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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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 3기를 통해 읽은 5월의 책은 최수철의 장편소설 《독의 꽃》이다. 최수철 작가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내겐 한없이 낯선 남성 작가였다. 하드커버 양장에 예쁜 디자인을 가진 책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무한 해제시켰지만, 첫 책장을 열기까지 못내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작정단 3기를 하면서 경험하는 뜻깊은 순간이 바로 이렇게 내가 미처 몰랐던 묵직한 작가들을 마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함정임 작가, 김종광 작가, 강화길 작가 등 작정단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좋은 작가들이 많지 않았나!


 최수철 작가는 1993년 중편소설 <얼음의 도가니>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한국적 누보로망'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중견 작가였다. '누보로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검색해보니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려는 경향의 소설'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반소설'이라고도 부른다고. 영화로 비교해보자면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의 필름으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필름과 대응된다고 하겠다.


 이 책 《독의 꽃》은 '독'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독과 더불어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인생을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좇는다. 주인공 '나'는 상한 음식을 먹고 독에 감염되어 입원을 한다. 같은 병실에서 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삼십대 후반의 조몽구를 만나는데 조몽구는 늦은 밤마다 '독'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인생을 중얼거리곤 했다. 조몽구가 죽었는지, 실험실로 옮겨졌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를 망가뜨린 독과 투병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 '나'는 조몽구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대신 전하기로 결심한다. 조몽구의 이야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먼지로 돌아가기 전에 적어도 한 순간, 나를 이 세상 이 자리에, 죽음에 근접하여 더없이 신비롭게만 여겨지는 이 우주의 한 장소에, 나를 붙들어 두어줄 그 무엇, 위태롭게나마 내가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지탱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나는 뜨겁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조몽구의 이야기였다.

 프롤로그 이후의 본문은 바로 '나'가 늦은 밤 조몽구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조몽구의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게 되고,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 한 인간" 조몽구가 "'독'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이야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나'가 조몽구를 만나게 된 배경과 이야기를 마친 후의 술회를 담고 있고, 본문은 각각 조몽구의 유년 시절, 중학 입학부터 군대 시절 청년기, 입사 이후 성년기를 다루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 흐름에서 '독'을 품었거나 '독'에 무언가를 잃었거나 '독'을 이용하는 캐릭터들이 조몽구를 스쳐간다.


 '독'이 가진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나쁜 것, 악한 것, 힘들게 하는 것, 갉아먹는 것, 복잡한 것, 아프게 하는 것…… 하지만 이 책은 '독'의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해체한다. 조영로의 파탄적인 행동을 감내해야 했던 조몽구의 어머니 고운선이 견딜 수 있던 힘, 두통에 시달리며 이마를 긁지 않으면 안달이 났던 조몽구가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벌레와 곤충을 좋아하는 척하며 만들어낸 방패, 독의 노예였던 삼촌 조수호를 각성하게 만든 해결책은 모두 '독'에서 비롯되었다.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약도 결국 독이라는 것이다. '독'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삼촌 수호의 아래 대사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결국 조몽구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최수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도 '독'이 '약'이 될 수 있듯 세상은 무조건적인 이분법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쉬웠던 부분을 꼽자면 조몽구에게 '해독'을 해주는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조영로의 질투를 느껴야 했던 엄마부터 조몽구와 같은 학급 소녀 '자경'이나 조몽구를 간호했던 간호사 '영지' 같은 인물이 조몽구에게 해줬던 일들(조몽구를 씻겨주는 일, 조몽구를 끌어안고 이마를 만져주는 일, 조몽구의 성기를 애무하는 일)은 조몽구의 '독'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는 '해독'의 장면이다. 이때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고 불편했다. 여성을 신성시하고 구원자로 다루는 기존 여성상을 답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흡입력 있는 문체와 집요한 서술이 매력적인 책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홀려 책을 구매한 독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금세 빠져들어서 하루 안에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꽤 두께감이 있지만 걱정할 필요 없단 소리! 기억에 남는 문장들은 역시 '독'의 이중적인 이미지를 목도하는 대사들, 그리고 '독'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대사들이었다. 아래 문장들만 따로 모아 덧붙여본다.



