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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가을에 어울리는 한복의 빛깔같은 책의 표지들은 근래에 쏟아진 황진의 표지들이 모두 붉은 색을 띤 것과 같은 속성을 가지면서도 차별화되는 것 같다. 한동안 유행처럼 여러사람의 손을 오가던 책들을 1년도 넘게 딴짓하듯 만지작거리지도 않다가 펼친 이유는, 분주하게 지나가는 2005 가을을 보내는 나름의 의식이랄 수 있겠다. 도서관에서 잡히는대로 황진을 여러 권 빼들고 왔다. 작가군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과 스토리를 즐기어볼 요량이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안수길의 소설 황진이도 기억너머로 떠오를까? 그 첫권이 김탁환의 "나, 황진이"이다.
김탁환의 소설은 지겹도록 해석과 문자가 많은 특징이 있다. 진저리를 치면서도 내가 그의 소설들을 꾸준히 읽어내는 이유는 아마도 지적 전통 속에서 탐색되는 일련의 중후한 유희(?) - 이런 표현이 어울리기나 하는 건지, 원... - 를 맛보기 때문일 게다. 참신성이라면 좀 뭣하지만, 소설을 읽어 가면서도 공부하는 듯한 느낌이 나고 또 당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작가를 통해 오늘의 다른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는 걸 느끼게 된다. 이는 부조화를 느끼면서도 동질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율배반성을 맛보게 하고 또 작가의 새로운 시도들이 일단은 긍정성을 확보하게 만든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황진이의 이야기이기보다 황진이를 통해 서경덕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파격적일 수 있겠지만, 황진이를 16세기 지성의 언저리에 자연스럽게 얹혀놓고 '지와 사랑과 감성'이 함께 어우러지는 맛을 보게 하였다. 조선 중기 - 사림들의 중앙정계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짐에 따라 이를 견제하는 훈구세력과 빚어지는 갈등구조는 사화(士禍)로 나타난다. 소설 속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정암선생을 언뜻 언뜻 비치고 있다. 서경덕은 역사적으로도 16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으나 정계진출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주변적이다. 아마도 많은 지인과 친구들이 화를 당하고 자신들이 이상적이라고 믿었던 순수 성리학의 세계가 현실속에서 왜곡되는 모습에 벼슬길에 들어선다는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은 화담처럼 도교나 성리학 외의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깊었다. 그것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또는 이겨내려는 지식인의 몸부림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런 삶을 등가적으로 황진이는 관찰하고 수용하는 넓은 폭과 깊이를 보이고 있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출생을 수용하고 지음(知音)을 통해 사대부와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또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면서 나아가 학적 전통이 쌓이는 화담에서의 삶이 수용되는 황진은 화담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진은 대장부같은 구석이 있다고 표현되고 있지만 화담은 여성성이 섬세하게 숨쉬고 있는 것 아닌지....?
황진은 송도삼절의 하나로 여성성을 대표하는 아름답고 선녀같고 천상의 소리를 아는 기생이기 보다는, 스승인 화담의 뜻과 기색을 살필줄 아는 의연한 제자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