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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평점 :
내가 아주 오랫동안 ( 거의 세달이 걸렸나 보다 ) 읽은 책, "퇴계와 고봉 , 편지를 쓰다"는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 - 자기 완성이라는 영원한 숙제는 대학자나 청년 학자에게 모두 절실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대화하고 편지를 나누었다. 세속에서 관리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모순을 서로 이해했고, 또한 학자와 관리의 길을 함께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로 공감했다. 오늘날과 전혀 다를바가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 지식인들이 방기하고 있는 문제는 아닌가. 우리가 언제 편지로 철학을 나눈 적이 있으며, 시도해 보려고 했던가. 두 사람은 처음 편지를 나눈 이후 십삼년동안에 끝없는 애정과 상호존중의 자세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세대간, 사제간의 관계를 초월했던 것이다.' 라고 책장에 밝혀주고 있다. 책을 광고하는 문장치고는 울림이 깊다.
사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동양철학이나 윤리학에서 아주 유명한 토론으로 여러 차례 들어본 적이 있다. 사단칠정론이란 것이 현재의 내 관심을 끄는 문제가 아니라서 별반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지내왔으며 그래서인지, 혹자는 퇴계의 인격을 논할때 이 경우를 이용하여 과대포장을 하기도 하였고, 선비들이 지녔던 이론적 논쟁의 주요한 예로써 삼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 책을 통해 본 퇴계와 고봉은 13년이란 긴 시간동안 학문을 통해 만나 인격적 감화와 신뢰를 확인하고 상호존중감을 극대화시켰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퇴계가 후학을 위해 걱정한 내용이라고는 술이 과하다는 것, 그리고 병약한 자신을 호소하며 기대승의 가정적 불행이나 병들은 것을 염려하는 정도였다. 완역본인지 의심스럽기는 하고 또한 옮긴이의 의도에 의해 주제별로 편지가 분해됨으로써 이해를 돕기위한 편리함은 있었을지 모르나 편지글을 전체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를테면 다른 글에서 고봉의 가벼움에 대한 퇴계의 걱정과 꾸짖음을 읽었던 기억도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감사와 경애감으로 가득 찬 느낌이 편지글 전편에 흐르고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편지를 통한 의견교환이란 매우 낯설다. 편지글을 주고 받는 경우란 컴퓨터를 이용하기 어려운 환경 이를테면 군대에 가있거나 집단시설을 이용하는 경우에 한정되고, 편지란 아스라한 추억의 도구로 자리잡았다. E-mail을 통해 동서양의 철학이 만난 기획물을 읽어는 보았지만,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속도감의 부재를 느낄 리는 없었다. 빠르면서도 편지글을 통해 교류하는 서로 다른 두 세상이 멋지게 교차되어서 좋았다. 퇴계와 고봉처럼 몇달이 걸려 도착할 지 모를 편지에 오로지 의존하여 안부와 학문을 논하는 것은 느린 사회 속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철학적 논지를 지닌 주제들에 천착하는 시간의 길이는 길든 짧든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하다. 얼마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바라보고 판단하느냐가 더욱 중요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정말 느리게 읽은 책이다. 理와 氣라고 하는 성리학의 두 원형적 존재를 가지고 사단과 칠정을 논하되 선배 학자들의 학설을 존중하고 치밀하게 파악하는 태도는 본보기가 될 만하였다. 열린 마음으로 깊이 들여다보기 - 역시 이 말이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느낌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