"그날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거야. 독은 내게 다정하고 친숙했어.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

"세상에는 함부로 맛보았다가는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있지."
"그게 뭔가요?"
"독이야."
"왜 독을 맛보나요?"
"실험을 하기 위해서지. 독은 위험하지만 무척 흥미롭거든. 사람들이 독을 가지고 온갖 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지. 독에는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이야."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이제 나는 독과 하나로 살아가야 해. 그건 내 유한한 생명으로 벌일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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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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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 3기를 통해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 중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읽었다. 일전에 읽은 <무민의 겨울>에 이어 내겐 두 번째 무민 연작소설이다. 이 책은 전작인 《무민 파파와 바다》와 동일 시간 병렬식 구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무민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책을 다 읽고보니 아마 《무민 파파와 바다》에서는 (무민가족을 찾아온 손님들이 무민의 집에서 시끌벅적 그들을 그릴 동안!) 무민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집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겠구나 싶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완독하자 《무민 파파와 바다》도 덩달아 완독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캐릭터 드라마다. 천막을 짓고 살며 다섯 음계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스너프킨부터 청소를 좋아하지만 공포와 강박에 시달리는 필리용크, 이야기 속에 푹 빠진 채 엄마의 존재를 갈구하는 훔퍼 토프트, 항해를 꿈꾸며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되고 싶은 헤물렌, 앙칼진 말투가 매력적인 미이(오래 전 무민 가족에게 입양됐다.)의 언니 밈블, 백 살이 넘게 산 그럼블 할아버지까지! 총 여섯 캐릭터가 아웅다웅 저마다의 고민을 풀어놓고 나 좀 봐주세요, 내가 더 아파요 다투듯이 떠든다. 그들에겐 각자의 트라우마와 결핍 때문에 무민 가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민 가족이 예상과 달리 집에 없고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마치 ‘무민 가족 부재 극복 모임’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공동체 속에서 차츰 안정과 베풂을 건네 받은 이 요상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은 각자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방식을 도모한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필리용크는 청소를 하다가 큰 사고를 겪을 뻔하고 장롱에서 환영을 본 뒤로 청소라는 행위를 끊는다. 하지만 무민마마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연회를 꾸미면서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청소하고 싶단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고 늘 ‘배 키를 잡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던 헤물렌은 사실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는데, 스너프킨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배를 타고 짧은 항해를 마친 뒤 ‘자신은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때 헤물렌이 토프트에게 ‘배를 타본 뒤에야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이들은 무민 골짜기를 떠난다. 필리용크와 밈블이 가장 먼저 떠났고, 헤물렌은 무민파파를 위해 만들던 나무 위 오두막집이 항해 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집짓기를 포기하고 골짜기를 떠난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자신이 고집부려왔던 믿음이 일부 거짓됐음을 인정하고 겨울잠을 자기로 한다. 스너프킨은 골짜기에 겨울이 오고 눈 내릴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천막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무민의 집에 남은 건, 훔퍼 토프트였다.


 훔퍼 토프트는 공상에 빠져 있는 외로운 아이였다. 행복한 무민 골짜기와 인자한 무민마마를 상상해온 토프트는 무민가족 외에는 쉽사리 마음을 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헤물렌의 집짓기를 어거지로 도와주긴 하지만, 천둥을 자신이 만들어낸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골짜기가 비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혼자 장롱 안에 있는 등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겉도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상상의 힘은 점점 커져서 누군가 무민마마를 제 상상과 다르게 말하면 불쑥 화부터 내곤 했다. 그랬던 토프트도 담요를 챙겨준 필리용크나 머리를 빗겨준 밈블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씩 각성하게 된다. 모두가 떠난 외로운 밤, 으슥한 숲에 홀로 들어와 괴로워하던 토프트는 어느 순간 무민마마 역시 자신처럼 정처없이 이 숲속을 헤매며 아픔을 달랬을 것이라고,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느낀다. 일방적으로 무민마마에게 덧씌운 상상을 해체한 토프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무민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마침 무민파파가 걸어놓은 남포등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작가 토베 얀손이 엄마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쓸쓸한 결핍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의지와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집념이 돋보였다. 여섯 캐릭터들의 행동과 깨달음도 이런 주제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캐릭터들의 상황과 각성이 눈에 띈 대사들을 아래 모아보았다.



