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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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정단 3기를 통해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 중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읽었다. 일전에 읽은 <무민의 겨울>에 이어 내겐 두 번째 무민 연작소설이다. 이 책은 전작인 《무민 파파와 바다》와 동일 시간 병렬식 구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무민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책을 다 읽고보니 아마 《무민 파파와 바다》에서는 (무민가족을 찾아온 손님들이 무민의 집에서 시끌벅적 그들을 그릴 동안!) 무민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집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겠구나 싶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완독하자 《무민 파파와 바다》도 덩달아 완독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캐릭터 드라마다. 천막을 짓고 살며 다섯 음계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스너프킨부터 청소를 좋아하지만 공포와 강박에 시달리는 필리용크, 이야기 속에 푹 빠진 채 엄마의 존재를 갈구하는 훔퍼 토프트, 항해를 꿈꾸며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되고 싶은 헤물렌, 앙칼진 말투가 매력적인 미이(오래 전 무민 가족에게 입양됐다.)의 언니 밈블, 백 살이 넘게 산 그럼블 할아버지까지! 총 여섯 캐릭터가 아웅다웅 저마다의 고민을 풀어놓고 나 좀 봐주세요, 내가 더 아파요 다투듯이 떠든다. 그들에겐 각자의 트라우마와 결핍 때문에 무민 가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민 가족이 예상과 달리 집에 없고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마치 ‘무민 가족 부재 극복 모임’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공동체 속에서 차츰 안정과 베풂을 건네 받은 이 요상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은 각자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방식을 도모한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필리용크는 청소를 하다가 큰 사고를 겪을 뻔하고 장롱에서 환영을 본 뒤로 청소라는 행위를 끊는다. 하지만 무민마마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연회를 꾸미면서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청소하고 싶단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고 늘 ‘배 키를 잡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던 헤물렌은 사실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는데, 스너프킨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배를 타고 짧은 항해를 마친 뒤 ‘자신은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때 헤물렌이 토프트에게 ‘배를 타본 뒤에야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이들은 무민 골짜기를 떠난다. 필리용크와 밈블이 가장 먼저 떠났고, 헤물렌은 무민파파를 위해 만들던 나무 위 오두막집이 항해 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집짓기를 포기하고 골짜기를 떠난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자신이 고집부려왔던 믿음이 일부 거짓됐음을 인정하고 겨울잠을 자기로 한다. 스너프킨은 골짜기에 겨울이 오고 눈 내릴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천막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무민의 집에 남은 건, 훔퍼 토프트였다.


 훔퍼 토프트는 공상에 빠져 있는 외로운 아이였다. 행복한 무민 골짜기와 인자한 무민마마를 상상해온 토프트는 무민가족 외에는 쉽사리 마음을 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헤물렌의 집짓기를 어거지로 도와주긴 하지만, 천둥을 자신이 만들어낸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골짜기가 비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혼자 장롱 안에 있는 등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겉도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상상의 힘은 점점 커져서 누군가 무민마마를 제 상상과 다르게 말하면 불쑥 화부터 내곤 했다. 그랬던 토프트도 담요를 챙겨준 필리용크나 머리를 빗겨준 밈블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씩 각성하게 된다. 모두가 떠난 외로운 밤, 으슥한 숲에 홀로 들어와 괴로워하던 토프트는 어느 순간 무민마마 역시 자신처럼 정처없이 이 숲속을 헤매며 아픔을 달랬을 것이라고,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느낀다. 일방적으로 무민마마에게 덧씌운 상상을 해체한 토프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무민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마침 무민파파가 걸어놓은 남포등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작가 토베 얀손이 엄마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쓸쓸한 결핍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의지와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집념이 돋보였다. 여섯 캐릭터들의 행동과 깨달음도 이런 주제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캐릭터들의 상황과 각성이 눈에 띈 대사들을 아래 모아보았다.



"귀가 안 들리나 보구먼. 귀 먹고 바싹 마른 늙은이일세. 어쨌거나 나이 먹는 걸 이해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반갑네그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잠자코 서서 오래도록 앤시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럼블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앤시스터도 똑같이 했다. 그럼블 할아버지와 앤시스터는 서로 연민을 느끼며 헤어졌다. - P144

토프트가 정원을 헤매고 다니다 끄트머리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 도착해서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친절하게 굴어도 싫고 남들한테 불친절하게 보이기 싫어서 잘해 줘도 싫어. 무섭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고 나한테 정말 관심 가져 줄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 P170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 옆에 앉아 신중하고도로 경건하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음은 노랫가락이 되었고 노랫가락은 음악이 되었다. 필리용크는 스너프킨의 노래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노래도 연주했고, 전에는 맛보지 못한 오롯한 평화를 느꼈다. 누가 하모니카 소리를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깥 정원은 고요했고, 기어다니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으며,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는 어두운 가을밤일 뿐이었다.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에서 팔을 베고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아침 8시 반까지 푹 자고 일어난 필리용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꼴이 다 뭐람! 오늘은 대청소를 해야겠어." - P197

헤물렌은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이게 바로 항해야. 온 세상은 출렁거리고 우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곳 맨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데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춥고, 창피하지만 항해를 나온 게 후회스럽기까지 해. 하지만 너무 늦었지. 스너프킨이 내가 겁먹은 줄은 몰랐으면 좋겠어.‘​ - P217

무민마마는 피곤하거나 화나거나 실망스럽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이 끝없는 숲 속에 찾아와 마음속 깊은 상처를 안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을 터였다……. 토프트는 전혀 다른 무민마마를 발견했고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토프트는 무민마마가 왜 슬퍼했는지 궁금해졌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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