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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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5년, 애거서 크리스티 탄생 125주년을 맞아 BBC에서 3부작 드라마로 리메이크했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nd Then There Were None). 영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드라마화된 적도 있고 수없이 영화화도 되었던 작품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나는 영화 <호빗> 시리즈로 익숙했던 배우 에이단 터너 때문에 드라마를 봤고, 이후 원작을 읽었다. 


 영드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본 추리소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필력과 천재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더니, 과연! 영드를 볼 때는 '감히 우리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죄를 처벌내릴 수 있나' 엄격근엄진지한 자세로 질문을 던졌으나, 원작을 읽고 나니 니거 섬에 갇힌 캐릭터 모두가 참 멍청하고 야비하게 느껴져 '죽어야 마땅했네' 라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야말로 격한 흙탕물 싸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ㅋㅋㅋㅋㅋㅋ


 영드와 원작을 자연히 비교하게 됐는데, 원작과 달리 드라마에서만 나온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인 장면으론 필립 롬바드와 베라 클레이슨의 배드씬이다. 예상했던 대로 영드 작가진의 정열적인 각색이었다. 베라 클레이슨이 목을 매달았을 때 범인과 만나는 장면도 각색이었고, 깔끔하다 못해 쉬워보였던 범인의 자살도 각색이었다. (원작은 안경 고무줄까지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으니 더욱 치밀하다.) 워그레이브 판사와 휴고가 만났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범인의 계략과 살인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 전개가 밝혀지는 부분도 놀랍다. 아 드라마도 책도 정말정말 재밌었다!


 나는 황금가지의 리커버 버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란 기획으로 묶인 책들은 <가디언>에서 선정한 애거서 크리스티 베스트10 목록,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 세계 판매고, 애거서 크리스티 본인이 직접 뽑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목록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장편 66권, 단편집 20권을 발표했다. 과연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대작가다. 이 작품이 영국에서 처음 발표될 때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나, 미국 출판명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전세계 독자들에게 원제보다 더욱 알려지면서 두 제목이 통용되어 쓰이고 있다. 원제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책 속 문장과 함께 내가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열 꼬마 검둥이가 밥을 먹으러 나갔네. 하나가 사레들었네. 그리고 아홉이 남았네. 아홉 꼬마 검둥이가 밤이 늦도록 안 잤네. 하나가 늦잠을 잤네. 그리고 여덟이 남았네. 여덟 꼬마 검둥이가 데번에 여행 갔네. 하나가 거기 남았네. 그리고 일곱이 남았네. 일곱 꼬마 검둥이가 도끼로 장작 팼네. 하나가 두 동강 났네. 그리고 여섯이 남았네. 여섯 꼬마 검둥이가 벌통 갖고 놀았네. 하나가 벌에 쏘였네. 그리고 다섯이 남았네. 다섯 꼬마 검둥이가 법률 공부 했다네. 하나가 법원에 갔네. 그리고 네 명이 남았네. 네 꼬마 검둥이가 바다 항해 나갔네. 훈제 청어가 잡아먹었네. 그리고 세 명이 남았네. 세 꼬마 검둥이가 동물원 산책했네. 큰 곰이 잡아갔네. 그리고 두 명이 남았네. 두 꼬마 검둥이가 볕을 쬐고 있었네. 하나가 홀랑 탔네. 그리고 하나가 남았네. 한 꼬마 검둥이가 외롭게 남았다네. 그가 가서 목을 맸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네.

