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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 개정판 ㅣ 나남창작선 58
박경리 / 나남출판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리산 밑의 토지마을을 여행하는 기회에 읽을거리로 박경리님의 소설 "파시"를 가지고 갔다. 차 안에서 읽기에 아주 적합한 간결한 대화체의 서술과 차례에 각 장마다 간단하게 설명된 내용을 미리 파악하면서 다음 쪽을 읽어 내리는 맛이 순하였다. 긴 여행지에 딱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독특한 인물군이 많이 있고 또 파격적인 내용의 전개가 이루어질 듯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등장인물의 생각 그리고 행동을 보면서 작가의 고향마을인 토영-통영-이 아닌 내 주변의 어떤 고장일지라도 일상적으로 보여지는 삶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이점과 편리함을 한껏 이용한 글 읽기를 마친 후 생각의 여지가 많은 작품을 이렇게 가볍게 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되었다. 가정환경의 급변을 수용하기 힘들어한, 허영의 덩어리라고 비난받은 학자의 자조적인 타락과 명화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낭만적 도피(?) 그리고 수옥과 학수의 사랑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 서영래와 그의 부인 용주의 동물적인 학대와 갈등, 조만섭과 서울댁의 어울리지 않을듯한 일상사와 평온한 부부생활, 박 의사와 그의 아들 응주의 폭넓은 선택기회와 갈등, 바람둥이 문성재에 기대 선 선애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삶의 모습들.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만난 환경과 어떻게 부딪치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살고자 원하는가 생각해보았다. 혹여 죽희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응주와 같지는 않았는지? 내 국가와 민족을 뒤돌아보아야만 할 전쟁 상황 속에서도 내 삶의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파시가 끝나고 난 이후의 허망함과 쓸쓸함에 치를 떨며 다음 파시를 기다리는 목마름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벼운 독서에 비하여 머리가 많이 아팠다.
차례는 기항자(조만섭을 따라 통영으로 온 수옥) - 등대불(미친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명화와 의학도인 응주의 사랑과 좌절) - 봉화서 온 여인(성재를 찾아온 선애) - 박 의사 - 갈대처럼(서영래에게 짓밟힌 수옥) - 이율배반(부산으로 이사온 박의사네, 죽희에게 끌리는 응주) - 기다리는 여자들(명화, 선애, 수옥) - 슬픈 아버지(명화를 사랑하는 조만섭) - 밤길에서(죽희와 명화사이에서) - 봄은 멀어도(학수를 통한 수옥의 구원) - 밑바닥까지(학자의 자학) - 섬(개섬으로 도피한 수옥과 학수의 삶) - 마지막 주사위(박의사가 명화를 사랑했다는 고백) - 귀거래(수옥을 찾아낸 서영래의 간섭) - 파시(응주와 하룻밤을 보내고 일본으로 밀항한 명화와 남아있는 응주의 삶은...) 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