는 평을 봐왔거든요. 이 책 한권이면 종교를 둘러싼 각종 논의를 한방에 볼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모두 3명입니다. 

종교가 인류를 괴롭히는 바이러스라 생각하는 과학자 장대익, 

진화론을 수용하는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신재식, 

과학과 종교를 특정한 세계관 안의 문제라 생각하는 종교학자 김윤성. 

 

이러한 3명의 조합이기에 종교 간 전쟁과 종교 내 전쟁은 볼 수 없었고, 종교 밖 전쟁만 볼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와 과학의 전쟁이지만요. 

그들은 진화론자들이나 인지 과학자들이 종교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종교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창조 과학이 휩쓸다시피 한 한국 개신교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이지만, 신의 필요성을 인정합니다. 진화론을 부정하는 의견을 보면 불편해하는 편이구요. 그런 입장이라 진화론을 부정하는 저자가 포함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습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전쟁이라 여겨지거든요. 제목은 <종교전쟁>을 달고 있지만, <개신교와 과학의 대화>라 고쳐야 할 거 같아요. 제목처럼 종교전쟁이 되려면 진화론을 부정하는 저자가 있었어야만 했어요. 

 

종교학자 김윤성은 한국 개신교가 창조과학에 압도적인 지지를 하는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국이 1960년대 이후 소련 인공위성 발사에 자극받아 과학교육이 중요해지면서 창조과학이 퇴출된 것에 비해 한국은 창조과학을 수입한 1세대가 발언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한국 교회는 보수적 성향의 선교사(그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여파로 미국의 주인을 자처해 온 복음주의 개신교들이 결집했었답니다)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었고, 그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들 자신으로선 건재할지 몰라도 지금 한국 개신교가 깨달아야 할 것은, 보수주의라는 신앙의 '온실'에서 나와 바람 한 점 없는 광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개신교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요. 

진화론이 허구라 하기 전에, 과학의 본질이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검증이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대화로 표현되지만 그들의 이견은 결코 좁혀지거나 메워지지 않습니다. (창조과학 개신교가 없음에도요!) 그저 상대방 입장을 듣고 원위치할 뿐이지요. 그 이유는 언제나 되풀이 되는 '신앙 체험'  때문인거 같아요. 종교 혹은 신적 체험은 타인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어렵고, 각자 체험도 지극히 개별적이고 상이하기 때문일 터지요. 

그럼에도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비판적 담론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 편에선 창조 과학이 휩쓸다시피하고,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을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종교라 비난하고 있는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니까요. 좋든 싫든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재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개신교라는 종교가 건강한 비판적 담론위에 우뚝 서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책 내용 중 '전사 리처드 도킨스, 전략가 데니얼 데닛, 그리고 외교가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들 표현대로 하면 장대익은 전사고, 신재식과 김윤성은 전략가나 외교가에 가까운 거 같아요. 

저는 전사보다 전략가나 외교가가 편했는데요,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존 호트'였습니다. 

존 호트는 종교와 과학을 우주를 읽는 중층적 독법으로, 즉 서로 다른 수준의 책 읽기로 이해하면서 둘의 관계를 해명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각자 독자적인 독법인데, 한 가지 독법으로 우주를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사물이나 생명에 관한 설명은 다양한 수준의 설명이 있으며, 이것들은 상보적인 것이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개신교와의 논쟁이 없을까요? 

저자 3명 모두 창조 과학 개신교인과 친분이 없어서인지, 그들이 논쟁할 가치조차 없어 거부한 건지, 자못 궁금한걸요. 

      

  

           

 

 

 

읽은 날 2013. 1. 13    by 책과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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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위기 이후 - 신자유주의를 딛고 다른 사회를 상상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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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시절, 신자유주의 시대가 끝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리라는 희망이 팽배했었습니다. 마침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 버락 오바마 당선은 희망을 넘어 믿음이 되게 했었지요. 

U자형 회복이 어려울 것이다, L자형 침체일 것이다라는 전망이 커질수록 강력한 믿음을 가지기도 했던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현재를 버틸 재간이 없었으니까요.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의 세월이 흘러, 경제는 내성을 가진거 같았어요. 많은 이가 예상했던 L자형 침체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죠. 한때 시장은 본격적인 상승을 점치기도 했었으니까요. 