"귀가 안 들리나 보구먼. 귀 먹고 바싹 마른 늙은이일세. 어쨌거나 나이 먹는 걸 이해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반갑네그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잠자코 서서 오래도록 앤시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럼블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앤시스터도 똑같이 했다. 그럼블 할아버지와 앤시스터는 서로 연민을 느끼며 헤어졌다. - P144

토프트가 정원을 헤매고 다니다 끄트머리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 도착해서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친절하게 굴어도 싫고 남들한테 불친절하게 보이기 싫어서 잘해 줘도 싫어. 무섭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고 나한테 정말 관심 가져 줄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 P170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 옆에 앉아 신중하고도로 경건하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음은 노랫가락이 되었고 노랫가락은 음악이 되었다. 필리용크는 스너프킨의 노래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노래도 연주했고, 전에는 맛보지 못한 오롯한 평화를 느꼈다. 누가 하모니카 소리를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깥 정원은 고요했고, 기어다니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으며,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는 어두운 가을밤일 뿐이었다.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에서 팔을 베고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아침 8시 반까지 푹 자고 일어난 필리용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꼴이 다 뭐람! 오늘은 대청소를 해야겠어." - P197

헤물렌은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이게 바로 항해야. 온 세상은 출렁거리고 우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곳 맨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데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춥고, 창피하지만 항해를 나온 게 후회스럽기까지 해. 하지만 너무 늦었지. 스너프킨이 내가 겁먹은 줄은 몰랐으면 좋겠어.‘​ - P217

무민마마는 피곤하거나 화나거나 실망스럽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이 끝없는 숲 속에 찾아와 마음속 깊은 상처를 안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을 터였다……. 토프트는 전혀 다른 무민마마를 발견했고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토프트는 무민마마가 왜 슬퍼했는지 궁금해졌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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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렁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51
문크(Moonk) 지음 / 북극곰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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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서 읽게 된 그림책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읽는 그림책은 늘 내게 평화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이 작품은 그라폴리오와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이 공동 주최한 제4회 상상만발 책그림전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문크 작가가 글과 그림을 그렸다. 캐릭터 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답게 간결하고 귀여운 그림체가 특징인 듯하다.


 '드르렁'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잠버릇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심하게 코를 고는 잠버릇을 가진 주인공은 바로 아빠. 코 고는 소리가 점차 심해지자 엄마는 아이가 잠에서 깰까봐 일어나고,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멈춰보려 노력한다. 베개를 빼봤다가 배를 문질러봤다가 볼을 늘려본다. 몸을 옆으로 뉘여도 본다. 그럼에도 도통 그칠 생각 않는 드르렁 소리. 결국 아이가 설핏 잠에서 깨고 말자, 엄마는 아이를 토닥여 겨우 잠재운다. 그리고 아빠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이 등장! 이 책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빠가 옆에 누운 아이와 똑같이 젖꼭지를 입에 문 뒤에야 방 안에는 한밤다운 정적이 찾아온다. 엄마와 아빠, 아이가 꿈속으로 빠져드는 마지막 모습을 마치 별밭에 누운 듯 표현하며 그림책은 끝이 난다.


 '드르렁' 의성어로 가득찬 방과 두 페이지 가득 채워진 엄마의 심란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아빠와 여동생이 코를 심하게 고는 편이라, 그 둘이 생각나기도 했다. 코 고는 사람 옆에서 자꾸 뒤척일 수밖에 없는 그 기분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선지 엄마가 줄곧 안쓰럽고 절절히 이해됐다T^T...


 아이들에겐 사랑스럽게, 어른들에겐 유머러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책이다. 문크 작가의 행보도 지켜보고 싶다.



드르렁

아빠랑 아기랑
쪽쪽 쪽쪽쪽
좋은 꿈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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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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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대표작가 29인이 모인 짧은 소설집이다.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2019년 리커버판과 함께 나왔고, 나는 작정단 3기 덕분에 그 소설집과 이 책을 함께 읽게 됐다.


