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평점 :
유성룡의 징비록은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이다. 고관을 지냈으며 임란 전 기간동안 왕을 모신 측근으로서 전쟁을 바라보는 넓은 눈과 겸허한 마음의 자세가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어낸 한숨은 얼마였으며, 우리가 당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이름없는 민초들의 눈물겨운 항쟁은 얼마나 치열했던가? 하지만 그들의 수고에 대하여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난이 끝난 뒤에도 심한 군역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나 경계의 대상으로 죽음까지도 갔던 것을 생각하면 애국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는지, 회의를 하게 되면서도 내가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게 되는 책이다. 내용가운데 감동적이었던 부분들을 인용해보자면,
신각은 김명원의 부장이었다. 그런데 한강싸움에서 패하자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 그곳에 온 함경우도 병사 이흔과 함께 서울로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던 적을 격퇴시켰다. 이야말로 왜적이 우리 나라에 침략한 후 처음으로 승리한 싸움이었으므로 백성들은 감격해 모두 나와 환호했다. 그럼에도 김명원은 임진강에서 올린 장계에 이렇게 썼다. ‘신각이 제 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는 등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우의정 유홍은 글을 읽은 대로 임금께 보고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하였는데, 마침 그때 신각의 승리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사람을 뒤쫓도록 했으나 이미 선전관의 손에 그가 죽은 후였다. (pp. 77-79)
적군은 이미 대동강변에 출몰하기 시작했고 재신노직 등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궁인들을 호위하며 성을 나섰다. 이 모습을 본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칼을 빼어 길을 막고 나서며 폭행했다. 신주는 깅에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재신을 지목하며 말했다. “너희들이 평소에는 편히 앉아 국록만 축내더니 이제 와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이 무렵 연광정에서 임금께로 향하던 나는 아녀자와 어린 아이까지 분노를 감추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성을 버리고 갈 거면 왜 우리를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소? 이야말로 우리를 속여 적의 손에 넘겨주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궁궐 문에 이르러 보니 소매를 걷어올리고 손에는 온갖 무기와 몽둥이를 든 난민들로 거리가 가득 찼다. 신하나 궁안의 사람들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p.92)
승전보가 전해지자 임금께서 대단히 기뻐하시며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주위에서는 반대했다.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 문무관 품계)로 승급시켰고, 이억기와 원균은 가선대부(종2품 문무관 품계)로 승급시켰다. (p.122)
뜰 안에 떨어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처음 본 왜적들은 신기한 듯이 모여들어 이리 굴려도 보고 밀어도 보는 등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포가 큰 소리를 내면서 폭발하면서 수많은 쇳조각을 흩뜨리자 그 자리에서 서른 명이 넘는 적이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들도 큰소리에 놀라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 때부터 적들은 한편으론 놀라고 또 한편으론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 했다.(p.133)
당시(명의 평양성 탈환) 고니시 유기나가의 부대원 가운데 요시노라는 사람의 종군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날 밤 북풍이 심하게 불어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화살도 잡을 수 없었으며, 아픈 다리를 나무토막처럼 끌면서 걸어갔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는 순간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p.150)
4월 20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중국 병사들이 도성으로 들어오고 이제독은 소공주댁에 숙소를 정했다. 왜적들은 전날 이미 빠져 나간 후였다. 나도 중국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죽은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과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 버렸고, 왜적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권, 종루 각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잡은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변해 있었다.(pp.172-173)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려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p.181)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는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들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라에서는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했다. 그러자 형개가 나서 말했다. “당연히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충혼을 달래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바닷가 백성들이 모여 사당을 짓고 민충사라 이름 붙인 후 때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장사치들과 어부들은 오가며 그곳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p.213)
조선왕조가 겪어내야 했던 가장 큰 위기를 겪어내는 모습들과 민초들의 분노 그리고 온몸으로 나라를 위해 싸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절한 사랑 등등이 가슴을 저미도록 감동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내 나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어찌 말로 다 이룰 수 있으랴. 싸움만 밥 먹듯 할 것이 아니라 가슴 속으로 일어나는 민족애를 가만가만 느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