정말 시장이 상승할 건지, 상승한다는 믿음만 주고 된통 뒷통수를 내려칠지, 회복이 어렵다는 불황은 어떻게 되가는 건지...궁금했습니다. 

 

제목으로 검색되는 여러 책 중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세계금융위기 이후>를 골랐습니다. 

경향신문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 2009년 9월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 2010년 2월 한국기자상 기획보도부문 수장작의 이력, 6부 44회로 구성된 일간지로선 보기 드문 초장기 특집기획이라는 점이 끌렸습니다. 

 

1부에선 시장만능주의가 사라진 아이슬란드와 미국 상황에 이어 장벽이 없는 금융위협에 접속된 '나'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40년 만의 금융위기, 석유위기, 식량위기라는 세 먀녀가 동시 출현했고, 위기의 표적은 언제나 변함없이 저소득층이었단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2부에선 신자유주의 모델의 파국적 종말을 여러가지 챕터로 보여주고 있어요. 의료 민영화, 노동 유연화, 공공 파괴, 공공산업의 사유와, 빈곤의 심화와 양극화... 미국이나 우리나라 사례를 통해 익숙한 것들이죠. 

혹시 아시나요? 

미국이 전세계 국민 총소득 1위인데,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세계 2위! 라는 것을요. 

이런 미국을 압도하는 나라가 있어요.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OECD 국가 중 1위라네요. (이 책 발간 기준) 

 

3부에선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동의 존엄성, 실업, 비정규직, 교육, 노후, 보육, 주거, 의료, 장애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상황과 북유럽 (핀란드, 스웨덴,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현재를 비교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해줍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사항으로 국제사회 내 미국의 지위하락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 외 필요한 사항으로 국제기구 개혁, EU같은 한.중.일 지역연합 구축, 그리고 한국형 모델을 찾기 위해 필요한 노력, 그리고 정치 얘기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어요. 

 

인상깊었던 부분은, 파생상품의 근원지 월가에서 금융맨들이 소림사 무술 배우듯 3~4년 위험 헷지와 투자자 입맛에 맞는 상품을 짜는 기술을 도제식으로 전수하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실물경제에 기반하지 않는 파생상품을 얼기설기 엮어 마치 고급기술인냥 젠 채했고, 고액 연봉파티를 즐겼는데, 정작 피해자는 저소득층이었죠.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가진 것을 다 잃어야 했는데, 월가맨은 재기를 꿈꿀 수 있었단 점입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정지 선언 후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최종 소비자가 되고 중국와 일본을 위시한 신흥공업국들은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해 거기서 발생하는 무역흑자로 미국 국채를 사주는 국제 달러 환류 시스템의 골격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그 글로벌 불균형이 다시 전반적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랍니다. 

지금, 어떤 예측도 섣부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 미국 금융자본과 석유자본의 융합관계와 그들의 동향이다. JP모건과 합병해 JP모건체이스를 만들어낸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회장이 존 데이비슨 록펠러라는 사실, 미국 구제금융 7000억 달러의 총괄수탁은행으로 선정된 뉴욕맬런은행을 소유한 멜런가문의 걸프석유 소유, 엑슨모델 주식의 73% 금융자본 소유 등에서 보듯 두 거대자본 블록은 사실상 한 몸이 되어 군수, 화학, 자동차, 농업 등 전 분야의 자본과 얽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충실해 대변해 온 통화주의자들 - 가이트너, 버냉키, 로렌서머스 등-을 검은 루스벨트 오바마 정부의 주요 포스트에 파견해놓고 있다. 비록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해도, 1970년대 초반처럼 식량와 석유를 이용한 압박과 지정학적 위기 조장, 전쟁으로 달러체제의 생명 연장, 경계 없는 금융투기체제의 복구가 재시도될 필요조건이 이미 마련돼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이러한 상황이 나아지기 위해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정치'를 꼽고 있습니다.  

룰라로 브라질을 변화시킨 브라질 국민, 다른 삶을 선택한 스웨덴 국민...을 예로 들고 있어요. (이 책 발간이 2010년이라는 점을 참고해야 할 듯 싶어요) 

 

앞으로 정말 어떻게 될까요. 

현재의 위기는 약 10년마다 오는 산업순환상의 위기에, 시장만능론이라는 30년짜리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 그리고 100년에 한 번쯤 오는 패권국가의 위기가 겹쳐진 것이라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정치'의 당사자인 국민 생각은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거대흐름을 예측하기엔 우리의 이해와 분석 툴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L자형 침체도 잘 모르겠고, 시장 상승도 잘 모르겠고... 