 소설집에 실린 '콩트 오마주'들은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서 느꼈던 시대상 혹은 여성의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거나, 박완서 작가를 회상하고 동경하거나, 박완서 작가를 그리워하는 소설들이다. 다수 작가들의 다양한 문체로 짧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단 점에서, 독서하는 내내 지하철이나 카페 등의 일시적인 장소에서 금세 좋은 단편영화를 읽어내리는 기분이었다.


 29인의 작가 중에 내가 이미 좋아하고 있던 작가가 참 많았다. 읽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작가들은 김성중 작가, 김숨 작가, 박민정 작가, 손보미 작가, 이기호 작가, 조남주 작가, 조해진 작가였다. 내가 한 번이라도 단편이나 장편을 읽어본 적 있는 작가일수록 더욱 기대가 됐던 것이 사실이다.


 독서를 끝마친 뒤, 내가 기대했던 작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김성중 작가의 <등신, 안심>, 김숨 작가의 <비둘기 여자>였다. <등신, 안심>은 권태로운 부부를 그린 소설이고, <비둘기 여자>는 토사물이 뒹구는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비둘기에 자신을 빗대는 소설이었다. 두 소설 다 여성의 자기혐오적인 시선과 현대 사회의 일면이 돋보이는 작품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인상적인 문구를 한곳에 꼭 적어두고 싶은 소설이기도 했다.


 아마 이 짧은 소설집의 제목은 백민석 작가의 <냉장고 멜랑콜리>와 백수린 작가의 <언제나 해피엔딩>에서 각자 따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냉동고의 비율이 큰 냉장고를 찾아 헤매는 웃픈 멜랑콜리와,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는 해피엔딩을 향한 희망. 박완서 소설이 우리에게 안겨줬던 감상도 그런 것이 아니었나. (덧붙이자면, 난 이 소설집에서 <언제나 해피엔딩>이 가장 좋았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박완서의 단편집 외에 장편 소설 하나 더 꼭 읽어봐야겠다. 이렇게 위대한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스스로가 참 안타깝고 머쓱하다.

만 원에 일곱 장하는 돈가스는 ‘가정의 평화’라는 성찬식 풍경을 완성하며 저녁 식사로 준비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자기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라고,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얼마나 산문적인가. _ 김성중, <등신, 안심>

"한 마리 사랑스러운 비둘기 같다고 했어요." _ 김숨, <비둘기 여자>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하고 말했다. _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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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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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2003년에 작가정신에서 펴낸 바 있는 박완서의 짧은 소설집이다. 이번에 리커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원래는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콩트집이 전신이었고, 이 콩트집이 절판된 지 십여 년 만에 작가정신에서 살려낸 소설집이라고 한다. 따라서 작품 대부분이 70년대에 쓰여졌다.


 박완서가 '책머리에'서 이 콩트집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유신시대에는 '잘 살아보자'는 구호에 맞춰 대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날 때였고, 각 기업들이 앞다투어 사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사보에서 선호하는 문예물이 바로 콩트였고, 당시 문예지와 일반 교양지와는 댈 필요도 없이 비싼 원고료를 제공했었다고. 박완서는 높은 원고료에 이끌려 화장품회사 사보에 콩트 연재를 하기도 했었지만, '작가로서 자기 세계를 확립하기도 전에 돈맛부터 알게 된 자신'에 싫증이 나서 사보 청탁을 거절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내겐 이 소설집이 내가 읽는 박완서의 첫 작품이었다. 때문에 유명 작가의 문체를 처음 읽는다는 생각에 읽기도 전부터 들떴다. 읽어보고 나니 짧은 소설집의 특성 상 장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내러티브나 다양한 캐릭터를 엿볼 수는 없어서 아쉬웠지만, 박완서라는 작가의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70년대라는 시대상이 물씬 느껴져 향수와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성으로서 그때와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여성관과 여성의 고민이 보여 흥미롭고 안타까운 책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짧은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시리즈다. 총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는 시리즈는 각각 분희-경숙-후남이라는 여성 셋을 조명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다. 이들은 시어머니, 며느리, 손녀로 이어지는 가족관계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1>은 시어머니가 질투하듯 분희와 남편 장석 사이를 갈라놓고 있다고 고부갈등을 암시하며 막을 연다. 이에 장석은 어느날 갑자기 분희를 뒤란으로 끌고가서 마른 콩깍지 더미 위에 그녀를 눕혀 겁탈한다. 분희가 젊었을 적은 70년대보다 앞선 시대이니 부부강간이라는 개념이 더욱 생소하고 낯설었을 시기다. 장석은 이후 읍내 색주가와 정분이 나서 분희를 외롭게 했고, 서른 겨우 넘긴 젊은 나이에 징용으로 끌려가 영영 오지 않게 된다. 허나 분희에겐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외아들을 안겨드린 뒤로 시어머니는 분희를 더이상 괴롭히지 않는다. 아들 덕분에 숨통 트일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시절, 분희의 기구한 사연은 분희 역시 외아들에게 집착하는 시어머니가 되게끔, 기울어진 사고방식을 되물림하게끔 만든다. 


