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리카의 장갑》은 《달팽이 식당》, 《츠바키 문구점》, 《반짝반짝 공화국》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 오가와 이토의 신간이다. 자신만의 엄지장갑을 가지는 풍습이 있는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서 엄지장갑과 함께 삶의 환희와 슬픔을 나누는 여성 마리카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는 작정단3기 덕분에 이 유순하고 깨끗한 소설을 읽게 됐다.


 할머니가 떠준 엄지장갑을 발판 삼아 즐겁게 자라나는 마리카의 소녀시절부터 수공예시험을 치뤄야하는 열두 살의 시련, 춤 동아리에서 야니스를 처음 만나 처음 겪는 열다섯 살의 사랑앓이, 야니스와 미래를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였던 하지축제, 마리카가 떠준 결혼식 장갑이 야니스의 손에 꼭 맞았던 열일곱의 결혼식, 검은 황새 부부를 보고 아이에 대한 미련을 접은 스물일곱, 얼음제국의 강제 연행으로 야니스와 이별해야 했던 서른,  야니스가 건네준 칠엽수 씨앗을 혼자 심는 지천명, 많은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해주며 세월을 보냈다가 세상을 떠난 마지막까지. 소설은 마리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쭉 발자취를 좇으며 루프마이제공화국의 풍습과 일상을 보여준다.


 마리카는 루프마이제공화국이 건국된 지 한달 후에 태어나, 조국이 얼음제국에 점령당했던 혹독한 시간을 지나 야니스가 곁에 없던 외로운 시간도 지나 루프마이제공화국의 건국 백 주년을 몇 년 앞두고 눈을 감는다. 서툰  뜨개질 실력 때문에 수공예시험에서 애를 먹었던 마리카가 야니스에게 낚시 장갑을 떠주고 마을 아이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줄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자신만의 엄지장갑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리카가 루프마이제공화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구나 싶었다. 조국이 얼음제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탄압을 받을 때조차 묵묵히 엄지장갑을 뜨는 나라. 엄지장갑 한 짝의 주인을 그리워하면서 강건히 칠엽수 씨앗을 심는 나라. 주인 잃은 엄지장갑의 털실을 다시 풀어 제 것으로 만들면서 마음을 표현하는 나라. 일본인 작가가 그린 루프마이제공화국과 얼음제국의 상황이 과거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과 겹쳐보여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나서야 루프마이제공화국이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를 모델로 한 가상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지장갑 풍습뿐만 아니라 하지축제, 다신교를 믿는 전통종교, 문양, 언어, 옛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 등이 실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이 소설은 내게 2018년 끝자락에 나온 《빨간머리 앤》에 가까웠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축제와 풍습을 따르는 활발한 소녀가 첫사랑과 영원의 사랑을 약조하고, 이후 그를 전쟁터에 보낸 뒤 남편없이 마을 아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은 기존의 《빨간머리 앤》 서사와 리메이크 버전에서 각색됐던 서사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 역시 관습적인 이야기 속에서 무구하게 전해 내려온 아름다운 교훈이겠거니 추측했는데, 책 뒷장에 첨부된 일러스트 에세이 <라트비아, 엄지장갑 기행>과 별책부록 <오가와 이토 작가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살짝 다르게 파악했구나 알았다.


 인터뷰에서 오가와 이토는 라트비아를 방문해 그 나라를 겪으면서 라트비아가 일본인이 소중히 여기는 문화와 마음이 비슷한 나라라고 느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많은 독자 분들이 라트비아를 알게 되고, 라트비아를 방문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에 에세이도 실었다고. 작가 인터뷰를 진행한 이윤정 번역가가 답했듯, 오가와 이토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 나 역시 라트비아라는 나라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정말 여행하고픈 나라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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