2008년 그때처럼 제 분수를 알고 위험에나 대비해야겠어요. 

이러면서 자꾸 뒷통수 당할텐데 말이에요. 

 

 

           

 

 

읽은 날 2013.3.14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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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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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20대를 대표하는 문장이나 사물은 무엇인가요?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였습니다. 

무엇에 매료되는지 알 듯 모른 채 세월이 흘렀고, 이젠 과거의 일이 되버렸죠. 

사람은 행동한 다음에 도덕적인 결정을 하거나, 합리적인 이유를 찾는다지요. 때론 그냥 묻어두기도 하구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20대의 저를 매혹한 원인을 찾는다는 건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야만 하는 과거의 '나' 였습니다. 꼭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만나면 막상 후회할 것 같은 '첫사랑' 처럼요. 

 

밀란 쿤데라는 우리의 삶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걸 배제한 채 우리에게 나타난다네요. 

이로 인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이 생깁니다. 

삶은 가벼운 것인데, 무거운 것으로 위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가령, 우연한 사건이 몇 번 겹치면 우리는 종종 필연으로 오해하는 것처럼요. 

때론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요. 

인생을 어깨에 짊어진 짐으로 종종 표현하면서, 견딘다거나 싸운다거나 하는 것처럼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무거운 인생을 가볍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와 달리 사비나라는 인물은, 가볍게 가볍게 살아요. 전혀 무겁지 않게요. 그러나 이런 사비나는 결국 공허를 느낍니다. 인생의 짐을 짊어지지 않고 가볍게 살았으나 그 끝이 공허라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사비나와 달리 무겁게 살았다면, 그 끝은 어떨까요. 아마 무겁게 살 필요 없었는데, 좀 더 가벼울 수도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하지 않을까요. 

제 예상과 달리 소설 속 인물들은(무거운 인생을 가볍게 만들고 싶어했던) 가벼움으로의 동경과 소소한 시도만 한 채 사라집니다. 

아, 예외적인 토마시라는 인물이 있군요! 

 

토마시라는 인물은 무거운 인생을 가볍게 만들수 밖에 없었던 (혹은 만들었던) 밀란 쿤데라 자신이자, 체코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프라하의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도시 외곽 병원의 허름한 의사로, 유리창을 닦는 노동자로, 급기야 시골의 트럭 운전수로, 한때 문제가 된 기사의 화두를 제공하기도 한 토마시에 체코의 역사가 투영됩니다. 2차 세계대전과 1963년 '프라하의 봄' 등 삶의 변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거움과 가벼움, 삶의 일회성을 절절히 느낀 작가의 깊은 통찰이 느껴지더군요. 

 

인생을 가볍게 만든 토마시나, 한없이 가볍게 살았던 사비나나, 무거운 인생을 가볍게 만들고 싶어 했던 테레자....이 모든 소설 속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작가의 가능성이라 밀란 쿤데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인물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네요. 왜냐면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작가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매혹적인 경계선을 뛰어넘은 인물을 통해 밀란 쿤데라가 말하려 한 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인생' 이지 않았을까요.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 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인생이 일회성이란 이유로 가벼운 것일까요. 

아니면 가벼워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각자에게 있을 것입니다. 

무거운 역사에서 가벼워지고 싶었던, 밀란 쿤데라의 답이 모두의 정답은 아닐테니까요. 

 

20대의 저는 주의의 모든 것을 무.겁.게.만. 여겼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가벼움을 동경했고 시도하는 이들을 부러워했나 봅니다. 

그래서 제목부터 남다른 이 책을 애정했던 거 같아요. 

 

지금의 저는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가벼움에의 동경은 그닥 없지만, 제 자신 속 무거움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가벼워지고 싶은 건 아니구요.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의 로망은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극과 극이 거의 닿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천사와 파리, 신과 똥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는 꼴을 차마 보지 못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달려가 매달린, 스탈린의 아들...과 같은 죽음의 기회요. 

뭐, 그런 기회가 오든 말든 한 마디 항변조차 하지 않을테지만요. 

밀란 쿤데라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라 치켜 세우든 말든, 왠지 폼나서 말이에요. 

 

 

       

 

다시 읽은 날 2012.12.16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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