 분희가 시대의 가해자로 작용하는 모습은 분희의 며느리 경숙 앞에서 드러난다. 경숙이 첫 아이로 딸을 낳자 분희는 딸 이름을 굳이 후남(後男)으로 짓기를 고집하고, 경숙은 울며 겨자먹기로 딸 이름을 시어머니 뜻대로 짓는다. 경숙과 남편은 금슬이 좋았고 경숙은 자신의 의견을 똑바로 말할 수 있는 당당한 여성이었지만, 그녀가 불임 판정을 받으면서 시어머니 분희에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은근한 압박을 받고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결국 경숙은 남편이 첩을 들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첩이 아들을 낳아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인) 시어머니가 주도하는 가부장제 서사에서 이방인이 된다.


 분희와 경숙의 상처는 훌륭한 학교를 졸업하고 S산업의 사원으로 채용된 똑똑한 후남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후남은 회사 동기와의 연애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회사로부터 꾸준히 일을 그만두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일과 결혼을 두 손에 함께 쥘 수 있다는 용기가 있던 후남은 사직서를 내지 않는다. 이에 회사는 그녀와 남편 기철을 속초와 진주로 멀리 전근 발령을 내려 둘 중 한 명(특히 후남)이 퇴사하게끔 종용한다. 후남은 점점 투지를 잃는다. 아들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는 시집 식구의 비난보다, 할머니 분희와 어머니 경숙의 애걸 때문이었다. 시집식구 눈밖에 나 시집살이를 마저 못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더욱이 자신을 외아들과 다를 바 없이 떳떳하고 독립적으로 키운 어머니 경숙의 애원을 보며 후남은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여자 길들이기'의 음모가 끝나지 않은 도시에서 후남이 거듭 고배를 마시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세 여성의 서사와 캐릭터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꾸준히 담당해온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 가부장제 이방인, 고정된 성역할과 똑똑한 여성의 프레임을 보여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는 남성 동기가 압도적으로 수세인 70년대 대기업에서 똑똑한 여성인 후남이 받는 질시와 후남 스스로 느끼는 고민이 현재 2019년에도 다르지 않아 놀라운 작품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박완서는 첨예한 고부갈등과 여성이 점차 가부장제와 고정된 성역할을 체화하는 과정, '아들'과 '딸'이라는 생물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을 (딸을 원친 않았지만 효도로는 좋다는 분희의 입장이나, 딸과 아들은 둘 다 독립적일 수 있다고 하면서 딸이 시집을 가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경숙의 입장) 깊은 통찰력으로 명징하게 그려낸다. 시대를 앞선 작가 덕분에 70년대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박완서의 유명작들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굳건하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또한 이 책은 박완서의 유명작만 봐았던 독자에게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갈 소설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준 책이기도 해서,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나왔던 김금희 작가나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집도 이 책 이후 연달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역시 앞서 언급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에서 골랐다. 아래 첨부한다.

후남이는 결혼하길 원했으나 예속되길 원하진 않았다. 사랑받고 사랑하길 원했지 애완받고, 애완받기 위해 자기를 눈치껏 변경시키고 배운 걸 무화시키길 원치는 않았다._<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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