내 죽음을,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더디고 지루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 내 죽음은 흥분의 광채 한가운데서 다가올 터였다. 죽는 순간까지 나는 삶을 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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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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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그 유명 문구로 시작해, 이제 우리 여성들의 방을 어떻게 장식하고 나누어 쓸 것인가 질문하며 끝맺는다. 남성을 두 배 형상으로 비춰온 여성의 거울 역할을 꼬집을 땐 역사적으로 줄곧 불완전하고 저열했던 '그 남성들의 자신감에 대한 인지'를, 셰익스피어 누이의 영혼을 이곳 여성들의 육신 안에 되찾아오자는 최종 제언에선 '열렬한 용기'를 얻었다. 똑부러지는 말빨에 압도되어, 읽는 동안 내내 내 무기력함이 사정없이 몰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여러분에게 사소한 부분을 지적하는 의견 한마디 즉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내내 남자의 형상을 실물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법 같은 달콤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습니다. 여성의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면, 세상은 여전히 늪과 밀림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전쟁의 영광도 모두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른 무엇이 되는 것보다 간단하고도 그저 평범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 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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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학교에 가지 않아요 - 등교 거부 딸과 엄마의 198일 이야기
노하라 히로코 지음, 조찬희 옮김 / 꼼지락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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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침 초등학교 5학년 딸이 갑자기 등교거부를 하면서 벌어지는 198일 간의 에피소드를 엄마이자 작가인 노하라 히로코가 만화로 그려낸 교육 테라피 에세이다. 잠깐의 소동으로 끝날 줄 알았던 등교 거부가 장기전으로 바뀌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딸과 딸을 학교에 보내기 위한 엄마 간 고군분투가 짠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아무도 도모를 억압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호실 선생님도, 담임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모든 교육자가 도모를 학교에 억지로 보내려 하지 않고 도모가 마음을 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한 뒤 아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하게끔 도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엄마 역시 담임 선생님을 통해 친한 친구들이 도모를 왕따를 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도모의 등교 거부를 받아들이고 최대한 도모의 의견을 존중한다. 물론 도모가 억지스러운 선택을 번복할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아이의 혼란을 이해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전문가의 말을 따랐다. 지방 출장으로 집에 없었던 아빠 또한 익히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화를 내거나 억압하지 않았다. 엄마의 설득대로 가만히 딸을 지켜보며 응원하기로 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참된 자세에 내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등굣길에 딸이 자기를 부르는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을 볼 때부터 울컥하더니, 졸업식날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는 선배에게 노래를 부르는 도모를 보곤 엄마가 '학교에 잘 다니고 있구나' 실감하는 장면에서 결국 울어버렸다. 학교에 다시 적응한 아이를 보며 엄마는 얼마나 좋았을까. 등교거부를 했던 노하라 히로코의 딸은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사건이 딸에게 혹시 숨기고 싶은 과거일까 걱정하던 엄마한테 딸이 오히려 '나에 대한 얘길 써 봐'라고 제안했고, 학교를 못 가던 당시의 기억을 얼마나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딸의 제안이 이해될만큼 아이가 느꼈던 배려와 행복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존재만으로 힘을 주는 '지켜보며 지지하는 양육'과 학교가지 않는 아이를 지탄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웃으면서 아이를 이끌어준 어른들의 힘이 참 따뜻하게 느껴진 만화다.

엄마, 궁금한 게 있는데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 오리가 되고 싶었던 거지?
하얗고 아름다운 백조가 아니라
다른 오리들과 똑같은 오리가 되고 싶었던 거야.
엄마, 나 사실은 쿠키 먹고 싶었어.
선생님한테도 냉정하게 하기 싫었어.
사실은 친구들과 놀고 싶어.
다른 애들과 똑같아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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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마리아 스토이안 글.그림 / 북레시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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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아 스토이안이 실제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총 스무 개의 이야기를 그리고 쓴 그래픽노블이다. 성폭력 예방 프로젝트로 시작된 마리아 스토이안의 석사학위 프로젝트가 모태가 되었고, 이 책이 그녀의 첫 작품이다. 


 열다섯 때 지하철에서 치마 속으로 들어왓던 손을 피하지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했던 경험, 소개팅 상대에게 성폭력을 당하거나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던 경험, 버스정류장에서 희롱하는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다짜고짜 손을 잡고 희롱하는 사람의 언어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 친구 남자친구가 성기를 꺼내고 성폭행을 하려 했던 경험, 데이트 폭력에 몸과 정신을 갉아먹었던 경험,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뒤를 쫓아와 친구를 불렀던 경험… 우리가 뉴스 혹은 친구의 입을 통해 흔히 들어왔지만 흔히 넘겨왔던 일들이 마리아 스토이안의 처절한 그림 속에 펼쳐진다. 사례마다 그림의 형식과 컨셉이 조금씩 달라져서 각기 다른 여성들의 사례임을 더 확실히 체감할 수 있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 왔구나 하고 씁쓸해진다.


 여성을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짧은 머리와 다양한 체형, 다양한 스타일로 그렸기에 더욱 공감가는 책이었다. 다만, 자해 협박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남성의 이야기와 과외학생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한 남성의 이야기가 내용에 포함된 건 책의 성격과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해서 책을 구성했다면 훨씬 만족스럽고 좋은 책이었을 듯하다. 덧붙여 이 책은 2016 스코틀랜드 인디펜던트 코믹북 어워즈에서 베스트 그래픽노블 상을 비롯하여, 2016 올해의 책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를 수상했다.

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들을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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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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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카의 장갑》은 《달팽이 식당》, 《츠바키 문구점》, 《반짝반짝 공화국》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 오가와 이토의 신간이다. 자신만의 엄지장갑을 가지는 풍습이 있는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서 엄지장갑과 함께 삶의 환희와 슬픔을 나누는 여성 마리카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작정단3기 덕분에 이 유순하고 깨끗한 소설을 읽게 됐다.


 할머니가 떠준 엄지장갑을 발판 삼아 즐겁게 자라나는 마리카의 소녀시절부터 수공예시험을 치뤄야하는 열두 살의 시련, 춤 동아리에서 야니스를 처음 만나 처음 겪는 열다섯 살의 사랑앓이, 야니스와 미래를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였던 하지축제, 마리카가 떠준 결혼식 장갑이 야니스의 손에 꼭 맞았던 열일곱의 결혼식, 검은 황새 부부를 보고 아이에 대한 미련을 접은 스물일곱, 얼음제국의 강제 연행으로 야니스와 이별해야 했던 서른,  야니스가 건네준 칠엽수 씨앗을 혼자 심는 지천명, 많은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해주며 세월을 보냈다가 세상을 떠난 마지막까지. 소설은 마리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쭉 발자취를 좇으며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풍습과 일상을 보여준다.


 마리카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이 건국된 지 한달 후에 태어나, 조국이 얼음제국에 점령당했던 혹독한 시간을 지나 야니스가 곁에 없던 외로운 시간도 지나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건국 백 주년을 몇 년 앞두고 눈을 감는다. 서툰  뜨개질 실력 때문에 수공예시험에서 애를 먹었던 마리카가 야니스에게 낚시 장갑을 떠주고 마을 아이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줄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자신만의 엄지장갑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리카가 루프마이제공화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구나 싶었다. 조국이 얼음제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탄압을 받을 때조차 묵묵히 엄지장갑을 뜨는 나라. 엄지장갑 한 짝의 주인을 그리워하면서 강건히 칠엽수 씨앗을 심는 나라. 주인 잃은 엄지장갑의 털실을 다시 풀어 제 것으로 만들면서 마음을 표현하는 나라. 일본인 작가가 그린 루프마이제공화국과 얼음제국의 상황이 과거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과 겹쳐보여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나서야 루프마이제공화국이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를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지장갑 풍습뿐만 아니라 하지축제, 다신교를 믿는 전통종교, 문양, 언어, 옛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등이 실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이 소설은 내게 2018년 끝자락에 나온 《빨간머리 앤》에 가까웠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축제와 풍습을 따르는 활발한 소녀가 첫사랑과 영원의 사랑을 약조하고, 이후 그를 전쟁터에 보낸 뒤 남편없이 마을 아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은 기존의 《빨간머리 앤》 서사와 리메이크 버전에서 각색됐던 서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 역시 관습적인 이야기 속에서 무구하게 전해 내려온 아름다운 교훈이겠거니 추측했는데, 책 뒷장에 첨부된 일러스트 에세이 <라트비아, 엄지장갑 기행>과 별책부록 <오가와 이토 작가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살짝 다르게 파악했구나 알았다.


 인터뷰에서 오가와 이토는 라트비아를 방문해 그 나라를 겪으면서 라트비아가 일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문화와 마음이 비슷한 나라라고 느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많은 독자 분들이 라트비아를 알게 되고, 라트비아를 방문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에 에세이도 실었다고. 작가 인터뷰를 진행한 이윤정 번역가가 답했듯, 오가와 이토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 나 역시 라트비아라는 나라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정말 여행하고픈 나라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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